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7년전쟁의 모든 것

수포로 돌아간 프랑스의 영국 침공

정준극 2010. 4. 18. 19:35

수포로 돌아간 프랑스의 영국 침공

1760년의 전투상황

 

영국함대가 퀴베론만에서 프랑스 함대들을 침몰시키고 있다. 퀴베론만 해전.

 

1759년도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파리에서는 중요 군사회의가 열렸다. 프랑스는 이 참에 아예 영국 본토를 침공하여 무릎을 꿇게 하면 세계의 판도가 완전히 프랑스쪽으로 기울어 질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는 영국을 바라보는 브리타니 지방의 브레스트(Brest)와 툴롱(Toulon)에 지중해에 있던 함대들을 은밀히 집결시키고 사방에서 영국을 동시에 공격한다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즉, 런던쪽을 공격함과 동시에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지방을 동시에 공격하며 아울러 도버해협(영-불해협)에 대하여도 기습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한창 영국 침공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중에 8월에 포르투갈 앞 바다와 프랑스의 브리타니의 항구에서 뜻하지 아니하게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아마도 프랑스의 영국 침공 계획을 눈치 챈 영국이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포르투갈의 라고스 앞바다에서 벌이진 영국과 프랑스의 해전. 라고스 전투. 

 

영국은 포르투갈의 라고스(Lagos) 앞바다에 에드워드 보스카웬(Edward Boscawen)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급파하여 장-프랑수아 드 라 클루-사브랑(Jean-Francois de la Clue-Sabran)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의 지중해 함대를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얼마후인 11월에는 영국의 에드워드 호크(Edward Hawke)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브리타니 지방의 남쪽에 있는 천혜의 군항인 퀴베롱 만(Quiberon Bay)를 급습하여 드 꽁플랑(De Conflans) 제독의 프랑스 군함들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영국의 함대는 23척이었고 프랑스 함대는 21척이어서 형세가 비슷하였으나 영국 함대는 일자로 진용을 갖추고 진격하며 연속적으로 함포사격을 하고 물러나오고 하는 바람에 횡대로 있던 프랑스 함대는 손도 써보지 못하고 격침되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을 보는 듯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프랑스의 영국 침공 계획은 미안하지만 수포로 돌아갈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 브리타니 지방의 브레스트 항구. 프랑스는 영국침공을 위해 툴론과 함께 브레스트에도 지중해 함대를 집결시켰다.

 

해가 바뀌어 1760년이 되었다. 바다에서는 영국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프러시아가 계속적으로 곤경을 당하고 있었다. 프러시아의 푸케(Fouque) 장군은 폴란드의 란트슈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어이 없는 패배를 당하였다. 란트슈트(Landshut)는 오늘날 폴란드의 카미에나 고라(Kamiena Gora)이다. 한편, 프랑스군은 바다에서 영국에게 대타격을 받았지만 육지에서는 조촐한 승리를 맛보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독일 헤쎄 지방에 있는 고도 마르부르크(Marburg)를 점령할 정도로 위세를 보였다. 그리고 스웨덴군의 활약도 무시할수 없었다. 스웨덴군은 독일 북부 지방에 걸쳐 있는 브란데부르크-프러시아 포메라니아(Brandenburg-Prussian Pomerania)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전쟁이라는 것은 항상 들쑥날쑥이어서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군대가 며칠 후에는 패전의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당시로서 다반사였다. 이러한 관례에 의하여 얼마후에는 프랑스군이 하노버군에 의해 봐르부르크(Warburg)에서 크게 패배를 당하였다. 하노바군이 하도 기세를 올리는 바람에 프랑스군은 진로가 막혀서 멀리 동쪽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을 지원하기는 커녕 연락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

 

리그니츠 전투

 

오스트리아군은 동맹국인 프랑스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런대로 혼자서도 잘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라우돈(Laudon)장군의 탁월한 지휘로 동부전선에서 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라우돈 장군은 실레지아의 글라츠(Glatz)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런가하면 프레데릭 대왕은 아직도 건재하여서 리그니츠(Liegnitz) 전투에서 숫자적으로 대단한 열세였지만 대승을 거두었다.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잠시이긴 했지만 베를린을 점령하기도 했다. 프레데릭은 1760년을 마감하는 시점에 토르가우(Torgau)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의 다운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물리쳤다. 하지만 프레데릭도 대단한 손실을 입었다. 이렇듯 1760년의 전투는 오락가락이었고 공연히 불쌍한 졸병들만 외로운 들판에서 죽어갔다.

 

토르가우 전투 후의 프레데릭 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