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유서깊은 광장

암 호프: 바벤버그의 역사가 숨쉬는 곳

정준극 2010. 4. 2. 06:30

암 호프(Am Hof)

바벤버그왕조의 궁전이 있던 비엔나의 핵심

 

 교황이 방문하면 발코니에서 강복하는 장소로 유명한 암 호프 교회. 원래는 바벤버그 궁전에 속한 교회였다. 이곳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종식이 선포되었다.

 

암 호프(Am Hof)는 호프, 즉 궁전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일찍이 12세기 초에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맡은 바벤버그 왕조가 비엔나를 수도로 삼고 궁전을 세운 곳이 암 호프이다. 암 호프는 비엔나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위치적으로는 슈테판스플라츠가 비엔나의 센터라고 말할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암 호프가 비엔나의 센터이다. 그러므로 비엔나를 방문한 사람은 다른 곳도 중요하지만 암 호프에 가서 중세로부터의 비엔나의 진수를 느낄 필요가 있다. 암 호프는 비엔나 1구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보그너가쎄(Bognergasse), 나글러가쎄(Naglergasse), 하이덴슈쓰(Heidenschuss), 패르버가쎄(Färbergasse), 유덴플라츠(Judenpltz) 그리고 슐호프(Schulhof)의 사이에 있으며 중세로부터의 유태인 게토와 이웃하고 있다. 암 호프는 중세 이전에도 이미 로마의 빈도보나(Vindobona) 병영이 있었던 곳이다.

 

암 호프는 1155-1280년에 비엔나를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삼은 바벤버그 왕조가 처음으로 궁전을 지은 곳이다. 바벤버그의 공작인 야소미어고트(Jasomirgott) 하인리히 2세가 1155년에 궁전(Hof)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의 군주를 황제나 왕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공작이라고 불렀다. 바벤버그 왕조의 궁전이 들어서자 이어 여러 귀족들이 궁전을 중심으로 저택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마치 서울의 북촌과 같다. 오늘날 암 호프 광장을 둘러싸고 역사적인 팔레(Palais)들이 서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음은 12-13세기부터의 모습이다. 궁전 앞에는 넓은 광장을 두었다. 암 호프 광장은 주로 축제와 왕실 행사장으로 사용되었다. 궁전의 서북쪽과 남서쪽에는 로마시대로부터의 성채를 연결한 성벽이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유태인 거주지로 통하는 성문이 있었다. 바벤버그의 궁전과 암 호프 광장이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크게 각광을 받은 것은 야소미어고트 하인리히1세와 그의 부인 테오도라가 1165년에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바바로싸의 프리드리히 황제를 크게 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리드리히 황제의 치하에 있는 변방국이었다. 하인리히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공작이 된 레오폴드5세 때에는 암 호프에서 주로 무술시합이 열렸다. 그리고 1177년부터는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1195년부터는 연극이나 노래공연이 열리는 장소가 되었다. 이때에 라인마르 폰 하게나우(Reinmar von Hagenau)와 그의 문하생인 발터 폰 데어 포겔봐이데(Walther von der Vogelweide)등 유명한 음유시인과 가수들이 등장하여 경연대회를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암 호프 교회의 내부와 중앙제단 

 

1280년경에 바벤버그의 공작은 지금의 호프부르크가 있는 곳에 슈봐이처트락트(스위스 동)를 건설하고 암 호프를 떠나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그리하여 암 호프는 잠시 바벤버거플라츠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곳에 국가의 화폐를 주조하는 관청이 들어섰다. 암 호프 10번지와 12번지의 건물이 그것으로 뒤편의 유덴플라츠의 게토와 연결되었다. 암 호프의 광장에는 시장이 열렸지만 1340년까지는 장사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1365년에는 궁정주조국이 들어선 자리에 갈멜파 수도원이 임시로 입주하였다. 그후 1386년에 알브레헤트3세가 그 건물을 갈멜파 수도원에게 공식으로 기증하였다. 암 호프라는 명칭은 그때에 비로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갈멜파 수도승들은 옛 바벤버그 궁전 내에 있던 예배처(카펠레)를 확장하여 삼위일체 교회로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암 호프 교회이다. 당시에 증축한 찬양대석(Chor)은 오늘날에도 슐호프가쎄와 쿠렌트가쎄(Kurrentgasse)가 만나는 끝자락에 삐죽 나와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암 호프 교회는 9 Chöre der Engel(노인 쾨레 데어 엥겔)이라고도 부른다. 천사의 아홉 계층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천사를 의미한다. 한편, 갈멜파 수도원은 인접한 집들도 몇 채를 사들였다. 주로 유태인들이 살았던 집들이다. 그중에는 시인인 페터 주헨비르트(Peter Suchenwirt)의 집도 포함된다.

 

암 호프 광장은 쇼텐슈티프트와 쇼텐키르헤가 자리 잡고 있는 프라이융과도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좁은 길이었으나 1846년에 건물들을 허물고 길을 확장하여 오늘날의 프라이융 거리로 만들었다. 암 호프 광장은 14세기부터 시장으로 이용되었지만 나중에는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463년에는 이곳에서 비엔나 시장인 볼프강 홀처가 알브레헤트6세의 명에 의해 참수형을 받았다. 그러나 매번 참혹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515년에는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형제가 동시결혼식을 가져 즐거움을 주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암 호프 광장을 크렙스마르크트(Krebsmarkt)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생선과 게(크렙스)를 팔았기 때문이다. 바다가 없는 오스트리아는 멀리 지중해 연안국으로부터 수산물을 가져왔다. 게는 특별히 비쌌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구경만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로부터 크렙스마르크는 고급 물건을 파는 시장이라는 뜻으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는 채소와 과일도 파는 시장으로 확대되었다.

 

1554년 갈멜파 수도원이 관장하던 교회는 당시 한창 기세를 떨치던 예수회의 손으로 넘어갔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은 반종교개혁 운동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예수회는 그 앞장에 섰었다. 그러므로 예수회는 로마가톨릭의 비호를 받으면서 갖가지 혜택을 누렸다. 암 호프 교회를 받은 것도 그같은 혜택의 일환이었다. 예수회는 암 호프를 ‘바이 덴 오베렌 예수이텐’(Bei den oberen Jesuiten)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리고 광장에서의 장사를 금지하고 교회 앞 광장을 종교적인 연극이나 설교, 강연회를 개최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1773년 예수회가 철수하자 광장은 다시 암 호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수회가 사용하던 수도원건물은 1783년부터 1913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쟁성(戰爭省) 청사와 제국전쟁참사원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암 호프의 크리스마스 시장 


1782년에는 비엔나를 방문한 교황 비오6세가 암 호프 교회의 테라스에 나와서 운집한 군중들에게 강복을 하였다. 1806년 8월 6일에는 암 호프 교회의 로기아(현관의 주랑)에서 프란시스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신성로마제국의 종말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식을 가졌다. 이로써 합스부르크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오스트리아제국으로 출범하였으며 프란시스2세는 프란시스1세로서 오스트리아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프란시스1세(프란츠1세)황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내려놓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ss Wir das Band, welches Uns bis itzt an den Staatskörper des deutschen Reichs gebunden hat, als gelöst ansehn." 번역은 각자의 몫!

 

1848년 3월 14일, 유럽을 휩쓴 혁명의 불길은 비엔나에서도 타올랐다. 군중들은 암 호프에 몰려들어 국가의 병기고(Zeughaus)를 습격하였다. 그해 10월 6일에는 성난 군중들이 전쟁장관인 테오도르 그라프 바이예 폰 라투르(Theodor Graf Baillet von Latour)를 집무실에서 끌어내어 광장에서 몽둥이로 때려 숨지게 했다. 군중들은 라투르의 시신을 광장의 한쪽에 있는 가로등에 매달고 환호하였다. 그로부터 암 호프는 폭스플라츠(Volksplatz: 국민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라투르 장관을 처형한 배경에 대하여는 한참 설명해야 하므로 여기서는 중단코자 한다.


암호프 교회

 

그러한 비참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암 호프 광장은 이미 1842년부터 크리스마스 시장으로서 비엔나의 명물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되는 11월부터는 광장에서 온갖 촛불과 크리스마스트리 장식품을 팔았다. 포도주를 뜨겁게 데워서 푼슈라는 이름으로 팔기 시작한 것도 그 쯤이었다. 비엔나의 크리스마스는 암 호프로부터 시작하였다. 크리스마스 시장은 1차 대전 중에도 계속되어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될 때까지 문을 열었으며 그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인 1939년부터 1942년까지도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어김없이 옛 추억을 자아내게 하는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렸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는 주말마다 벼룩시장이 열리는 장소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러나 벼룩시장도 몇 년 가지 못했다. 1977년에 나슈마르크트와 연결하여 대규모의 주말 벼룩시장이 열리기 시작하자 암 호프의 벼룩시장은 자연스럽게 나슈마르크트로 옮겨갔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 시장은 오늘날에도 계속 열리고 있어서 시청앞 광장, 벨베데레(Belvedere) 궁전, 쇤브룬 궁전, 프라이융(Freyung), 슈피텔버그 시장과 함께 비엔나의 명물인 크리스마스 시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1892년 전쟁성 청사 앞에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장군인 라데츠키의 기마상이 세워졌다. 라데츠키 장군은 요한 슈트라우스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유명한 바로 그 라데츠키 장군이다. 라데츠키 장군의 기마상은 1912년 슈투벤링에 새로운 전쟁성 청사가 세워지자 그 앞으로 이전되었다. 암 호프의 전쟁성 청사 건물은 1915년에 남부오스트리아 주립은행(Länderbank)이 들어섰다. 암 호프 광장은 캐롤 리드의 영화 ‘제3의 사나이’에 등장하여 영화팬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암 호프 광장의 둥그런 광고탑(Litfasssäule라고 부름)과 지하 하수도 시설이 영화에 나온다. 1962/63년에 암 호프 광장을 정비하는 중에 지하에서 로마시대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고고학적으로 놀라운 발견이었다. 오늘날의 소방서 지하에서 로마시대의 주거지역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하수도 시설도 발견되었다. 티퍼 그라벤(Tiefer Graben)으로부터 오타크링거바흐(Ottakringerbach)까지 연결된 하수도 시설이었다.

 

암 호프 광장에 있었던 라데츠키 장군 기마상. 현재는 슈투벤링의 정부종합청사 앞으로 옮겨 놓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1983년 비엔나를 방문하여 과거의 교황들이 그랬던 것처럼 암 호프의 교회 발코니에서 부활절 강복을 하였다. 2007년 9월 7일에는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암 호프를 방문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첫 방문지로서 비엔나에 온 교황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암 호프에 모인 7천여명의 시민들에게 강복을 하고 강론을 하였다. 그런데 강론 중에 마이크 시설이 고장이 나서 교황은 6분동안 강론을 중단한채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암 호프 교회](키르헤 암 호프: Kireche am Hof)

암 호프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물 중의 하나는 암 호프 교회이다. 교회의 정식 명칭은 Zu den neuen Chören der Engel(추 덴 노이엔 쾨렌 데어 엥겔)이다. 코르(Chor)라는 단어는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교회의 성단소(聖壇所)를 말한다. 중앙제단의 양 옆으로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의 성단소 교회’라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암 호프 교회의 경우에는 ‘천사들의 모든 품계(品階)교회’라고 번역할수도 있다. 즉, 세라프(치품천사)로부터 일반천사(Angel)에 이르기까지 아홉 단계의 천사들을 모두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군천사교회’라고 말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암 호프 교회는 바로크 양식의 현관을 가진 고딕건물이다. 역사적으로는 이 교회의 발코니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종식이 선포되었다. 암 호프 교회는 종교개혁 기간 중에 크게 쇠퇴해졌다. 그러다가 1554년 페르디난트3세의 미망인의 요청으로 서쪽 현관과 십자형 교회당의 좌우 날개부분, 그리고 발코니(로기아)를 복원하여 교회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오늘날 암 호프 교회는 비엔나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 신도들의 중심교회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마리아 탑](마리엔조일레: Mariensäule)

30년 전쟁(1618-1648)이 끝난 이래 암 호프의 광장에는 무오의 마리아 탑이 세워져서 눈길을 끌게 되었다. 청동으로 만든 마리아탑(마리엔조일레)은 당대의 조각가 카를로 마르티노 카를로네가 시작하여 카를로 카네발레가 완성하였다. 네모로 만든 탑의 하단에는 갑옷을 입고 방패와 칼을 든 푸티(어린 천사와 같은 그리스 신화의 어린이)들이 각각 사자(전쟁), 뱀(불신), 용(기아), 바질리스켄(역병)을 제압하는 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마리엔조일레는 1645년 페르디난트3세 황제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뜻으로 세운 것이다. 30년 전쟁이 한창이던 1645년 비엔나는 스웨덴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페르디난트3세의 신하들은 비엔나 성의 함락은 시간문제이므로 시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아예 항복을 하자는 측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는 측으로 나뉘어 페르디난트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페르디난트는 다만 암 호프의 교회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성모 마리아에게 이 난국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을 뿐이었다. 당시 비엔나는 기아와 역병과 불신과 전쟁의 공포로 흉흉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성밖을 바라보니 그 많던 스웨덴의 군사들이 무슨 연유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페르디난트는 하나님과 성모의 가호로 적군이 철수했다고 믿고 감사하는 뜻으로 마리엔조일레를 제작하여 봉헌키로 했다. 이렇게 하여 암 호프 광장의 마리엔조일레는 1667년 봉헌될수 있었다. 마리엔조일레를 제작한 카를로 카를로네와 카를로 카네발레 1638년에 뮌헨에 암 호프의 것과 똑 같은 청동작품을 만들어 설치한바 있다. 1667년에는 상부오스트리아의 슐로쓰 베른슈타인(Wernstein)에도 암 호프의 마리엔조일레와 똑 같은 청동복제품이 설치되었다.

 

마리엔조일레(마리아탑)의 성모 마리아 모습. 마리아의 모습은 너무 높이 있어서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까 라면서 아무리 올려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다.

 

[시민병기고](뷔르거리헤 초이그하우스: Bürgerliche Zeughaus)

암 호프 10번지는 시민병기고 건물이다. 원래 그 자리에는 유태인을 위한 정육상점이 있었다. 이후 비엔나 시당국이 유태인 정육점을 매입하여 1562년부터 비엔나 방어를 위한 무기를 종합적으로 보관하는 병기고로 사용하였다. 비엔나가 적의 침공을 받았을 때 시민들이 각자 집에 있는 무기를 들고 나오려면 혼잡할 것 같으므로 모든 무기를 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가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면 이곳에서 무기를 종합적으로 배부하도록 했다. 1731년에는 건물의 상단에 병기와 군기를 장식한 조각작품이 설치되었다. 안톤 오스펠의 작품이다. 당대의 조각가 마리텔리는 이와 함께 불굴의 정신과 용기를 상징하는 형상들이 황금빛 지구를 받들고 있는 작품을 마련하여 올렸다.

 

뷔르거리헤 초이그하우스 건물 상단의 화려한 조각. 2010년 현재 보수정비를 위해 떼어 놓았음

 

1809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비엔나를 점령하고 병기고를 약탈하였다. 이어 1848년에는 국방군 사령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오늘날 이 건물은 비엔나 소방서에 속하여 있다. 2007년 6월부터는 대대적인 보수정비작업이 추진되었다. 건물 상단의 상징물도 분리하여 보수절차에 들어갔다.

 

비엔나 소방서와 구 시민병기고 건물

 

[콜랄토팔레](Collatopalais)

암 호프 13번지는 콜랄토 팔레이다. 팔레는 주로 지체 높은 귀족들이 비엔나 중심지의 왕궁에 가까운 곳에 지은 저택을 말한다. 콜랄토 팔레는 1671년에 지었다. 지금은 허술하게 보이는 건물이지만 당시에는 바벤버그 궁전 바로 옆에 있는 팔레여서 위세가 대단했었다. 콜랄토 팔레라고 부르게 된 것은 1671년 새로 저택을 지은 사람이 콜랄토 백작(-1699)였기 때문이다. 콜랄토 팔레는 1762년 당시 일곱 살이던 모차르트가 처음으로 비엔나에 와서 사람들 앞에서 연주회를 곳이다. 이를 기념하는 명판이 정면 벽에 붙어 있다.

 

팔레 콜랄토. 일곱살 모차르트가 비엔나에 와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연주회를 가진 장소이다.

 

암 호프의 건물들

- 2번지는 오스트리아 은행이다. 주립은행(랜더방크)이 있던 건물이다. 이후 남부오스트리아 어음할인회사(Escompte-Gesellschaft)의 본사건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지은 몇 안되는 건물의 하나이다. 이 건물은 한때 궁정전쟁참사원이 사용했었다. 1913-15년간에는 은행건물로 개조되었다. 그후 2008년 여름부터는 호화호텔로 만들기 위한 공사가 진행중이다. 현관을 들어서면 구텐베르크, 콜럼버스, 알레산드로 볼타, 요셉 레쎌 등의 부조가 있다. 건물의 정면 벽면에는 국제적십자사를 창설한 앙리 뒤낭을 기념하는 명판도 붙어 있다.

- 3-4번지는 오스트리아 콘트롤은행이다. 1912-15년에 오토 바그너의 제자인 오토 쇤탈(Otto Schönthal), 에밀 호페(Emil Hoppe), 마르셀 캄머러(Marcel Kammerer)가 공동으로 설계했다. 원래 이 자리에는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에 설립된 친나치의 조국전선이라는 기관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부터는 콜트롤은행이 들어섰다. 오늘날의 금융감독원과 같은 기능을 가진 기관이었다. 1630년부터 1913년까지는 교황청 대표단이 있었다. 이곳에서 1668-1671년간 안토니오 피그나텔리(Antonio Pignatelli)라는 사람이 근무했었다. 나중에 교황 인노센트12세가 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