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7구 헤르날스

[참고자료] 작곡가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

정준극 2010. 9. 10. 23:49

[참고자료]

작곡가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

Ditters von Dittersdorf

 

아우구스트 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

 

작곡가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는 18세기 비엔나에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뛰어난 작곡가였지만 그의 오페라가 대부분 징슈필 스타일이기 때문에 세계로 알려지지 못하여 오늘날 그의 이름도 아는 사람이나 알 정도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작곡가였으며 아울러 바이올린의 거장이었다.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원래 이름은 August Carl Ditters von Dittersdorf)는 1739년 11월 2일 비엔나 근교 마리아힐르프의 라임그루베(Laimgrube)에서 태어나 1799년 10월 24일 보헤미아의 노이도르프(Neudorf: Destina)에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며 바이올리니스트이다. 그는 삼림관이라는 직업도 갖고 있었다. 디터스는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로 이어지는 이른바 비엔나 고전파(Wiener Klassik)의 대열에 포함되는 작곡가이다. 디터스는 뛰어난 재능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오페라와 징슈필만 해도 32편을 남겼으며 교향곡은 130편이나 작곡했다. 오페라와 징슈필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대본을 직접 작성할만큼 대본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의 오페라 또는 징슈필은 오늘날에도 자주 공연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코믹한 내용의 Doktor und Apotheker(의사와 약사)이다. 그의 기악곡도 음악회의 레퍼토리로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오페라 '의사와 약사'의 한 장면

 

디터스의 음악적 생에는 소년시절에 비엔나에서 요셉 폰 작센-힐드부르그하우젠 공자(Prinz Joseph von Sachsen-Hildburghausen)의 궁정합창단 멤버로 활동한 것으로 시작한다. 동시에 그는 청소년 시절에 비엔나 궁정오페라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였다.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은 그의 재능을 높이 사랑하여서 1763년 이탈리아 여행에 함께 데려갔다. 디터스는 이탈리아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가져 놀라운 찬사를 받았다.

 

디터스를 후원해준 프린츠 요셉 폰 작센-힐드부르그하우젠

 

디터스는 26세 때에 지벤뷔르겐(Siebenbürgen)에서 아담 파타치크 폰 그로쓰봐르다인(Adam Patachick von Grossweiden) 추기경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다. 지벤뷔르겐은 트란실바니아의 도시로서 오늘날은 루마니아에 속한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디터스가 오기 전에 미하엘 하이든이 지휘자로 활동했었다. 추기경의 오케스트라는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명령에 의해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성직자들이 별도의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것을 세속적인 낭비라고 하여 금지했었다. 다만, 제국 내에서 후작의 직위를 갖는 대주교의 경우에는 예외로 하였다. 그리하여 디터스는 브레슬라우 대주교인 필립 고타르트 폰 샤프고츄(Philipp Gotthard von Schaffgotsch)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자리를 옮겼다. 디터스는 야우어니히(Jauernig: Javornik)에 있는 요한네스버그성(Schloss Johannesberg)에서 음악활동을 했다. 요한네스버그성은 오늘날의 체크공화국에 있다. 이와함께 디터스는 대주교 영지의 삼림관(Forstmeister)에 임명되었다.

 

디터스도르프가 안정되게 활동을 했던 슐로쓰 요한네스버그

 

1773년 그는 귀족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도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가 되었다. 같은 해에 디터스도르프는 보헤미아의 프라이봘다우(Freiwaldau)에서 오늘날 군수에 해당하는 지방장관에 임명되었다. 프라이봘다우는 오늘날 체크공화국의 올로무키(Olomoucky: Jesenik)이다. 한편, 디터스도르프는 프라이봘다우의 지방장관에 임명되기 직전에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황금박차훈장(Orden von Goldenen Sporn)을 받았다. 모차르트도 어린 시절에 로마에 갔다가 교황으로부터 이 훈장을 받은바 있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금박차훈장을 받은 모차르트. 가슴에 반짝이는 것이 훈장이다. 디터스도르프도 똑같은 훈장을 교황으로부터 직접 받았다.

 

1784년 봄, 디터스도르프는 비엔나로 입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대의 하이든, 모차르트, 요한 밥티스트 바날(Johann Baptist Vanhal: 1739-1813)과 함께 비엔나를 대표하는 4대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특히 그의 현악4중주곡은 비엔나 고전파의 전통을 그대로 표현한 위대한 작품으로서 찬사를 받았다. 1790년, 그는 남부오스트리아 욀스(Oels: 오늘날의 폴란드 남서부에 있는 Olesnica)에서 칼 크리스티안 에르드만 폰 뷔르템버그-욀스(Carl Christian Erdmann von Württemberg-Oels: 1716-1792) 대공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여름철에는 슐레지아의 칼스루에(Carlsruhe)에 있는 대공의 여름궁전에서 여유있는 생활을 하며 연주회를 가졌고 작곡도 하였다.

 

슐로쓰 욀스(올레스니카). 디터스가 지휘자 생활을 했다.

 

디터스도르프는 생애의 말년에 통풍으로 고생하였다. 그는 1796년 이래 이그나즈 폰 슈틸프리트(Ignaz von Stillfried: 1734-1805) 영주의 빈객으로서 남부보헤미아의 데스트나(Destna: Deschna) 인근에 있는 노이호프(Neuhof)에서 지내다가 1799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을 불러 자기의 생애에 대한 회고담을 구술하여 받아 적도록 하였는데1801년 라이프치히에서 발표되었다. 1940년에 책자로 발간된 디터스도르프의 회고록은 오늘날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한 18세기 유럽의 음악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서 인용되고 있다. 비엔나의 17구 헤르날스는 1913년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를 기념하여 Dittersdorfgasse(디터스도르프가쎄)라는 거리이름을 지었다. 디터스도르프의 대표적인 작품은 다음과 같다.

 

보헤미아의 노이호프(데스트나)성. 노이호프는 디터스도르프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오페라)

- Doktor und Apotheker(1786: 의사와 약사)

- Die Liebe im Narrenhaus(1787: 정신병원에서의 사랑)

- Das rote Kappchen(1788: 빨간 모자)

- Die Hochzeit des Figaro(1789: 휘가로의 결혼)

- Don Quixote der Zweyte(1796: 돈키호테 2세)

- Gott Mars und der Hauptmann von Barenzahn(1795: 군신과 곰이빨 대위)

- Die lustigen Weiber von Windsor(1796: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

- Der Mädchenmarkt(1797: 아가씨 시장)

- Die Opera Buffa(1798: 오페라 부파)

 

(오라토리오)

- Isacco figura del Redentore(이삭)

- Davide penitente(참회하는 다윗)

- La Liberatrice del Popolo Giudaico nella Persia(페르시아에서 해방된 유태민족)

- Giob(욥)

 

(교회음악)

- Messe in c-Moll(C 단조 미사)

- Pastoral-Motette(전원 모테트)

 

교향곡은 130편을 작곡했으며 실내악은 현악3중주곡 6편, 현악4중주곡 6편, 현악5중주곡 12편, 피아노곡 136편, 비올라와 첼로를 위한 듀오 Es 장조, 두 개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디베르티멘토 Es 장조가 있다. 협주곡으로서는 콘트라베이스협주곡 2편, 비올라협주곡 1편, 바이올린협주곡 1편, 오보에협주곡 5편, 하프협주곡 1편, 쳄발로협주곡 1편 등을 남겼다.

 

프라이봘다우 성의 벽에 부착되어 있는 디터스도르프 기념 명판 


오늘날 체코공화국 데스트나(Destna: 독일어로는 Deschna)에 있는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의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