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궁전/슈타트팔레

팔레 베르트하임(Palais Wertheim)

정준극 2010. 10. 3. 08:02

팔레 베르트하임(Palais Wertheim)

팔레 베르트하임(아랫층에 맥도날드가 있다.)

 

슈봐르첸버그 장군의 기마상이 있는 광장(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한쪽, 임페리알 호텔 방향에 맥도날드 가게가 들어 있는 건물이 있다. 원래는 팔레 베르트하임(베르트하임 시내궁전)이었다. 주소는 슈봐르첸버그플라츠 17번지 겸 캐른트너링 18번지이다. 1868년에 거장 하인리히 폰 페르스텔(Heinrich von Ferstel)이 완성한 건물로서 당시 링슈트라쎄 스타일로 지은 건물이다. 오스트리아의 세계적 기업가인 프란츠 베르트하임(프란츠 프라이헤르 폰 베르트하임: 1814-1883)의 저택이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후 1910년 주상복합건물로 용도가 변경되었으며 1977년에는 마침내 아랫층에 맥도날드가 들어오게 되었다. 팔레 베르트하임에 들어선 맥도날드는 오스트리아 최초의 맥도날드 상점이다.

 

프란츠 베르트하임(프란츠 프라이헤르 폰 베르트하임)

 

프란츠 베르트하임은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되기 며칠 전인 1814년 4월 12일 도나우강변의 크렘스(Krems an der Donau)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집안이 부유하기 때문에 일하지 않고 먹고 놀수도 있었지만 도제(견습공)가 되기로 결심하고 어떤 기계공장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도제생활을 마친 그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를 여행한 후 고향 크렘스에 돌아와 1841년 공기구 생산공장을 차렸다. 이것이 나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르트하임 주식회사(Wertheim GmBH)의 전신이었다. 이듬해에 그는 비엔나와 노이슈티프트 바이 샤이브스(Neustift bei Scheibbs)에 있는 그루버 공장을 인수하여 더 많은 기계와 공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노이슈티프트 바이 샤이브스는 당시 강철공장지대로 유명한 곳이었다.

 

1844년 베르트하임은 라이바흐(Laibach)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 제품을 출품하여 은메달을 받았다. 이로부터 베르트하임표 제품들은 유럽에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이듬해에 궁정공구제작자(k.k. Hof-Werkzeugfabrikant)라는 타이틀을 받았다. 궁정에서 인정하는 생산자이면 그 이상의 영예가 없었다. 베르트하임이 페르디난트1세 황제로부터 상을 받은 제품들은 현재 비엔나 폴리테크니크 인스티튜트에 전시되어 있다. 베르트하임은 1846년, 32세의 청년시절에 뜻한바 있어서 비엔나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비엔나에서 기계공구를 좋아하는 페르디난트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그의 공구수집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어 그는 생페터스부르크의 황제박물관에도 공구수집을 지원하였다. 베르트하임표 공구는 유럽 제일의 인기를 끌었다. 1851년 런던 세계박람회(엑스포)에 출품한 제품들은 큰 인기를 끌었다.

 

1848년 그의 비엔나 사무실에 도둑이 들어와 금고를 열고 그 안에 있던 현금을 가져갔다. 당시 6천 굴덴(현재의 약 3천 유로)이었다. 베르트하임은 도둑이 열지 못하며 불이 나도 안전한 금고를 만들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노력 끝에 새로운 금고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각지에서 주문이 쇄도하였다. 심지어는 저 멀리 터키에서도 주문이 들어올 정도였다. 베르트아힘은 자기의 금고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1857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수많은 내외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화재실험을 하였다. 금고를 한시간 이상이나 세찬 불 속에 넣어 두었지만 나중에 열어보니 그 안에 두었던 지폐와 서류들이 하나도 상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베르트하임표 금고는 콘스탄티노플에서만 3천개 이상이 팔렸다.

 

1857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금고의 내화실험을 하고 있는 장면. 금고를 한시간 이상이나 불 속에 두었지만 그 안에 있던 지폐와 서류는 그대로였다.

 

베르트하임은 1852년부터 화재에 강하며 부서지지 않는 안전제일의 강철금고를 본격 생산하기 시작했다. 베르트하임-카쎈(Wertheim-Kassen)이었다. 1869년 베르트하임 안전금고 2만대 생산을 기념하여 큰 축제를 열었다. 밤하늘에는 아름다운 불꽃이 찬란하였다. 요셉 슈트라우스는 베르트하임의 불꽃놀이 축제를 기념하여 '불꽃 축제'(Feuerfest) 폴카를 작곡하였다. 사람들은 폴카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추었다. 베르트하임은 그의 금고를 열수 있는 사람에게 거금 10만 프랑의 상금을 주겠다고 내걸었다. 80개의 열쇠로 구성된 베르트하임 금고를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르트하임은 금고와 다른 강철공구를 생산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원래부터 부유한 그는 문화예술 활동에도 눈을 돌렸다. 그는 1863년 거장 하인리히 폰 페르스텔에게 의뢰하여 링슈트라쎄와 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모퉁이에 팔레를 짓도록 했다. 이어 1867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1873년의 만국박람회를 비엔나에 유치한 주역이었다. 프라터에서 열린 비엔나 만국박람회에서는 중심건물인 로툰다에 베르트하임의 금고와 공구들이 전시되었다.

 

베르트하임 금고 100주년 기념 생산품

 

베르트하임은 박람회뿐만 아니라 비엔나의 궁정에서도 큰 인기를 차지하였다. 프란츠 요셉1세 황제는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식에 황제의 기업자문관으로서 베르트하임을 대동하고 참석할 정도였다. 한편, 베르트하임은 1869-71년간 니더외스터라이히 의회의원을 지냈으며 비엔나 시의회 의원, 비엔나 상공회의소 부회장, 니더외스터라이히 노동조합장, 오스트리아 예술산업박물관 큐레이터를 지냈다. 예술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그는 팔레 베르트하임에 소극장을 마련하고 음악회와 연극을 공연할수 있게 했다. 기업인으로서 그는 대단히 모범적인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모든 직원들을 하나같이 가족처럼 대하고 그들의 복리후생을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공장에서는 노동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신시대 공장경영의 선구자였다. 모든 사람의 권리를 옹호하는 한편 개개인의 권리도 옹호하여 주었다.

 

베르트하임 금고(사무용)

 

1871년 베르트하임은 귀족의 작위를 받아 프라이헤르(Freiherr: 남작에 준하는 작위)를 받았다. 이밖에 그는 프란츠 요셉 대훈장을 받았고 프랑스군 명예장교, 오토만 터키 명예장교의 타이틀을 받았다. 그리고 고향인 크렘스, 공장이 있는 샤이브스와 슈타이르(Steyr)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었다. 미술품 수집가였던 그의 작품은 오늘날 파리 미술원, 뉘른베르크, 마이닝겐, 토리노, 아테네, 영국의 켄싱턴 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프란츠 베르트하임은 1883년 4월 3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중앙공동묘지의 아케이드 묘역에 안장되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프란츠 베르트하임 묘지. Tor 2 로 들어가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