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유서깊은 광장

헬덴플라츠(Heldenplatz: 영웅광장)

정준극 2010. 4. 3. 21:51

헬덴플라츠(Heldenplatz: 영웅광장)

오스트리아 구국의 영웅 기리기 위한 광장

 

헬델플라츠의 샤를르(칼) 대공 기마상. 가느다란 두 뒷 다리로 저 육중한 기마상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저 기막힌 역학적 구조를 생각해보라!

                              

헬덴플라츠는 1구 호프부르크에 속하여 있는 역사적인 광장이다. 헬덴플라츠의 한 쪽에는 연방대통령의 관저가 있다. 연방수상의 집무실도 헬덴플라츠와 이웃하고 있는 발하우스플라츠에 있다. 그러므로 헬덴플라츠는 발하우스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정치1번지라고 말할수 있다. 헬덴플라츠라는 이름은 이곳에 오스트리아의 구국의 영웅들(헬덴)인 샤를르(칼) 대공과 사보이의 오이겐공자의 기마상을 건설하고 이분들의 구국의 업적을 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1, 2차 대전을 통하여 오스트리아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일반 용사들도 함께 기리는 곳이 되고 있다.

 

헬덴플라츠의 노이에 호프부르크 

                                      

프란츠 요셉 황제는 제국의 위용을 드높이기 위해 링슈트라쎄를 정비하면서 호프부르크도 대대적으로 확장할 생각이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아이디어를 카이저포룸(Kaiserforum)이라고 한다. 카이저포룸 계획에 의하면 기존의 호프부르크에 새로운 호프부르크(노이에 호프부르크)를 마치 양 날개처럼 위풍당당하게 짓고 이를 링거리를 건너 합스부르크의 소장품들을 전시해 놓은 양대 박물관(미술사박물관 및 자연사박물관)까지 연결하여 하나의 웅대한 블록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첫 공사로서 노이에 호프부르크를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오늘날 에베소박물관, 민족학박물관, 고대악기박물관, 국립도서관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노이에 호프부르크이다. 카이저포룸의 계획에 의하면 현재의 노이에 호프부르크와 똑 같은 건물을 대칭되게 짓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20세기 초반 제국의 운명과 함께 좌절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카이저포룸 계획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소리도 높다. 왜냐하면 만일 카이저포룸 계획에 의해 현재의 노이에 호프부르크의 건너편에 대칭되는 건물을 지을것 같으면 헬덴플라츠로부터 시야가 가려서 인접하여 있는 시청과 보티프교회, 그리고 국회의사당의 웅장한 모습을 볼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재는 헬덴플라츠와 링슈트라쎄를 구분하기 위해 헬덴토르(또는 부르크토르(궁전문))를 세웠으며 양대 박물관의 가운데 공간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을 세우고 그곳을 ‘마리아 테레지아 플라츠’라고 부르게 되었다.

 

헬덴플라츠의 피아커들. 왼쪽 뒤편에 보이는 건물이 자연사박물관

                                

헬덴플라츠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무어라 해도 두 개의 기마상이다. 먼저 완성된 것이 샤를르 대공의 기마상이며 나중에 세워진 것이 오이겐 공자의 기마상이다. 헬덴이라는 말이 두 사람의 영웅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앞서도 언급한바 있다. 두 기마상은 거장 안톤 도미니크 페른코른(Anton Dominik Fernkorn)의 작품이다. 그러나 완성시킨 것은 에두아르트 반 데어 뉠(Eduard van der Nüll)이다. 반 데어 뉠은 비엔나의 자랑인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를 설계한 인물이다. 샤를르 대공(Erzhorzog Karl)의 기마상은 1860년에 완성되었다. 샤를르 대공은 1809년 아슈페른-에쓸링 전투를 지휘하여 나폴레옹의 군대를 무찌른 장군이다. 샤를르 대공의 기마상을 완성한지 얼마 후에 이탈리아에서 솔페리노(Solferino)전투가 있었다. 오이겐 공자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군을 격퇴한 전투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오이겐 공자의 기마상도 장차 완성될 카이저포룸을 생각하여 노이에 호프부르크 앞에 세우도록 지시했다. 잘 아는 대로 샤를르 대공의 기마상은 말이 두 개의 뒷발로만 전체 하중을 지탱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페른코른은 오이겐 공자의 기마상도 그런 형태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샤를르 대공의 기마상처럼 말의 뒷다리로만 전체 하중을 지탱하는 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결국 꼬리까지 합하여 기마상을 지탱토록하는 일반적인 기마상이 되었다. 오이겐 공자의 기마상은 1865년에 제자인 반 데어 뉠에 의해 완성되었다.

 

헬덴플라츠의 부르크토르(궁정문)

                         

헬덴플라츠와 양대 박물관을 구분하는 헬덴토르(또는 부르크토르)는 1824년 페터 폰 노빌레(Peter von Nobile)가 완성하였다. 헬덴토르(부르크토르)에는 나폴레옹 전쟁 때에 전사한 장병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오늘날 이 추모비는 모든 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장병들을 추모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헬덴토르(부르크토르)의 왼쪽에는 국가를 위해 희생당한 경찰과 헌병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다. 2002년 5월 2일에 제막되었다. 1938년 3월 15일은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또 하나의 잊을수 없는 날이다. 히틀러가 노이에 호프부르크의 앞에 만들어 놓은 연단에 올라서서 헬덴플라츠에 모인 20여만명의 비엔나 시민들에게 ‘이제 오스트리아는 고국으로 돌아왔다’라면서 합병(안슐르쓰)을 선언하였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연극 헬덴플라츠(Heldenplatz)에는 이날의 에피소드를 포함한 작품이다.

 

헬덴플라츠에 모인 20만명의 비엔나 시민들에게 노이에 호프부르크 연단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1938년 3월 15일

                       

헬덴플라츠에서는 마리아 테레자 시대로부터 군대의 사열이 자주 열렸다. 제국의 군주들은 제국에 속한 군대가 군악대를 앞세우고 행진을 하는 모습을 보며 만족해 했다. 요즘에는 오스트리아 국경일인 10월 26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다. 축하 행사는 대체로 10월 25일 열리며 다음 날인 10월 26일에는 오스트리아 방위군의 사열이 열린다. 이 자리에서 방위군은 연방대통령에게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내용을 서약한다. 10월 26일은 1955년 소련이 오스트리아에 대한 통치를 마감한 날이며 이날 오스트리아는 영세 중립국임을 선포했다.

 

헬덴플라츠에서의 국방군 분열행진. 1930년대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