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거장 리스트가 쓴 오페라 '돈 상슈'(Don Sanche)
오페라 '돈 상슈'를 쓸 시기의 프란츠 리스트
2011년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이다. 그 리스트가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것도 14세의 소년시절에 작곡했다. 타이틀은 '돈 상슈'(Don Sanche: 돈 산체)이다. 또 다른 제목으로는 Le château de l'amour(사랑의 성)이라고 한다. 리스트가 14세 때인 1825년 10월 17일 파리 오페라의 살 르 플르티에(Salle le Peletier)에서 초연되었다.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당대의 지휘자인 로돌프 크로이처(Rodolphe Kreutzer)가 지휘했으며 역시 당대의 테너인 아돌프 누리(Adolfe Nourrit: 1802-1839)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 사람들은 천재소년 리스트의 작품이 어떤 것인지 보러 오기도 했지만 뛰어난 미성인 아돌프 누리의 노래를 들으러 많이들 왔다.
당대의 테너 아돌프 누리
리스트의 오페라 '돈 상슈'는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초연 이후 4회의 공연이 있었다. 그러다가 악보가 분실되는 바람에 불행하게도 더 이상 공연되지 못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1873년 파리 오페라극장에 대화재가 났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Don Sanche는 초연으로부터 약 150년 후인 1903년에 천만다행으로 악보가 발견되어 리스트 애호가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단, 리스트가 직접 쓴 오리지널 악보는 아니었고 초연 당시 오케스트라의 멤버중 어떤 사람이 리허설에서 사용했던 악보였다. 하여튼 150년이나 잠자던 악보가 파리 오페라극장의 도서실-박물관(Bibliotheque-Musee)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리허설 악보이기 때문에 페이지마다 연주상의 이런 저런 코멘트가 적혀 있는 것이어서 흥미롭기도 했다. 모처럼 찾아낸 그 악보를 바탕으로 초연 아닌 초연이 이루어진 것은 악보가 발견된지 74년 후인 1977년 10월 20일 런던의 콜리지트(Collegiate)극장에서였다. 왜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에 대하여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다만, '아니, 피아니스트인 리스트가 오페라를 작곡했으면 얼마나 잘 작곡했겠는가? 더구나 14살 때에 작곡했다고 하니 그저 그런 것 아닌가?'라는 선입관에서 공연이 지연되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이다. 오늘날 Don Sanche의 악보는 책자로 출판되지 않았다. 다만, 마이크로 필름에 담겨 유럽와 미국의 몇몇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리스트의 오페라 '돈 상슈'의 대본은 프랑스의 극작가인 엠마뉘엘 테올롱(Emmanuel Théaulon: 1787-1841)가 아르망 부틸리에 드 랑세(Armand Bouthillier de Rancé: 1626-1700)가 이미 작성해 놓은 희곡을 바탕으로 완성했다. 원작은 장-피에르 클라리스 드 플로리안(Jean-Pierre Claris de Florian: 1755-1794)의 동명 소설이다. 오페라 Don Sanche는 1825년 10월 17일에 초연되었지만 리스트는 초연으로부터 몇달 전인 6월 20일에 콘서트에서 서곡만을 처음으로 발표한바 있다. 영국 버밍햄에서였다. 물론 리스트의 아버지가 주선해서였다. '돈 상슈'의 서곡은 리스트의 스승인 이탈리아의 작곡가 페르디난도 파에르(Ferdinando Paer: 1771-1839)의 작곡 스타일을 많이 닮았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파에르는 소년 리스트가 작곡한 오페라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Don Sanche는 리스트가 작곡한 것이 아니라 파에르가 작곡한 것을 리스트가 이름을 빌려 발표했다고 한다. 의심을 품은 학자들은 14세가 채 되지 않은 소년이 무슨 수로 '돈 상슈'와 같은 복잡한 오페라를 작곡할수 있겠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스트의 아버지인 아담 리스트는 아들 프란츠 리스트가 Don Sanche를 작곡할 때에 피아노 스승이었던 칼 체르니(Carl Czerny)가 악보에 여러가지 코멘트를 적어 놓았다고 밝히고 그러므로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프란츠 리스트가 작곡한 것이 분명한데 왜들 그렇게 말들이 많으냐고 말했다.
'돈 상슈'의 음반 커버
리스트는 파리 오페라 극장으로부터 '돈 상슈'의 작곡료로서 170 프랑을 받았다고 한다. 소년 리스트는 피아노 연주도 연주지만 오페라를 작곡하여 돈을 벌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새로운 오페라의 작곡에 도전하였다. 동시에 피아니스트보다는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길을 걸을 생각도 했다. 리스트가 도전한 오페라는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로서 주제는 바이론경의 운문희곡인 '사르다나팔루스'(Sardanapalus: Sardanapale)를 선정했다. 리스트는 첫 오페라인 Don Sanche에 비하여 규모가 큰 오페라를 구상했었다. 당시 파리에서는 베를리오즈를 비롯한 작곡가들이 그랜드 오페라로서 인기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스트도 그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리스트는 '사르다나팔루스'를 완성하지 못했다. 다만, 111 페이지에 이르는 스케치만 만들어 놓았을 뿐이었다. 아마, 오페라에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적당히 인식하고 피아노 작품에만 몰두했었던 것 같았다. 그보다도 첫 오페라인 Don Sanche에 대한 평가가 별로 였기 때문에 낙담하여서 더 이상 오페라의 작곡에 진도를 보이지 못했다는 얘기다.
'돈 상슈'의 모습. 그림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돈 상슈'(돈 산체)에 대한 논평이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는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고 언급했지만 그건 아마 듣기 좋으라고 했던 코멘트였던 것 같았다. 1826년에 Almanach des Spectacles는 "돈 상슈'에 대하여 '참고 보아야 할 작품'이라고 선언했다. 훗날 리스트 자신도 '돈 상슈'에 대하여 '별것도 아닌 작품이다. 출판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초연 이후 다른 곳에서 공연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돈 상슈'는 초연 이후 150여년이자 세인들의 관심 밖에서 잠들고 있었다. 이제 '돈 상슈'의 줄거리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주요배역은 돈 상슈(테너), 엘지르(Elzire) 공주(소프라노 또는 메조소프라노), 알리도르(Alidor: 바리톤), 시종(소프라노) 등이다.
리스트의 오페라 '돈 상슈'의 주요 출연지을 스케치한 것. 오른쪽이 타이틀 롤인 돈 상슈, 가운데는 알리도르, 왼쪽을 알리도르가 갑옷을 입은 모습.
파트 1. 성안에서 흥겨운 노래 소리가 들린다. 농부들과 귀족들의 커플들이 서로 어울려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아라곤의 기사 돈 상슈가 성에 들어가려고 하자 성의 시종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다. 이 성에는 서로 사랑하는 남녀만이 들어갈수가 있다는 것이다. 돈 상슈는 사랑하는 아름다운 엘지르(Elzire) 공주가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얼음처럼 대하고 있어서 함께 오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돈 상슈는 엘지르 공주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이 너무 실망스러워서 자살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성주인 알리도르(Alidor)가 나타난다. 알리도르는 돈 상슈에게 사랑하는 커플들을 위해 성을 건설했음을 설명하고 그동안 자기가 중매를 서주어서 커플이 된 사람들이 자못 많다고 자랑한다. 마법사이기도 한 알리도르는 돈 상슈의 사정을 듣고 엘지르 공주의 앞날이 어떤지 마법의 유리를 통해 본다. 공주는 왕족을 남편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나온다. 이 말을 들은 돈 상슈는 자기도 모르게 질투심과 함께 격분한다. 한편, 알지르 공주는 성을 떠나서 나바르(Navarre)로 가고 있다. 나바르는 프랑스 서남부와 스페인 북부에 걸쳐 있는 왕국이다. 알지르 공주가 나바르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 알리도르는 마법을 써서 공주의 행선지가 바뀌도록 한다. 알리도르의 마법에 의해 폭풍이 분다. 알지르 공주는 길을 잃는다. 공주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녀 젤리스(Zelis)와 함께 알리도르가 있는 사랑의 성으로 향하고 있다.
아라곤의 돈 산체와 엘지르 공주
엘지르 공주는 성에 도착하지만 역시 성의 시종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시종은 새로 오는 사람은 노래를 불러 합격을 해야 통과할수 있다고 말한다. 엘지르 공주와 시녀인 젤리스는 화가 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밤이 깊어가고 있고 폭풍이 몰아닥친다. 시종은 엘지르 공주를 동정하여 한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조금 전에 왔던 돈 상슈라는 기사가 공주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 같으니 아무리 싫더라도 두 사람이 커플이 되어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엘지르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또 다시 폭풍이 몰아닥친다. 시종은 성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성으로 통하는 다리가 올려진다. 엘지르 공주의 일행은 할수 없이 부근의 숲 속으로 몸을 피한다. 시녀인 젤리스는 엘지르 공주에게 어찌하여 그렇게도 성격이 차가우며 도도하기만 하느냐면서 나무란다. 엘지르 공주는 자기가 나바르로 가고자 하는 것은 그곳에 어떤 영웅이 있는데 그가 바로 자기의 미래 남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돈 상슈를 거부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덧 붙여 말한다. 그런데 그 미지의 영웅은 다만 꿈에서만 만난 일이 있다는 것이다. 젤리스는 그것은 꿈에 불과하기 때문에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지금 밤이 되고 추위까지 몰려오기 때문에 이 부근에 있을 돈 상슈를 찾아서 보호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권한다. 마침 돈 상슈가 나타난다. 하지만 엘지르의 태도는 마치 바위와 같다. 돈 상슈는 쓸쓸히 자리를 뜬다. 엘지르 공주는 나뭇닢을 이불로 삼고 잠이 든다. 공주는 다시 그 미지의 영웅에 대한 꿈을 꾼다. 한편, 돈 상셰도 숲 속에서 잠이 든다. 돈 상셰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받아 주게 되기를 바라는 꿈을 꾼다.
현대적 연출
파트 2.사악한 기사 로무알드(Romualde)가 성에 도착한다. 로무알드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숲 속에서 엘지르 공주를 만난다. 로무알드는 엘지르 공주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당장 결혼하자고 서두른다. 엘지르 공주가 거부하자 만일 자기와 결혼하지 않으면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며 위협까지 서슴치 않는다. 마침 엘지르 공주를 따라 왔던 돈 상슈는 이 모습을 보고 참을수가 없어 로무알드에게 결투를 청한다. 두 기사는 급기야 칼을 빼어들어 결투를 시작한다. 엘지르 공주는 그동안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돈 상슈가 자기를 위하여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며 후회한다. 마침내 공주의 마음이 열려 돈 상슈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공주는 큐피드에게 자기가 돈 상슈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며 도와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엘지르 공주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돈 상슈가 결투에서 중상을 입는다. 돈 상슈는 자기가 사모하는 엘지르 공주의 품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고 희망한다. 장송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중상을 입은 돈 상슈가 엘지르 공주의 앞으로 운반된다. 공주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하면서 돈 상슈와 사랑의 커플이 되어 사랑의 성으로 들어가겠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돈 상슈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시종은 엘지르 공주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랑의 성으로 들어갈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실상 로무알드는 알리도르 성주가 마법으로 만들어 낸 인물이며 로무알드와 돈 상슈가 결투를 하도록 하고 돈 상슈가 치명상을 입도록 한 것은도 실은 알리도르가 알지르 공주의 사랑하는 마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취한 조치라는 것이 밝혀진다. 돈 상슈는 알리도르의 마법에 의해 상처에서 회복된다. 엘지르 공주와 돈 상슈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사람들은 사랑의 승리를 찬양한다.
엘지르 공주역의 메조소프라노 멜린다 하이터. 헝가리의 미스콜츠 International Opera Festival, 미스콜츠 국립극장에서.
리스트가 작곡하려던 사르다나팔루스(사르다나팔레)에 대하여 설명코자 한다. 리스트는 대규모 오페라를 작곡하여 그가 단순히 이곳 저곳이나 다니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리 피아노의 귀재라고 해도 후세까지 남는 것은 연주가 아니라 작품이기 때문에 오페라 작곡에 도전했던 것 같다. 그가 14세의 소년시절에 발표한 Don Sanche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더구나 새로운 오페라에 도전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바이론의 서사시인 The Corsair(해적선)을 소재로 삼아 오페라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1844년에는 알렉산더 뒤마(아버지)로부터 대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바이론이 1821년에 쓴 운문희곡인 Sardanapalus를 소재로 삼기로 결정했다. 당시 리스트는 봐이마르 궁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엔나 궁정극장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비엔나 궁정극장(현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 겸 음악감독인 게타노 도니제티가 중병에 걸려 도저히 활동할수 없게 되어 후임을 물색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리스트는 그런 소문이 돌았던 해로부터 몇년을 더 살아서 1848년에야 요단 강을 건너갔다. 그러므로 리스트가 도니제티의 후임으로서 당장 비엔나로 올수 있는 여건은 되지 못하였다. 사실상 리스트는 거장 도니제티의 뒤를 이어 비엔나 궁정극장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가 되려면 사람들에게 '나도 훌륭한 오페라를 작곡한바 있소'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서 대규모 오페라를 작곡하고자 했다. 리스트는 '사르다나팔루스'를 1846년 쯤 밀라노의 무대에 올릴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사르다나팔루스는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이다. 나약하고 무기력한 그는 방탕하여 날이면 날마다 사치와 쾌락에 빠져서 지낸다. 마침내 군신들이 그를 왕좌에서 쫓아내는데 성공한다. 사르다나팔루스는 왕권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번번히 실패로 끝난다. 결국 사르다나팔루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엑또르 베를리오즈는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라는 타이틀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다. 1830년에 초연되었다. 리스트는 초연을 관람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리스트는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가 1828년에 그린 사르다나팔루스의 난잡스러운 연회장면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르다나팔루스를 소재로 오페라를 작곡키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스케치는 열심히 내 놓았는데 어찌하여 완성을 하지 못했는가? 리스트는 바그너에게 편지를 보내어 1852년 쯤에 파리나 런던에서 '사르다나팔루스'를 무대에 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얼마후 리스트는 바그너가 쓴 Oper und Drama(오페라와 드라마)를 읽게 되었다. 리스트는 바그너의 새로운 오페라 개념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현재 작곡을 추진하고 있는 '사르다나팔루스'는 바그너의 기준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구시대의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페라 작곡을 포기했다.
1828년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루브르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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