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유서깊은 광장

유덴플라츠(Judenplatz: 유태광장)

정준극 2010. 4. 3. 22:09

유덴플라츠(Judenplatz: 유태광장)

중세로부터 유대인 사회의 중심지

 

유덴플라츠의 홀로코스트(쇼아) 희생자 기념조형물

 

유덴플라츠에 대하여는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설명을 시작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최소한으로 줄인다. 결론적으로 유덴플라츠는 비엔나와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의 정신적인 센터이다. 유덴플라츠는 암 호프의 옆에 있으며 슐호프(Schulhof)와 비플링거슈트라쎄(Wipplingerstrasse)에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구시가지에서도 핵심적인 장소에 자리 잡고 있다. 유덴플라츠에는 시몬 뷔젠탈의 아이디어에 의해 쇼아(Shoah)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며 한편 독일의 사상가인 레싱의 기념비가 서 있다. 쇼아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는 마치 수많은 책을 쌓아놓은 것 같은 네모난 형태이다. 아마 토라를 비롯한 경전들을 쌓아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쇼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서 '신에게 바치기 위해 제물을 태운다'는 뜻이지만 근자에는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대신하는 경우에 사용하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 크리슈탈나하트 등 나치의 박해에 대하여는 이곳에서 설명을 생략코자 한다. 다른 항목을 찾아보면 자세히 나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유덴플라츠는 중세 이후로부터 유태인 박해의 산 증인이라는 것이다.

 

플라츠의 유태박물관 입구

 

비엔나의 이곳에 유태인들이 처음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은 1294년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1421년부터 슐호프(Schulhof)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슐은 학교라는 뜻도 있지만 유태인의 회당(시나고그)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당시 이곳에는 약 800명의 유태인이 살았다. 상인, 대출업, 학자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유태인 마을은 조금씩 확장되어 북쪽으로는 마리아 암 게슈타데(Maria am Gestade)까지, 서쪽으로는 티펜 그라벤(Tiefen Graben)까지, 동쪽으로는 투흐라우벤(Tuchlauben)까지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암 호프 광장과 연결되었다. 게토에는 70여채의 집이 있었다. 그후 게토를 구별하기 위해 뒤쪽, 지금의 시민병기고 건물과 소방서 건물이 있는 곳에 담장을 둘렀다. 그리하여 암호프 쪽에서 유덴플라츠를 가려면 별도의 출입문을 통해야 했다. 게토 출입문은 비플링거슈트라쎄에 있었다.

 

유덴플라츠에는 유태인 병원이 있었고(현재의 유덴플라츠 10번지), 시나고그, 목욕탕, 랍비의 사택, 그리고 유태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가 있었다. 시나고그는 요르단가쎄와 쿠렌트가쎄의 사이에 있었다. 슐호프라는 명칭은 유태인 학교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유덴플라츠라는 명칭은 1437년부터 사용한 것이다. 현재 유덴플라츠의 한 가운데에는 유태인 쇼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홀로코스트 기념비이다. 쇼아는 유태인에 대한 핍박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을 의미한다.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유태인들을 추모하는 이 조형물은 영국의 조각가인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의 작품이다. 조형물의 아래쪽 기단에는 나치가 유태인을 강제로 억압했던 41곳의 수용소 명단이 적혀 있다. 유태인박물관인 마스라키 하우스(Misrachi-Haus)에는 나치에 희생된 6만5천명의 오스트리아 유태인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다.

 

유덴플라츠의 한쪽에 있는 옛 보헤미아 대사관저 및 오른쪽 끝의 레씽 기념상

 

[미스라키 하우스]

유덴플라츠 8번지는 미스라키 하우스이다. 1694년에 지은 건물이며 현재는 비엔나의 유태인 박물관이다. 1995년 이 건물의 지하에서 중세에 있었던 대규모 유태인 회당(시나고그)의 담장이 발견되었다. 시나고그의 규모로 미루어 보면 아마 유럽에서 가장 큰 시나고그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하의 유적이 발견된 곳에 유태인 박물관을 만들고 중세의 유태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를 마련하였으며 아울러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태인 희생자들에 대한 자료를 간수하고 있다. 중세의 시나고그 유적을 보면 큰 방과 작은 방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을 알수 있다. 큰 방은 Männerschul(맨너슐)이라고 하여 남자들만이 들어갈수 있는 회당의 장소였으며 작은 방은 여자들을 위한 방이다.

 

발굴된 중세 시나고그의 유적

 

[요르단 하우스]

유덴플라츠 2번지의 건물은 Zum grossen Jordan(춤 그로쎈 요르단)이라는 집이다. 아마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건물은 1421년 이후 게오르그 요르단이라는 사람이 소유하였다. 그는 1497년에 건물을 개수하여 정면의 벽에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부조로 만들어 설치하였다. 요단강을 주제로 삼은 것은 자기의 이름인 요르단을 넌지시 암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부조의 상단에는 성게오르그가 창을 들고 용을 퇴치하는 명판이 있다. 이것도 역시 게오르그라는 자기의 이름을 은근히 내보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오늘날 이 집은 요르단호프(Jordanhof)라고 불린다.

 

요르단호프의 부조.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장면과 그 윗부분에는 성게오르그가 창을 들고 용을 제압하는 장면. 부조의 아래쪽에는 명판에 무슨 무슨 소리가 적혀 있다.

 

[레싱 기념상]

유덴플라츠에는 지그프리트 샤루(Siegfried Charoux)가 제작한 독일의 시인이며 사상가인 고트홀트 에브라임 레씽의 기념상이 있다. 레씽 기념상은 1935년에 제막되었으나 1939년 나치에 의해 철거되었다. 레씽은 그의 저서인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를 통하여 독일이 유태인에 대하여 관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전쟁이 끝난후 레씽의 기념상을 원래대로 다시 건립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현재의 레씽 기념상은 지그프르티 샤루가 1965년에 다시 제작하여 봉헌한 것이다. 샤루가 제작한 제2의 레씽 기념상은 루프레헤츠플라츠에 있었으나 유덴플라츠로 옮겨왔다. 레씽은 1775-76년간 비엔나에서 체류한바 있다. 레씽은 계몽군주인 요셉2세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유덴플라츠 전경. 가운데에는 홀로코스트 기념조형물이 있으며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레씽 기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