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4구 펜징

[참고자료] 테너 알프레드 피카버(Alfred Piccaver)

정준극 2010. 4. 1. 09:31

비엔나를 진정으로 사랑한

테너 알프레드 피카버(Alfred Piccaver)

 

알프레드 피카버(피키)

 

라 보엠에서 로돌포(Rodolfo)는 테너라면 누구나 한번 맡아 보고 싶은 역할이다. 라 보엠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오페라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다. 그러므로 주인공인 로돌포와 미미는 오페라 주인공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역사상 로돌포로서 가장 유명했던 테너는 피키(Picci)라는 애칭의 알프레드 피카버라고 한다. 피카버의 대명사는 로돌포였다. 피카버는 비엔나를 사랑하였다. 비엔나의 음악을 사랑하였으며 비엔나의 생활을 사랑하였다. 그는 영국 출신으로 전쟁 때에 미국시민이 되었지만 비엔나를 너무나 사랑하여서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파격적인 대우조건을 뿌리치고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활동하다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피카버는 1884년 영국 롱 서튼(Long Sutton)의 링컨셔어(Lincolnshire)에서 태어났다. 그가 두 살도 되기 전에 부모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미국시민이 되었다. 피카버는 전기공학자가 되기 위해 학문을 닦았지만 음악적인 재능을 포기할수 없어서 1905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학교에 등록하였다. 학교장인 하인리히 콘리트(Heinrich Conried)는 피카버의 빛나는 음성과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1907년 피카버를 프라하로 보내 본격적인 성악 공부를 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피카버는 프라하에서 당대의 성악가인 루드밀라 프로샤츠카-노이만(Ludmila Prochazka-Neumann: 1872-1954)의 가르침을 받았다.

 

베르디의 리골레토에서 만투아 공작을 맡은 피카버 

 

그는 프라하에서 성악을 공부하는 조건으로 프라하독일극장과 3년 계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1907년 9월 9일 오토 니콜라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로 데뷔하였다. 그후 3년 동안 피카버는 베르디, 플로토우, 바그너, 모차르트, 구노의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하여 빛나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마침 1910년 프라하를 방문한 이탈리아의 마티아 바티스티니(Mattia Battistini) 순회오페라단이 피카버의 공연을 보고 감동하여 그를 순회공연단의 멤버로 초청하였다. 다음 공연장소는 비엔나였다. 비엔나간 피카버는 궁정오페라(슈타츠오퍼의 전신)의 무대를 빛나게 했다. 비엔나 슈타츠오퍼가 당장 피카버에게 오퍼를 보냈다. 하지만 피카버는 프라하독일극장과의 3년 계약 때문에 슈타츠오퍼의 제안을 수락할수 없었다. 마침내 1912년 9월 6일, 피카버는 프라하에서의 계약이 만료되어 비엔나 슈타츠오퍼에 당도할수 있었다. 이후 피카버는 슈타츠오퍼의 종신 성악가가 되었다.

피카버는 따듯하고 벨베트처럼 부드러우며 서정적인 테너음성을 지녔다. 그는 특히 레가토에서 뛰어났으며 딕션이 분명하였다. 그런가하면 바리톤과 같은 저음의 부드러움도 지니고 있었다. 피카버의 공연을 본 어떤 영국의 평론가는 그를 ‘느슨한것 같으면서도 남성적인 힘찬 음성을 지닌 테너 중의 테너’라고 평한 것만 보아도 피카버의 특색을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피카버를 ‘프라하에서 온 카루소’라고 부르며 사랑하였다. 피카버가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주로 맡은 역할은 가장 이상적인 역할은 로돌포를 비롯하여 카바라도씨, 카니오, 라다메스, 플로레스탄, 렌스키, 발터 등이었다. 그는 비엔나에 있으면서 수많은 음반을 취입하였다. 그중 대부분은 오늘날 CD로 만들어져 구할수 있다.  

 

피카버의 전설적인 음성을 담은 음반 

 

피카버는 비엔나를 사랑하였고 비엔나 스타일의 생활을 사랑하였다. 그래서 뉴욕 메트로오페라의 줄리오 가티-카자짜(Giulio Gatti-Casazza) 감독이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메트로에서 활동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이를 사양하고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후 메트로는 피카버에게 돌아와 달라는 제안을 하지 않았지만 비엔나의 슈타츠오퍼는 그런 피카버를 높이 존경하여 비록 메트로보다는 못하지만 할수 있는 한의 최대의 예우를 해주었다. 사실 피카버로서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뉴욕의 소란스러움에 지쳐 있느니보다는 비엔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아침 신문을 보는 편이 더 즐거운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1차 대전이 터졌을 때에 피카버는 비엔나에 있었지만 미국시민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쟁의 막바지인 1917년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자 피카버는 주위로부터 비엔나를 떠나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당국은 만일 그가 슈타츠오퍼에서 계속 노래를 부른다면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비엔나에서 안전하게 지낼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1차 대전의 와중에서도 국경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후 그는 잠시 미국을 방문하여 1923-24년 시카고에서 공연을 가졌다. 1924년에는 진짜 조국인 영국의 초청으로 런던의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그것이 피카버의 해외 공연의 모두였다. 그후 피카버는 비엔나를 결코 떠나지 않았다. 피카버는 진정으로 비엔나를 사랑하였지만 비엔나는 변덕스러웠다. 어느 사회에서든지 그렇지만 비엔나에도 피카버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피카버가 영국에서 태어난 미국시민임을 내세우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1931년 12월 31일로서 피카버의 슈타츠오퍼와의 계약이 만료되었다. 하지만 재계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겉으로의 이유는 보수를 합의하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피카버는 이미 47세의 중년이었다. 더 이상 로돌포의 이미지를 제공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숨길수 없는 사실이었다.

 

피카버는 비엔나에 계속 살면서 다른 도시의 초청을 받아 오페라에 간혹 출연하였다. 얼마 후부터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1937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1년전, 피카버는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영국에 간 그는 음반취입과 방송출연을 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전쟁이 끝나자 피카버는 다시 비엔나로 돌아갔다. 1955년 슈타츠오퍼의 재개관에 초청을 받아서였다. 그후 피카버는 비엔나를 떠나지 않고 여생을 보냈다. 그는 1958년 9월 23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를 추모하여 국장을 치루어주었다. 그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 묘역에 안장되었다. 비엔나 14구 펜칭의 피카버제그(Piccaverweg)는 그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