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공동묘지 문화

[참고자료] 하이든공원(Haydnpark)

정준극 2010. 3. 15. 17:05

[참고자료] 공원이 된 공동묘지

 

하이든공원(Haydnpark)

하이든의 처음 묘지가 있었던 곳

 

하이든공원의 한쪽에 남아 있는 하이든의 묘비

 

'교향곡의 아버지' 또는 '현악4중주곡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란츠 요셉 하이든(1732-1809)의 이름을 붙인 ‘하이든공원’은 12구 마이들링(Meidling)에 있다. 하이든공원은 마이들링과 마르가레텐의 경계지역에 있는 가우덴츠도르프 귀어텔(Gaudenzdorfer Gürtel)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있던 훈트슈투름 공동묘지(Hundstrumer Friedhof)를 폐쇄하고 1926년에 공원으로 만든 것이다. 하이든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하이든의 유해가 아이젠슈타트의 갈보리언덕교회 지하 영묘로 옮겨지기 전에 이곳 훈트슈투름 공동묘지에 잠시 매장되었던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이든은 굼펜도르프 자택(Gumpendorfer Haus)에서 1809년 5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굼펜도르프는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지 한참 후인 1850년까지 비엔나의 한 구역을 구성하는 지역이었으나 그후 현재의 6구 마리아힐르프에 통합되었다.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굼펜도르프 하우스는 현재의 하이든가쎄에 있다. 당시 굼펜도르프의 교구교회인 성애기디우스교회(Die Gumpendorfer Pfarrkirche zum heiligen Aegidius: Ägidiuskirche)에서는 하이든이 작고한 날의 다음날인 6월 1일에 그의 소천을 축복하는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 굼펜도르프라는 이름은 일찍이 12세기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이곳에 커다란 웅덩이(Gumpe: Tümpel)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수 없다.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다음날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던 굼펜도르프의 애기디우스교회

 

하이든은 자기의 묘지만은 특별하게 만들어 줄것을 희망했지만 당시 규정상 그렇게 할수 없어서 작은 면적만을 배당받았을 뿐이었다. 하이든의 유해는 1820년 아이젠슈타트로 옮겨졌다. 훈트슈투름 공동묘지에 있던 상당수 저명인사들의 묘지는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로 이관되었다. 그중에는 화가인 야콥 가우어만(Jakob Gauermann), 역시 화가인 요셉 단하우저(Josef Danhauser), 양탄자 제조가인 필립 하스(Philipp Haas)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과 위대한 하이든을 비교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이든의 묘지가 있었던 장소에는 Non omnis moriar라는 라틴어 문구가 적혀 있는 묘비를 세웠다. 번역하면 Ich werde nicht ganz sterben(나는 결코 사망하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하이든은 말년에 앵무새 한마리와 함께 지냈다. 그 앵무새는 하이든을 '파파 하이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파파 하이든'(Papa Haydn)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하이든공원의 모습

 

잘 아는 대로 요셉2세 황제의 개혁정책에 따라 비엔나 성벽 안에 있는 모든 공동묘지는 위생상 문제로 폐쇄하고 대신 성벽 밖에 공동묘지들을 마련하여 사용토록 되었다. 비엔나 성벽의 경계는 오늘날의 귀어텔을 말한다. 그렇게 하여 1783년에 생긴 비엔나공동묘지(communale Friedhöfe Wien)가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 배링 공동묘지, 슈멜츠 공동묘지, 마츨라인스도르프 공동묘지, 그리고 훈트슈투름 공동묘지였다. 이들 다섯 개의 공동묘지 중에서 훈트슈투름이 가장 작은 규모였다. 훈트슈투름 공동묘지는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위치가 좋기 때문에 1848년 10월 혁명의 집회장소가 되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공원이 되어 마이들링의 자랑으로 되어 있다. 하이든공원에서는 핸드볼, 축구를 할수 있다. 지하에는 주차장을 마련했다.

 

귀어텔 쪽에 있는 하이든공원 입구 기념탑. 하이든파크라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