프레데릭 뢰베(Frederick Loewe) - 프리츠 뢰베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작곡
프레데릭 뢰베
토니상에 빛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작곡가인 프레데릭 뢰베(Frederick Loewe)는 1901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비엔나에서 태어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팜스프링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작사가인 알란 제이레르너(Alan Jay Lerner)와 협동하여 브로드웨이의 전설적인 뮤지컬인 My Fair Lady(마이 페어 레이디)와 아서왕의 전설을 담은 Camelot(카멜롯)을 작곡하였다. 이 두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포스터. 오드리 헵번과 렉스 해리슨
뢰베의 아버지인 에드몬드는 유태인 오페레타 스타였다. 한창 때에는 유럽의 전역은 물론 미국과 남미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더구나 레하르의 오페레타 Merry Widow(메리 위도우)에서 다닐로의 이미지를 창조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어린 프레데릭 뢰베는 아버지를 따라 베를린에 와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뢰베는 다섯 살 때에 프러시아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12세까지 다녔다. 어릴 때부터 음악적 감각이 유난히 뛰어났던 뢰베는 피아노를 혼자의 힘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얼마후에는 아버지의 노래 연습에 반주를 할 정도가 되었다. 뢰베는 일곱 살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뢰베를 베를린 음악원에 보냈다. 뢰베는 나중에 유명한 작곡가가 된 페루치오 부소니(Feruccio Busoni), 유진 달베르(Eugene d'Albert)와 함께 작곡공부를 했다. 뢰베는 13세 때에 베를린교향악단과 피아노 협연을 하였다. 베를린교향악단이 생긴 이래 가장 나리 어린 협연자였다.
프레데릭 뢰베(우), 잭 워너와 함께
1924년, 뢰베의 아버지는 뉴욕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뢰베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가서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작곡하여 성공하리라고 결심했다. 뢰베가 23세 때였다. 그러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뢰베는 먹고 살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일들을 다했다. 어떤 때는 소의 귀에 번호표를 달아주는 일, 서부의 금광에서 금을 캐내는 일, 돈을 받고 권투를 하는 일등 닥치는 대로 했다. 얼마후 그는 독일 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무성영화의 피아노 반주도 맡게 되었다. 뢰베는 어린양 클럽(Lambs Club)에 자주 갔었다. 이곳에는 뉴욕의 이름 있는 영화제작자, 연출자, 극장지배인, 감독들이 자주 오는 곳이었다. 뢰베는 1942년 이곳에서 알란 제이 레르너를 만났다. 두 사람의 첫 합작은 디트로이트의 증권회사가 위촉한 작품으로 Barry Connor(배리 콘노)의 익살극인 The Patsy(푼수)를 뮤지컬로 만든 Life of the Patsy(푼수의 생활)이었다. 요크빌에서 9주나 연속 공연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입은 두 사람은 1943년 What's Up?(웬 일?)을 만들어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두 사람의 첫 히트작은 Brigadoon(브리가둔: 1947)이었다. 신비스런 스코틀랜드의 마을에서 일어나는 환상적인 로맨스를 다룬 내용이었다. 1956년에는 드디어 My Fair Lady가 등장하였다.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인 Pygmalion(피그말리온)을 바탕으로 삼은 뮤지컬이었다. 헨리 히긴스 교수는 렉스 해리슨이, 엘라이자 둘리틀 양은 줄리 앤드류스가 맡았다. 뉴욕과 런던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베스트뮤지컬 부문의 토니상을 받았다. MGM이 두 사람의 재능에 깊이 감탄하여 영화로 만들 뮤지컬인 Gigi(지지)를 작곡해 달라고 의뢰했다. 지지는 9개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두 사람의 다음번 브로드웨이 작품은 Camelot(카멜롯)이었다. 오픈되었으나 반응은 뜨겁지 않았다. 제작자와 감독이 홍보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유명한 에드 설리반 쇼에 카멜롯의 주역을 맡은 리챠드 버튼, 줄리 앤드류스, 로버트 굴레(Robert Goulet)를 출연시켜 카멜롯에 나오는 노래도 직접 부르도록 했다. 또한 레르너와 뢰베도 함께 출연하여 카멜롯을 완성하기까지의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그 다음날 아침, 매표소는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카멜롯은 또 다른 히트작이 되었다.
프리츠 뢰베(프레데릭 뢰베)의 Sag ja! 악보 표지
뢰베는 이쯤해서 은퇴하기로 결심하고 캘리포니아의 팜 스프링스에 집을 사서 조용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973년에 레르너가 찾아와 영화 Gigi를 다시 제작한다고 하는데 새로 몇 곡의 노래가 더 들어가야 한다고 설득하여 다시 작곡에 손을 댔다. 그렇게하여 Gigi의 신작 영화가 나왔다. 뢰베는 기왕에 다시 작곡에 손을 댄 김에 The Little Prince(소공자)의 뮤지컬영화 버전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영화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음악을 담은 CD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뢰베는 197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올라갔다. 그는 팜 스프링스에서 여생을 지내다가 1988년 향년 87세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지금도 계속 연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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