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9구 되블링

[참고자료] 세기의 베이스바리톤 발터 베리

정준극 2010. 9. 6. 23:02

[참고자료]

세기의 베이스바리톤 발터 베리

Walter Berry - Bassbariton

 

발터 베리는 1929년 4월 8일 비엔나에서 태어나 2000년 10월 27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세기의 베이스바리톤이다. 발터 베리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공부했으며 소년 시절에 이미 교회성가대의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그는 1946년 비엔나음악아카데미에서 헤르만 갈로스(Hermann Gallos)에게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2년 후인 1949년에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단원으로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슈타츠오퍼에서 처음에는 단역을 맡았으나 차츰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1952년에는 드디어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파파게노를 맡아 주역으로서 발돋움하였다. 당시 슈타츠오퍼의 베이스바리톤으로서는 에리히 쿤츠(Erich Kunz)가 압도하고 있었으나 이제로부터는 발터 베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어 그는 1953년부터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출연하기 시작함으로서 바야흐로 세계적인 성악가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그가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된것은 1955년 알반 베르그의 보체크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것이었다.

 

세기의 베이스바리톤 발터 베리

 

발터 베리는 1957년부터 유럽의 주요 오페라극장의 초청을 받아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부터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상임단원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 있으면서 77개 역할을 맡아 소화할 정도로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하게 되었다. 발터 베리가 비엔나 이외의 지역에서 자주 공연했던 곳은 베를린의 도이치오퍼, 뮌헨의 국립극장, 뉴욕의 메트 등이었다. 그는 오페라 이외에도 예술가곡의 연주자로서 높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예술가곡을 해석함에 있어서 세바스티안 페슈코(Sebastian Peschko)는 평생을 통한 발터 베리의 피아노 반주자였다.

 

보체크의 타이틀 롤을 맡은 발터 베리

 

발터 베리는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 코믹한 베이스바리톤 역할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마술피리'의 파파게노, '휘가로의 결혼'에서 휘가로, '돈 조반니'에서 레포렐로는 그의 대표적인 역할이었다. 이밖에 바그너의 역할, 예를 들면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쿠르베날, '니벨룽의 반지'에서 보탄,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에서 옥스, '그림자 없는 여인'에서 바라크, '카프리치오'에서 라 로슈, 베토벤의 '휘델리오'에서 돈 피짜로, 이와 함께 현대작품에서는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에서 타이틀 롤, 벨라 바르토크의 '푸른 수염의 성'에서 타이틀 롤로서 독보적인 위상을 갖게 되었다. 그가 가장 맡고 싶어했던 역할은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한스 작스였다. 실제로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에서 한스 작스를 맡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테스트에서 한스 작스의 역할이 맞지 않는다고 하여 포기하였다. 발터 베리는 여러편의 오페라의 초연에 주역으로 출연하여 주인공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예를 들면 아이넴의 '심판', 리버만의 '여자의 학교', '페넬로페', 에크의 '아일랜드의 전설' 등이다.

 

발터 베리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77개 역할을 맡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120역할을 맡아하였다. 아마 이토록 많은 역할을 맡았던 베이스바리톤은 찾아 보기 힘들 것이다. 그는 오페라 이외에 오라토리아와 가곡의 밤에 출연하였다. 가장 뜻깊었던 연주는 구스타브 말러의 지휘로 슈베르트의 작품을 연주한 것이었다. 그는 성실하고 노력하는 성악가였다. 그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명랑한 성격의 성악가였다. 그는 성악교사로서도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1990년부터 비엔나음악대학의 교수로서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그의 제자로서는 안젤리카 키르흐슐라거(Angelika Kirchschlager), 아드리안 에뢰드(Adrian Eroed), 한스 페터 캄머러(Hans Peter Kammerer), 마르쿠스 베르바(Marcus Werba), 페트라 마리아 슈니처(Petra Maria Schnitzer)등이 있다. 발터 베리는 1963년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캄머쟁거(공로성악가와 비슷한 명예칭호)로 선정되었다.

 

'돈 조반니'에서 타이틀 롤

 

1957년에 그는 세계적인 메조소프라노 크리스타 루드비히(Christa Ludwig)와 결혼하였다. 아들 볼프강은 1959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발터 베리는 크리스타 루드비히와 1970년에 헤어졌다. 발터 베리와 크리스타 루드비히는 함께 공연하는 일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에서 발터 베리는 옥스 남작을 맡고 크리스타 루드비히는 마샬린을 맡은 것이었다. 환상적인 콤비였다. 그후 1960년대의 비엔나는 발터 베리-크리스타 루드비히의 파트너 시기였다. 크리스타 루드비히와 헤어진 발터 베리는 두번 더 결혼하였다. 마지막 결혼은 제자인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플레흘(Elisabeth Flechl)과 한 것이었다. 발터 베리는 영화에도 자주 출연하였다. 1955년도 레메릭 프레쓰부르거가 감독한 'Oh Rosalinde'(아 로잘린데)라는 영화에서 활케 박사 역할을 맡은 것은 대표적이었다. 영화 '아 로잘린데'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의 내용을 가져온 작품이다. 1998년 그는 어떤 범죄영화에 출연하다가 쓰러진바 있다. 그는 세번째 부인과 함께 외출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71세 때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발터 베리는 19구 되블링의 하일리겐슈타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2007년 19구 되블링은 그를 기념하여 하일리겐슈타트 마을의 거리이름을 발터-베리-베그(Walter-Berry-Weg)라고 지었다.  

 

하일리겐슈타트 공동묘지의 발터 베리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