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겐지 모노가타리(源氏 物語)
동양의 외디푸슨 전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편소설의 오페라화
겐지 모노가타리의 저자인 무라사키 시키부가 집필하고 있는 모습. 토사 미치오키 그림
일본인으로서 겐지 모노가타리(源氏 物語)를 모른다고 하면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겐지 모노가타리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대하 장편소설이다. 일본사람들은 겐지 모노가타리가 11세기에 써진 것이므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소설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영국의 조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는 고작 1400년에 완성되었을 뿐이므로 그런 말도 나올 법하다. 겐지 모노가타리는 일본 고전문학의 금자탑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춘향전이나 홍길동전 처럼 전국민의 소설이다. 하기야 홍길동이도 겐지처럼 서자여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신세였다. 겐지 모노가타리는 실로 방대한 스케일의 작품이다. 전편이 6권 5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대하기로 말하자면 중국의 수호지나 삼국지연의가 있지만 겐지 모노가타리 역시 둘째 가라고하면 서러울 정도의 방대한 구성의 소설이다. 너무나 방대한 구성이어서 전편을 오페라로 만든다는 것은 무리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1999년에 작곡가 미키 미노루(三木 禾念: 1930-)가 현대 오페라로 완성하였다. 다만, 6권 전편이 아니라 앞 부분의 3편만을 스토리로 삼았다. 원래 '겐지 모노가타리'에 수록되어 있는 각각의 챕터는 따로따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조치였다. 어쨌든 일본사람들은 '와, 대단하다. 겐지 모노가타리를 서양식 오페라로 만들었다니...그게 도대체 어디냐?'면서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세계 초연은 21세기에 대한 흥분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2000년의 6월 미국 세인트 루이스 오페라극장(OTSL: Opera Theater of Saint Louis)이라는 오페라단이 이루었다. 도쿄 초연은 이듬해인 2001년 9월 도쿄의 치요다구 유라쿠쪼(有樂町)에 있는 니쎄이(日生)극장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의 OTSL 이 와서 공연했다.
도쿄 니쎄이극장에서 미국 세인트루이스 오페라극장 팀이 공연한 오페라 '겐지 모노가타리'의 한 장면. 겐지가 무라사키에게 사랑을 호소하고 있다.
세인트루이스 초연
세인트루이스의 웹스터(Webster)대학교 구내에 있는 로레토 힐튼 극장(Loretto Hilton Theater)은 세인트루이스오페라극장(OTSL오페라단)이 주로 공연하는 극장이다. OTSL 오페라단은 매년 오페라시즌에 4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하나는 바로크오페라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오페라이며 세 번째는 인기 있는 대중작품이며 네 번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찾아서 공연한다. OTSL오페라단은 한 시즌에 대략 30여회의 공연을 갖는다. 그만큼 활동이 많은 오페라단이다. OTSL오페라단은 세계초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까지 10 여편의 세계초연을 가졌으며 미국초연은 20 편도 넘는다. OTSL오페라단은 해마다 새로운 오페라를 위촉한다. 2000년에도 새로운 오페라를 위촉했다. 그것이 당시 71세의 노작곡가인 미키 미노루에게 위촉한 ‘겐지 모노가타리’였다. 미키 미노루는 과거 1985년에 OTSL오페라단 창단 10주년을 위해 ‘조루리’(Joruri)라는 오페라를 작곡한바 있다. 미키 미노루는 이번에는 일본이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1천년 역사의 ‘겐지 모노가타리’를 오페라로 만들었다.
일본 화폐 2천엔 권에 들어 있는 '겐지모노가타리'의 오리지널 텍스트
겐지는 일본 천황이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다. 하지만 겐지는 후궁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황태자가 될수 없었다. 겐지는 좀 소란스러운 타입이었다. 난잡하고 거친 성격이었다. 물론 착한 면도 있었고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런대로 미움은 받지 않았다. 겐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에 아오이라는 여식과 정혼하여 결혼하였다.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다. 때문에 여러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며 사랑을 찾아 헤맸다. 일본판 돈 조반니라고나 할까? 겐지는 심지어 천황인 아버지가 총애하는 여인인 후지츠보와 은밀한 관계를 가졌고 자기가 딸 처럼 키우던 무라사키와는 나중에 결혼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결과, 후지츠보와 겐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나중에 천황이 되었다. ‘겐지 모노카타리’는 겐지, 후지츠보, 무라사키가 펼치는 대하 로맨스이다.
'겐지 모노가타리' 연극의 한 장면. 차 세리모니.
오페라 '겐지 모노카타리'에서는 여성 성악가 한 명이 두 여자의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여자의 양면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물론, 한 사람이 두 사람 이상의 역할을 해야하기 때문에 내용파악에 혼란을 가져올 경우도 있고 스토리를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 ‘겐지 모노가타리’의 초연은 이국적인 설정으로 인하여 대성공이었다. 대본을 쓴 콜린 그레이엄(Colin Graham)이 예술감독을 맡은 것도 이색적이었지만 오히려 훌륭했다. 그레이엄은 대단히 웅장하고 환상적이면서도 멋진 무대를 창조해 냈다. 세트와 의상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일본의 디자니어인 세츠 아사카라가 맡았고 일본 무용의 안무는 역시 일본 최고의 안무가인 키쿠시로 오노에가 맡았다. 오케스트라 지휘는 스튜어트 데드포드(Steuart Bedford)였다. 그는 서양의 일반적인 악기와 일본의 전통적인 악기인 고토와 비파의 하모니를 최대한으로 표현해냈다. 작곡자인 미키 미노루는 작품에서 20세기 서양식 음조를 주류로 삼으면서도 일본음악의 풍미를 빼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겐지 모노가타리’의 음악은 가부키나 노(能)에 물든 것이라기보다는 푸치니나 사뮈엘 바버에 가까웠다. 한 가지 문제는 공연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이었다. 한 번의 휴게시간을 포함하여 3시간 이상이 걸리는 공연이었다.
OTSL오페라단의 초연에서는 바리톤 멜 울리히(Mel Ulrich)가 겐지왕자 역할을 맡았고 테너 리챠드 트록셀(Richard Troxell)이 겐지의 막역한 친구 역할을 맡았다. 늙은 천황(토노추조)역할은 앤드류 벤첼(Andrew Wentzel)이었다. 아름답고 젊은 여인 무라사키의 역할은 소파라노 엘리자베스 꼬모(Elisabeth Comeaux)가 맡았으며 버림받은 여인 루조코의 역할은 세릴 에반스(Cheryl Evans)가 맡아 열연했다. 메조소프라노 조세파 게이어(Josepha Gayer)는 거만한 성격의 관리부인 역할과 젊은 무라사키의 입장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두가지 역할을 맡아했다.
오페라 ‘겐지 모노가타리’는 2000년 6월 미국초연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오페라 뉴스’지는 ‘승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키 미노루의 음악을 ‘분위기 있는 걸작’이라고 평했고 ‘포스트-디스패치’는 ‘훌륭한 제작, 뛰어난 캐스트, 고귀한 무대, 그리고 흥미롭고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도쿄초연에서는 대사를 모두 영어로 공연한다. 심지어 도쿄오페라합창단의 합창도 영어로 불렀다. 물론 일본어 자막이 나오기 때문에 전광판을 눈여겨보면 가사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지휘는 스트어트 베드포드이지만 오케스트라는 도쿄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자리를 잡았다. 유명한 비파연주자인 양 징과 고토연주자인 레이코 키무라도 솔리스트로서 오케스트라석에 자리를 잡았다.
도쿄 유라쿠쪼에 있는 니쎄이극장
도쿄 니쎄이극장 초연
도쿄 니쎄이(日生)극장에서의 ‘겐지 모노가타리’ 초연은 2001년 9월 16일에 있었다. 미국 OTSL 오페라단이 내일(來日)하여 공연하였으며 예술감독은 대본을 쓴 콜린 그레이엄이 맡았다. 오케스트라 지휘는 미국초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투어트 베드포드가 맡았다. 오페라 ‘겐지 모노가타리’는 일본문학 1천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겐지 모노가타리’는 일찍이 1000년경에 헤이안(平安) 시대의 여류인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소설이다. 무대장치와 의상 역시 세인트루이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톱 디자이너인 세츠 아사쿠라가 준 마츠노의 도움을 받아 맡았고 안무 역시 일본 최고의 안무가인 키쿠시로 오노에가 맡았다.
사실상 OTSL오페라단의 ‘겐지 모노가타리’ 도쿄공연은 두 번째 일본방문 공연이다. OTSL오페라단은 1985년 제10차 시즌에 즈음하여 미키 미노루에게 의뢰한 ‘조루리’(Joruri)를 1988년 도쿄에 와서 공연한 일이 있다. ‘조루리’는 18세기 일본 인형극장이 무대이다. ‘조루리’는 미국오페라단이 도쿄에 와서 공연한 첫 번째 경우였다. 미국의 지방오페라단으로서는 더구나 처음이었다. 니쎄이극장은 일본생명보험회사가 음악의 국제교류를 위해 설립한 극장으로서 개관시의 공연은 칼 뵘이 지휘하고 크리스타 루드비히와 피셔 디트리히-디스카우가 주역으로 출연한 베토벤의 ‘휘델리오’였다. 일본과 영국은 오래전부터 이상하리만치 가까운 사이여서 그런지 영국의 ‘왕립셰익스피어극단’은 정기적으로 부지런히 니쎄이극장에 와서 공연을 가지고 있다.
소설 '겐지 모노가타리'에 수록되어 있는 삽화의 하나. 제20편 푸른벨
무라사키 시키부(紫 式部): ‘겐지 모노가타리’의 저자
‘겐지 모노가타리’의 저자인 무라사키 시키부(약 973년- 약 1025년경)는 11세기 일본의 여류소설가이며 시인이다. 서양에서는 보통 레이디 무라사키(Lady Murasaki)라고 알려져 있다. 무라사키 시키부가 귀족부인이기 때문이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헤이안(平安)시대에 궁중에서 천황과 황비를 모시는 시녀였다. ‘겐지 모노가타리’는 1000-1008년에 완성되었다. 일본은 ‘겐지 모노가타리’가 세계 문학사상 가장 초기의 소설작품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그의 원래 이름이 아니다.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떤 학자들은 원래 이름이 후지와라 다카코일 것이라고 내세웠다. 1007년인 간코 4년에 ‘후지와라 노 미치나가’라는 사람이 쓴 ‘미도 캄파쿠 키’라는 일기책에 의하면 당시 천황비를 모시는 쇼지(Shoji)의 신분으로 ‘후지와라 다카코’라는 귀족부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후지와라 다카코가 무라시키 시키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자기 자신의 일기책을 남겼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자기의 일기책에서 무라사키(紫)라는 이름은 겐지 모노가타리가 나온 이후 궁정에서 자기에게 붙여진 별명일 뿐이며 이는 제비꽃을 말한다고 적었다. 실제로 무라사키는 겐지 모노가타리에 나오는 여인의 이름이다. 시비쿠라는 이름은 궁정에서 자기 아버지의 직위였다. 시키부(式部)는 궁중의식을 담당하는 부서(시키부쇼)를 말한다.
레이디 무라사키는 헤이안 시대에 수도였던 교토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의 가문은 북부 후지와라(藤原)였다. 그후 교토로 와서 귀족신분을 얻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영주에 버금하는 높은 귀족신분은 아니었다. 아버지 후지와라 노 다메토키는 궁정의식을 담당하는 학자 겸 관리였다. 무라사키 시키부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당시의 관습대로라면 유모의 손에서 자랐어야 했으나 아버지의 손에 자랐다.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당시의 관습과는 상반되게 남자처럼 교육을 시켰다. 여자는 일본글인 가나를 배우고 시를 짓는 법을 배웠으나 남자는 한문을 배우고 사서삼경과 같은 중국 고대문학을 공부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학문의 경지가 날로 월장하였다. 아버지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데 대하여 놀람을 금치 못하면서 ‘아, 이 아이가 남자로 태어났더라면!’이라면서 탄식하였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20대에 접어들어서 결혼하였으며 ‘다니 노 산미’라는 이름의 딸까지 낳았다. 다니 노 산미는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훗날 유명한 여류시인이 되었다. 얼마후 무라사키 시키부는 궁중에 들어가 이치조 천황의 시녀가 되었으나 천황이 죽은 후에는 쇼시황후(아이코)의 시녀가 되었다. 아마도 황후를 지간에서 모시는 후지와라 노 미치나가의 아래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무라사키 시키부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정확치 않다. 1025-1031년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5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난 셈이 된다. 헤이안 시대의 기준으로서 여자가 50세 이상까지 살았다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무라사키 시키부를 대표하는 책자로서는 세 개를 꼽을 수 있다. ‘겐지 모노가타리’가 첫째이고 이어 ‘무라사키 시키부의 일기’, 그리고 ‘무라사키 시키부 선집’이다. ‘무라사키 시키부 선집’은 그의 사후에 발간되었다.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128편의 시(詩)가 들어 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일본 문학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무라사키 시키부의 동상은 일본의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무라사키 시키부의 작품은 예로부터 일본 교과서에 등장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의 2천원권 화폐에는 그의 대표작인 ‘겐지 모노가타리’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리자 댈비(Lisa Dalby)라는 작가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일대기를 그린 ‘무라사키 이야기’(The Tale of Murasaki)를 펴냈다. 이탈리아의 작가인 가브리엘라 마그리니(Gabriella Magrini)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생애를 소설로 만든 Mille Autunni, vita di Murasaki Dama di Corte(시녀 무라사키의 생애)를 펴냈다. 이 소설은 1987년 La dame de Kyoto(교토 부인)이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토마스 해리스(Thomas Harris)의 소설로서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진 Hannibal Rising(한니발 라이징)은 무라사키 시키부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꾸민 것이다.
오페라 '겐지 모노가타리'의 작곡자인 미키 미노루
작곡가 미키 미노루
미키 미노루는 1930년 도쿠시마에서 태어난 작곡가 겸 예술 감독이다. 그는 특히 아시아 3국(한, 중, 일)의 전통악기의 진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이들 전통악기를 사용한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오페라, 무대음악, 관현악곡, 실내악, 협주곡, 독주곡, 영화음악 등을 작곡하였다. 미키 미노루는 일본 작곡가로서는 토루 다케미츠와 함께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미키 미노루는 1964년 ‘프로 무지카 니포니아’(Pro Musica Nipponia)라는 앙상블을 창단하여 자기의 작품 소개를 위해 많이 활용하고 있다. 미키 미노루의 오페라와 기타 무대작품은 다음과 같다.
- 슌킨쇼(Shunkinsho: 春琴抄)
- 아다, 어떤 배우의 복수(ぁた)
- 조루리
- 와카히메(아가씨)
- 시츠카 토 요시추네(靜 と 義經)
- 수미다가와/쿠사비라(隅田川/くさびら)
- 겐지 모노가타리(源氏 物語: 원씨 이야기)
- 아이엔(愛怨)
- The Monkey Poet(원숭이 시인) - 무대작품
- Yomigaeru(요미가에루: 讀み蛙: 글을 읽는 개구리) - 무대작품
- From the Land of Light(빛의 나라에서: 光の國から) - 무대작품
오페라 '겐지 모노가타리'의 영어대본을 쓴 그레이엄
겐지 이야기(겐지 모노가타리)의 줄거리
‘겐지 모노가타리’(겐지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히카루 겐지’(빛나는 겐지)라고 알려진 일본 천황의 아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겐지는 천황의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서자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이유로 왕자의 신분에서 평민으로 떨어진다. 이름도 미나모토라고 바뀐다. 겐지는 황군의 장교로서 사회경력을 시작한다. ‘겐지 모노가타리’는 겐지의 로맨틱한 생활에 중점을 두고 있다. 말이 로맨스이지 실은 분망한 애정행각이다. 그러면서 당시 귀족사회의 풍습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소설에서는 겐지를 비록 여성편력의 인물이지만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겐지는 천황과 신분이 낮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열상으로는 천황의 차남이지만 후궁 출신이기 때문에 왕자의 대우를 받지 못하며 지낸다. 겐지의 어머니인 기리츠보부인(Lady Kiritsubo)은 겐지가 불과 세 살 때에 세상을 떠난다. 천황은 기리츠보를 잊을수 없다. 마침 그때 천황은 전임 천황의 공주였던 후지츠보부인(Lady Fujitsubo)을 만나게 된다. 천황은 후지츠보가 죽은 겐지의 어머니와 닮았기 때문에 무척 총애한다. 얼마후 후지츠보는 정식으로 천황의 후궁이 된다. 처음에 겐지는 아버지 천황의 후궁인 후지츠보를 계모로서 순종하고 존경하지만 나중에는 하나의 여인으로서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금지된 사랑이었다. 실상 겐지는 어릴 때에 아오니 노 우에(Aoi no Ue)라는 여자와 정혼하여 결혼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오이 노 우에와는 사랑이 없던 차에 후지츠보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는 더욱 멀리하였다. 겐지는 후지츠보와의 사랑이 비밀에 묻혀 있어야하기 때문에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으로 뭇 여인들과 관계를 가지며 지낸다. 아마 후지츠보와의 사랑을 일부러 감추기 위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조치인것 같다. 그러나 겐지의 애정행각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어떤 여인은 사랑을 나눌 때에 갑자기 죽은 경우도 있었다. 또 어떤 여인은 처음에는 열렬했으나 사랑을 나눈 후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 시들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때 겐지는 길을 지나가다가 어떤 예쁜 여인이 창문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들어가서 작업을 펼치기 시작한다. 여염집 여인인 그 여인은 처음에 겐지를 불한당으로 보고 완강히 거부했으나 겐지가 천황의 아들인 것을 알고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겐지는 신분과 권세를 보고 몸을 맡기는 그런 여자들에 대하여는 일종의 혐오감을 가진다.
어느날 겐지는 교토 북쪽의 고원지대인 키타야마에 간다. 겐지는 이곳에서 정말 아름다운 소녀를 만난다. 나이는 10살이었다. 무라사키라고 했다. 겐지는 이 소녀에게 말할수 없는 매력을 느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라사키는 겐지와 서로 비밀스럽게 사랑하는 사이인 후지츠보부인의 조카였다. 겐지는 무라사키를 가깝게 두고 싶은 심정에 무라사키를 사실상 납치하여 자기의 저택으로 데려간다. 겐지는 무라사키에게 양가집 규수로서의 교육을 시킨다. 무라사키를 후지츠보부인을 대신하는 이상적인 여인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겐지는 후지츠보부인을 비밀스럽게 만났다. 그리고 마침내 후지츠보는 겐지의 아들을 낳는다. 후지츠보가 아들을 낳자 모두들 천황의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며 기뻐한다. 아기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겐지와 후지츠보 두 사람뿐이다. 그것도 모르는 천황은 아기가 장성하자 그를 황태자에 봉한다. 후지츠부인은 자기가 낳은 아들이 황태자가 되자 지체 높은 황비가 된다. 겐지와 후지츠보는 황태자에 대한 비밀을 죽을 때까지 깊숙이 간직하기로 다짐한다.
이제 겐지도 어느정도 철이 들었는지 원래 부인인 아오이 노 우에와 부부로서 화목하게 지낸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 아오이 노 우에는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난다. 겐지는 슬픔에 잠기지만 무라사키가 성숙한 여인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며 위안을 삼는다. 무라사키는 어느새 겐지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겐지와 무라사키는 결혼한다. 한편, 겐지의 아버지인 천황이 천수를 다하고 숨을 거둔다. 겐지의 이복형인 스자쿠가 새로운 천황이 된다. 겐지를 정치적으로 배척했던 우장관(右長官)과 새로 즉위한 천황 스자쿠의 어머니인 고키덴(Kokiden)이 궁중의 권세를 잡는다. 그러한 차에 겐지가 이복형인 천황 스자쿠의 애첩 오보로츠키요와 밀회하는 장면이 발각된다. 천황 스자쿠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그런 일도 있을수 있다고 생각하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우장관을 비롯한 산하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겐지를 처벌키로 한다. 겐지는 하리마현의 수마라는 마을로 귀양을 간다. 지금의 효고현 고베 인근이다. 겐지는 이곳에서 세추현의 아카시에서 온 어떤 부유한 사람을 만난다. 사람들은 그를 아카시 출신이어서 아카시라고 불렀다. 황족인 겐지와 아카시는 친밀하게 지낸다. 아카시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겐지는 아카시의 딸과 관계를 맺어 딸을 얻는다. 겐지의 유일한 딸이다. 나중에 겐지의 딸은 황비가 된다.
한편, 교토의 왕궁에서는 현재의 천황이 꿈에 자꾸만 부왕이 나타나는 무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환영에 시달리다가 드디어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병에 걸린다. 또한 못된 그의 어머니 고키덴도 병에 걸린다. 서슬이 푸르던 고키덴의 권력은 자연히 약화된다. 고키덴의 그늘에 있었던 우장관의 권세도 약해진다. 이렇게 되자 천황은 이복동생인 겐지를 사면한다. 겐지는 교토로 돌아온다. 얼마후 눈이 멀게 된 스자쿠 천황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겐지와 후지츠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천황으로 등극한다. 새로 천황이 된 레이제이는 눈치가 삼단인지라 자기의 생부가 겐지인 것을 알고 있다. 레이제이는 겐지의 관직을 더 이상 높일수 없는 수준으로 높여 준다. 그러한 겐지이지만 4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인생의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높은 직위와 권세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심경은 점차 약해지고 있다. 예전에 그렇게도 추구했던 여성편력은 이제 한낱 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겐지의 여성편력은 마치 구도자가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겐지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을 찾아 헤매는 순례자와 같다.
겐지는 또 다시 부인을 얻는다. ‘온나산노 미야’라는 공주이다. 겐지가 다시 결혼한 것은 예전과 같은 애정을 찾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애정이 솟아나지 않는다. 얼마후 겐지의 새로운 부인인 온나산노 미야는 겐지의 조카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는다. 카오루라는 아들이다. 겐지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무라사키는 겐지가 새로 부인을 얻자 만사에 관심을 잃는다. 부부로서 겐지와의 관계는 이미 식어진지 오래이다. 무라사키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 무라사키는 끝내 병에 걸려 숨을 거둔다.
소설의 다음 장은 마보로시(환영)이다. 이제 겐지는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지 관조하게 된다. 그에게 환영이 나타난다. 후지츠보의 환영도 보이며 무라사키의 환영도 나타난다. 결국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다음 장은 쿠모가쿠레(구름속으로 사라지다)이다. 제목만 나와 있으며 내용은 공백이다. 아마도 겐지의 죽음을 암시하는 파트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은 이른바 우지(Uji)장이라고 하는 파트이다. 겐지와 친구처럼 지냈던 니오우와 카오루에 대한 이야기이다. 니오우는 겐지의 딸이 황비가 되어 낳은 아들이다. 사람들은 카오루를 겐지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겐지의 조카가 아버지이다. 우지장(章)은 니오우와 카오루가 우지라는 마을에 살고 있는 몇 명의 지체 높은 여인들을 두고 서로 라이발이 되어 다투는 내용이다. 소설 ‘겐지 모노가타리’는 카오루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을 니오우가 비밀리에 감추어 두었다고 의심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끝을 맺는다. 카오루는 문학에서 간혹 첫번째의 반영웅적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 소설은 갑자기 끝을 맺는다. 마치 문장이 중간에서 끊어진 것과 같다. 사람들은 이렇듯 느닷없이 끝을 맺는 것이 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궁금하게 여기고 있다. ‘겐지 모노가타리’를 처음 영문으로 번역한 아서 웨일리(Arthur Waley)는 소설이 느닷없이 끝을 맺은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끝났다고 주장했다. ‘빛나는 왕자의 세계’의 저자인 이반 모리스(Ivan Morris)는 소설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내세웠다. 그리고 끝 부분의 몇장이 분실되었기 때문에 내용을 알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끝을 맺은 것이 아니라는데에 의견을 일치를 보고 있다. 다만, 저자인 무라사키 시키부가 종장을 만들어 놓고 무슨 내용을 쓸지 몰라서 공백으로 남겨 두었다는 얘기다. 아마도 소설의 종결을 각자의 상상에 맡긴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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