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4구 펜징

[참고자료] 하인리히 안쉬츠(Heinrich Anschütz)

정준극 2010. 4. 6. 10:44

명배우 하인리히 안쉬츠(Heinrich Anschütz)

베토벤의 장례식 때에 조사 낭독

 

하인리히 안쉬츠

 

하인리히 안쉬츠(1785-1865)는 베토벤의 장례식에서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조사를 낭독한 배우이다. 1827년 3월의 베토벤의 장례식에서도 감정에 넘친 위대한 저음으로 조사를 읽어 만인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그는 뛰어난 연기력과 굵고 깊은 인상적인 음성으로 비엔나의 극장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준 명배우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배우였다. 그가 출연하는 연극은 언제나 대성황이었으며 관중들은 그를 존경하는 나머지 연극이 끝났어도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하인리히’를 연호하며 그를 찬양하였다. 하인리히 안쉬츠가 맡았던 대표적인 역할은 Angust von Kotzebue의 Die beiden Klingsberg(두 사람의 클링스버그)에서 Adolf von Klingsberg, 셰익스피아의 König Lear(리어 왕)에서 타이틀 롤, 오토 루드비히의 Der Erbförster(세습 산림관)에서 타이틀 롤, 괴테의 Götz von Berlichingen에서 타이틀 롤, 셰익스피어의 Die lustigen Weiber von Windsor(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에서 John Falstaff, 프리드리헤 헤벨의 Maria Magdalena(마리아 막달레나)에서 Meister Anton, 쉴러의 Wilhelm Tell(윌리엄 텔)에서 Frhr von Attinghausen, 쉴러의 Don Carlos(돈 카를로스)에서 Marquis de Posa, 쉴러의 Kabale und Liebe(음모와 사랑)에서 Musikus Müller 등이다.

 

하인리히 쉬츠의 원래 이름은 하인리히 요한 임마누엘 쉬츠이다. 1785년 독일의 루카우(Luckau)에서 태어나 1865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인리히 쉬츠는 루카우의 고아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중에 궁정배우가 괸 에두아르트 안쉬츠는 하인리히의 동생이다. 하인리히는 리이프치히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대학생 시절에 틈만 나면 바드 하우흐슈타트(Bad Lauchstädt)에 있는 괴테극장과 괴테가 직접 지도감독하는 봐이마르극장을 찾아갔다. 그래서 사실상 하인리히의 관심은 법률이 아니라 연극이었다.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에서의 베토벤 장례식

 

하인리히 쉬츠는 1807년 1월 22일 뉘른베르크 국립극장에서 ‘클링스버그의 아돌프’라는 작품에 처음 데뷔하였다. 하인리히는 이 작품에서 신인으로서는 주역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아 기염을 토하였다. 1810년 그는 성악가인 요제피네 케테(Josephine Kette)와 결혼하였다. 1811년까지 뉘른베르크 극장에서 활동했던 그는 그후 단치히(Danzig)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1814년 브레슬라우로 갔으며 1821년에 비엔나의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 도착하였다. 그는 당장에 궁정극장의 주요 멤버로 부상되었으며 나중에는 무대감독까지 맡았다. 1818년 그는 여베우인 에밀리 부테노프(Emilie Butenop)와 재혼하였다. 그는 에밀리와의 사이에서 네 자녀를 두었다. 여배우인 마리 에밀리 아우구스테 코버봐인(Marie Emilie Auguste Koberwein)은 딸이며 극작가인 로더리히 안쉬츠(Roderich Anschütz)는 큰 아들이고 오페라 성악가인 알렉산더 안쉬츠는 둘째 아들이다. 하인리히는 비엔나에서 지내면서 예술가클럽인 Die Ludlamschöhle(루들람슈욀레)의 멤버였다. 그는 이를 통하여 프란츠 그릴파르터, 안토니오 살리에리 등과 교분을 맺게 되었다. 하인리히는 1865년 6월 4일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다. 쉴러의 ‘음모와 사랑’에서 무지쿠스 뮐러의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반년 후인 12월 29일 그는 향년 80세로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츨라인스도르프에 있는 개신교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