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23구 리징

[참고자료] 오페레타 '세 아가씨의 집'

정준극 2010. 10. 6. 08:52

[참고자료]

'세 아가씨의 집'(Das Dreimäderlhaus)

하인리히 베르테의 오페레타

 

도블링거 악보출판사가 1826년에 출판한 '세 아가씨의 집' 표지. 슈베르트가 꽃을 들고 아가씨 중의 한 사람에게 구혼코자 찾아온 장면이다.

 

Das Dreimäderlhaus(다스 드라매더를하루스: 세 아가씨의 집)는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인 하인리히 베르테가 만든 3막의 징슈필(Singspiel)이다. 징슈필은 어찌보면 비엔나 오페레타의 전신이라고 말할수 있다. 징슈필과 오페라, 또는 오페레터의 구분은 쉽지 않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도 실은 징슈필에 속하며 베토벤의 '휘델리오'도 징슈필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 블로그에서는 '세 아가씨의 집'을 편의상 오페레타라고 부르기로 한다. 오페레타 '세 아가씨의 집'은 가곡의 왕 슈베르트를 주인공으로 삼은 음악연극이다. 음악가를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삼은 경우는 더러 있다. 예를 들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작곡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이다. 하지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주장의 비극적인 내용이다. 반면에 '세 아가씨의 집'은 로맨틱하고 아기자기한 스토리를 담은 것이다. 사랑스럽고 유쾌한 오페레타이다.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

 

돌이켜보건대 슈베르트는 생전에 열심을 다하여 여러 편의 징슈필(오페레타)을 작곡했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한 입장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비록 다른 사람이 작곡한 징슈필이지만 '세 아가씨의 집'으로 슈베르트에 대한 추억을 달랠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세 아가씨의 집'을 슈베르트가 작곡한 음악을 전부 사용하고 극히 일부분만 베르테가 손질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거의 모두 베르테가 독창적으로 만든 음악이며 다만 한 두 곡만이 슈베르트의 멜로디를 빌려온 것이다. 예를 들면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집 아가씨'에서 '초조'(Ungeduld)를 사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 '세 아가씨의 집'은 슈베르트의 음악에 베르테의 솜씨가 가미되어 있으므로 아무래도 두사람의 합작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음악에 있어서는 이런 식의 작품을 파스타치오(Pastaccio) 또는 파스티셰(Pastiche)라고 한다. 몇 사람이 합작하여 완성한 작품을 말한다. 예전부터 전해내려오던 음악을 정리하여 작품을 만든 것도 파스티셰라고 부른다. 아무튼 '세 아가씨의 집'은 슈베르트와 베르테가 합동한 파스티셰 징슈필(오페레타)에 해당한다.

 

파리에서의 '세 아가씨의 집' 포스터(타이틀은 Chanson d'amour)

 

'세 아가씨의 집'의 줄거리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원작은 1912년에 루돌프 한스 바르츄(Rudolf Hans Bartsch: 1873-1952)라는 사람이 쓴 슈밤메를(Schwammerl)이라는 소설이다. 이것을 알프레드 마리아 빌너(Alfred Maria Wilner)와 하인츠 라이허트(Heinz Reichert)라는 사람이 공동으로 오페레타 대본으로 만들었으며 그 대본에 기초하여 하인리히 베르타(1857-1924)가 슈베르트의 음악을 사용하여 오페레타로 완성한 것이다. 원래 제국군 장교였던 루돌프 한스 바르츄의 소설 '슈밤메를'은 옛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화를 아름답게 표현한 낭만적인 내용이다. 그래서 1916년 1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세 아가씨의 집'이 나오자 비엔나의 시민들은 제국의 찬란했던 영화를 회상하며 너도너도 극장 앞으로 몰려갔었다. 일종의 노스탈지아였다. 여기에 슈베르트 스타일의 감미로운 음악이 전편을 수놓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센티멘탈해 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세 아가씨의 집'은 1916년 1월 15일 비엔나의 라이문트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에서만 650회의 공연이 있었고 독일에서도 수백회의 공연이 있었다. 그만큼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세 아가씨의 집'의 원작인 슈밤메를을 쓴 루돌프 한스 바르츄

 

헝가리 출신으로 비엔나에서 음악출판을 하며 작곡도 하고 있던 하인리히 베르테에게 형 에밀(Emil)이 찾아와서 ‘심각한 오페라가 밥 먹여주냐? 오페레타를 써라!’고 종용했다. 당시 비엔나에서는 슈베르트의 징슈필이 자주 공연되고 있었다. 별로 재미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지난날의 향수를 맛보기 위해 슈베르트의 징슈필을 찾았다. 아무튼 하인리히 베르테는 형 에밀의 권고에 의해 오페레타 Das Dreimäderlhaus(세 아가씨의 집)을 완성하고 오늘날 네스트로이플라츠에 있었던 칼(Carl)극장을 찾아가 공연토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칼극장은 오페레타의 내용이 별로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러던 것을 라이문트극장이 공연해 주겠다고 나섰다. 단, 대타 조건이었다. 원래 계획되었던 오페레타의 공연이 사정상 공연할수 없게 되면 그 때를 대비해서 공연한다는 조건이었다. 어느날 예상했던 비상사태가 일어났고 대타자로 ‘세 아가씨의 집’이 무대에 올려졌다. 이후의 대성공 스토리는 생략!

 

라이문트극장에서의 초연에는 유명한 연극배우 프란츠 슈뢰터(Franz Schrodter)가 슈베르트의 역할을 맡았으며 아니 라이너(Anny Rainer)가 여주인공인 한네를(Hannerl)을 맡았다. 슈뢰터는 당시 60세의 원로였으나 탁월한 연기력과 인기로 슈베르트를 뛰어나게 소화하였다. 슈뢰터는 1866년에 슈베르트를 소재로 삼은 프란츠 주페(Franz von Suppe)의 오페레타 '노래의 왕자'(Prince of Song)에서 슈베르트의 역할을 맡아 노래를 부른바 있다. 당시 '세 아가씨의 집'에 대한 인기가 얼마나 컸느냐 하면 후편으로 '한네를'(Hannerl)이라는 오페레타가 나올 정도였다. 아무튼 '세 아가씨의 집'은 1920-30년대에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 다음으로 가장 많이 공연된 오페레타였다.

 

1916년 1월 15일 '세 아가씨의 집'을 초연한 비엔나의 라이문트 극장

 

'세 아가씨의 집'의 파리 초연은 1921년 5월 이었다. 프랑스판 '세 아가씨의 집'은 타이틀을 '사랑의 노래'(Chanson d'Amour)라고 고쳤다. 대성공이었다. 나중에는 La Maison des trois jeunnes filles(세 아가씨의 집)으로 고쳐서 공연하기도 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세 아가씨의 집'은 1921년 9월 브로드웨이의 앰버싸도 극장에서 선을 보였다. 영어 대본은 도로시 도널리(Dorothy Donnely)가 맡았다. 타이틀은 Blossom Time(꽃피는 시절)이라고 바꾸었다. 유명한 뮤지컬 작곡가 지그문트 롬버그(Sigmund Romberg)가 여러 부분에 슈베르트의 음악을 편곡하여 넣었다. 첫 공연 이후 연속 592회의 공연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런던에서는 Lilac Time(라일락이 필 때에)라는 제목으로 데뷔하였다. 아드리안 로쓰(Adrian Ross)가 런던 취향에 맞게 대본을 번역하였으며 클러샘(G.H. Clutsam)이 베르테의 음악을 기본으로 상당부분을 수정하였다. 클러샘은 호주 출신의 작곡가이지만 런던에 와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슈베르트를 높이 존경하여 1912년에는 '슈베르트 자서선'을 펴내기도 한 사람이다. 클러샘의 수정본은 미국 롬버그의 것보다는 오리지널에 충실한 것이었다. '라일락이 필 때에'는 1922년 12월 22일 리릭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올려진후 622회의 연속 공연을 가졌다. 런던 공연에는 인기배우 코타이스 파운드(Courtice Pounds)와 클라라 버터워스(Clara Butterworth)가 출연했다. 1959년에는 새들러스 웰스 오페라단의 쥰 브론힐(June Bronhill)과 토마스 라운드(Thomas Round)가 음반을 취입한 것이 있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미국 브로드웨이 버전과 런던 웨스트 엔드 버전은 전세계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1950년대까지 여러번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세계 60여 나라에서 공연되었으며 현재까지 22개국어로 번역되었다. 1961년의 통계에 의하면 '세 아가씨의 집'의 여러 버전은 전세계에서 무려 8만 5천회의 공연을 가진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간혹 제작되고 있다.

 

'세 아가씨의 집'을 작곡한 하인리히 베르테(1857-1924)

 

이제 스토리를 간략히 살펴보자. 그 전에 주요 등장인물부터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이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슈베르트는 말할 나위도 없으며 그의 친구들로서는 시인 프란츠 폰 쇼버(Franz von Schober: 1796-1882: 테너), 화가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 1804-1871: 바리톤), 소묘가 레오폴드 쿠펠봐이저(Leopold Kuppelweiser: 1796-1862: 베이스), 궁정오페라성악가 요한 미하엘 포글(Joahnn Michael Vogl: 1768-1840: 베이스)은 모두 실존인물을 등장인물로 삼은 경우이다. 한편, 세 명의 아가씨의 이름은 헤데를(Hederl), 하이데를(Haiderl), 한네를(Hannerl)이며 이들의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쵤(Christian Tschöll: 베이스)은 궁정유리세공장인이고 어머니는 마리 쵤(Marie Tschöll)로서 오페레타에서는 노래는 부르지 않고 대사만을 말한다.

 

프랑스의 영화 La Maison des trois jeunnes filles(세 아가씨의 집)의 한 장면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때는 1826년 봄이다. 궁정유리세공장인인 크리스티안 쵤에게는 세명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딸들이 있다. 반복하자면 헤데를, 하이데를, 한네를이다. 세 딸들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크리스티안 쵤의 집을 '세 아가씨의 집'이라고 부른다. 작곡가인 프란츠 슈베르트가 이 집에 하숙을 하게 된다. 슈베르트에게는 여러 친구들이 있었다. 프란츠 폰 쇼버, 모리츠 폰 슈빈트, 요한 미하엘 포글, 레오폴드 쿠펠봐이저 등이다. 모두 한가닥 하는 친구들이다. 이들은 슈베르트의 하숙집 정원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정원의 다른 테이블에는 안장제작의 명인인 안드레아스 브루네더(Andreas Bruneder)와 마차수송업을 하는 페르디난트 빈더(Ferdinand Binder)가 자리잡고 있다. 그때 세 아가씨가 정원에 나타나 두 신사와 정답게 얘기를 나눈다.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쵤은 헤데를과 하이데를이 두 신사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잠시후 아버지가 나타나자 두 신사는 무슨 죄나 지은 것처럼 도망치듯 황급히 자리를 뜬다. 그러자 슈베르트의 친구이 폰 쇼버가 크리스티안 쵤에게 헤데를과 하이데를이 두 신사와 사랑하는 사이라고 귀띰해 준다. 한편, 한네를은 슈베르트를 마음 속으로 사랑하고 있다. 한네를은 슈베르트와 더 가깝게 있고 싶어서 노래 레슨을 해 달라고 부탁한다. 슈베르트도 한네를을 좋아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여러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쿠펠봐이저가 그린 '포글과 슈베르트'. 포글의 그늘에 가려진 슈베르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언제나 오선지를 들고 다녔다.

 

그간의 사정은 지면상 생략하고 마침내 헤데를과 브루네더, 하이데를와 빈더가 함께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궁정오페라극장의 성악가로서 여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포글이 두 쌍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슈베르트가 작곡한 노래를 부른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노래의 아름다움에 감동한다. 하객 중에는 궁정극장의 스타인 소프라노 루치아 그리시(Lucia Grisi)도 포함되어 있다. 루치아 그리시는 좀 덜렁대는 가벼운 여자였다. 그리시는 동시에 두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나는 슈베르트의 친구인 시인 쇼버이며 다른 하나는 스캔디나비아 어느 나라의 외교관이었다. 그리시는 쇼버와 아직 결혼하지 않고 있는 한네를이 섬싱이 있다고 생각하여 질투를 한다. 그리고 그런 쇼버와 어울리는 슈베르트도 경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한네를은 소프라노 그리시가 쇼버와 그런 사이이면서 슈베르트에게도 접근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슈베르트에 대하여 지니고 있던 호감이 사라진다. 

 

프란츠 폰 쇼버. 유화. 슈베르트보다는 훨씬 잘 생겼다.

 

축하잔치가 끝나고 모두들 돌아간다. 그런데 갑자기 슈베르트와 쇼버가 다시 찾아온다. 사실상 쇼버는 전부터 한네를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네를에게 자기의 심정을 고백하기 위해 슈베르트를 대동하고 다시 찾아온 것이다. 쇼버는 한네를에 대한 마음을 슈베르트가 작곡한 노래로서 표현한다. Ungeduld(초조)이다. 쇼버가 정성을 다하여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본 슈베르트는 자기가 공연히 한네를을 좋아했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한네를에게 주려고 가져온 꽃송이를 슬며시 안보이는 곳에 놓아둔다. 한네를은 슈베르트가 사랑을 고백할줄 알았는데 오히려 쇼버가 자기에게 깊은 애정으로 사랑을 고백하자 슈베르트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쇼버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모습니다. 슈베르트는 자기가 할 일은 작곡이라고 생각하며 친구의 행복을 위해 조용히 자리를 뜬다. 이상이 대충 살펴본 오리지널 '세 아가씨의 집'의 기둥 줄거리이다.

 

비엔나의 1구 묄커바슈타이에 있는 슈베르트 식당. 슈베르트와 친구들이 라일락 피는 정원에서 사랑을 노래하던 곳이라고 한다. 주소는 슈라이포겔가쎄(Schreyvogelgasse)이다. 베토벤은 이 집의 옆에 있는 파스크발라티하우스에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했다.

 

또 다른 버전도 있다. 가난한 작곡가인 슈베르트는 친구 두명과 함께 비엔나의 어떤 집에 하숙을 들어간다. 궁정유리세공장인인 크리스티안 쵤의 세 딸들이 슈베르트와 두 친구를 찾아온다. 세 딸 중 둘은 슈베르트의 룸메이트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하지만 셋째 딸인 한네를은 아직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 그저 두 언니들의 뒷치닥거리나 하고 있는 형편이다. 슈베르트와 친구들은 세 아가씨가 찾아오자 파티를 연다. 슈베르트의 다른 친구들이 또 찾아와 파티는 흥겨롭기만 하다. 얼마후 아가씨들의 아버지가 딸들을 찾기 위해 나타난다. 슈베르트의 두 친구는 크리스티안을  라일락 꽃이 만발한 정원으로 모시고 가서 와인을 대접한다. 그러면서 실은 자기들이 두 딸을 각각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와인으로 거나해진 크리스티안은 마침내 두 딸과 이들의 약혼을 허락한다. 슈베르트를 은근히 좋아하는 한네를은 슈베르트에게 음악 레슨을 받고자 한다. 슈베르트도 한네를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성악레슨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어느새 한네를과 슈베르트는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마음이 약하여서 자기들의 감정을 들어내지 못한다.

 

몇달후 크리스티안의 집에서 두 딸의 결혼식이 열린다. 슈베르트를 비롯한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결혼식에 초청을 받아 참석한다. 궁정오페라극장의 소프라노 지우디타 그리시도 참석한다. 그리시는 슈베르트의 친구중의 한 사람인 프란츠 폰 쇼버 남작의 애인이다. 그리시는 쇼버가 한네를을 좋아하고 있다고 믿어서 질투를 한다. 그리시는 한네를에게 프란츠 폰 쇼버 남작은 자기의 애인이므로 떨어져 있으라고 경고한다. 한편, 사실상 슈베르트는 한네를을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하여서 차마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있다. 슈베르트는 대신 친구인 쇼버에게 부탁하여 자기의 마음을 표현한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한다. Ungeduld 이다. 한네를은 그리시가 쇼버가 아니라 슈베르트와 사랑하는 사이인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실은 모두 이름이 프란츠이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그러한 때에 쇼버가 자기에게 사랑의 마음을 고백하는 노래를 부르자 어느덧 쇼버를 사랑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모두들 프라터에 모인다. 한네를과 쇼버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본 슈베르트는 한네를의 행복을 빌면서 슬며시 자리를 비킨다. 그리고 자기가 할 일은 음악밖에 없다고 믿는다. 이런 내용이지만 오리지널에서 크게 다른 길로 가지는 않았다.

 

 

1916년 비엔나 초연 당시의 슈베르트역의 프란츠 슈뢰터와 한네를 역의 아니 라이너

 

하지만 미국에서의 Blossom Time은 음악과 스토리를 상당히 수정한 것이다. 대본가인 도로시 도널리는 주인공의 이름도 약간씩 수정하였으며 음악을 맡은 롬버그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도널리-롬버그 콤비는 뮤지컬 '황태자의 첫 사랑'(Student Prince)을 완성한 경력이 있다. 대본가 도널리는 세 아가씨의 이름을 미치(Mitzi), 프리치(Fritzi), 키치(Kitzi)로, 소프라노 그리시는 벨라브루나(Bellabruna)로 바꾸었으며 샤른토프(Scharntoff)백작이라는 인물을 추가하였다. 슈베르트는 샤른토프 백작을 위해 Ständchen(세레나데)를 작곡한다. 샤른토프 백작은 세레나데를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하여 부인에게 줄 계획이다. 그런데 부인은 쇼버를 은밀히 사랑하고 있다. 엎치락 뒷치락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한편, 슈베르트의 친구들은 미치(한네를)와 슈베르트가 서로 호감을 갖고 있지만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미치를 슈베르트로부터 성악레슨을 받도록 주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베르트는 수줍기만 해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다. 미치는 그런 슈베르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두 명의 슈베르트 친구들은 프리치, 키치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아가씨들의 아버지가 나타나자 두명의 딸들과 두명의 남자들은 합동하여 아버지에게 자꾸 술을 권하여 취하게 만들고 결혼허락을 받아낸다. 제3막은 슈베르트의 작품 연주회가 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병이 심각하여 참석하지 못한다. 연주회가 끝난 후 친구들이 슈베르트를 찾아가 보았을 때는 슈베르트가 막 숨을 거두고자 하던 때였다. 슈베르트의 주변에는 천사들이 둘러서서 '아베 마리아'를 부른다. 막이 내린다. 브로드웨이 초연에서는 버트램 피칵(Bertram Peacock)과 올가 쿡(Olga Cook)이 출연했다. 'Blossom Time'은 1920년대에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롱 런한 뮤지컬이었다. 'Blossom Time'은 1939, 1943년에도 브로드웨이에서 리바이벌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린츠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20세기 최고의 테너인 리챠드 타우버(Richard Tauber)는 나이가 연만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세 아가씨의 집'에서 슈베르트 역할을 맡았으며 유럽을 순회공연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이력이 생겨서 자기 스스로의 버전을 만들게 되었다. 타우버 버전은 1933년 앨드위치(Aldwych)극장에서 선을 보였다. 시대에 맞게 스토리와 대사를 수정한 것이어서 인기를 끌었다. 타우버는 또한 1934년에 제인 박스터(Jane Baxter)와 함께 영화를 촬영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918년에 '세 아가씨의 집'을 처음으로 영화로 만들었으며 이어 1958년에는 거장 에른스트 마리슈카(Ernst Marischka)의 감독으로 다시 영화로 만들었다. 이때 슈베르트 역할은 인기배우 칼하인츠 뵘(Karlheinz Böhm)이 맡았다. 칼하인츠 뵘은 세계적인 지휘자 칼 뵘(Karl Böhm)의 아들로서 마리슈카의 3부작 영화인 '씨씨'(Sissi)에서 로미 슈나이더의 상대역인 프란츠 요셉 황제를 맡아 잘 알려진 인물이다.

 

테너 리챠드 타우버가 슈베르트 역할을 맡은 '라일락 필 때에'의 포스터 

 

비엔나 1구의 묄커바슈타이에는 Das Dreimäderlhaus 라는 명판이 붙어 있는 집이 있다. 그 집이 정말로 '세 아가씨'가 살았던 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비엔나시가 문화유적으로 지정한 건물이다. 1803년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묄커바슈타이(Molkerbastei)는 비엔나 성벽을 구성하고 있던 보루이다. 그래서 높은 지대에 있다. 1865년 링슈트라쎄를 조성할 때에 비엔나 성벽을 이루는 거의 모든 지역이 철거되었지만 묄커바슈타이의 건물들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 지역은 옛 비엔나의 거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므로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였다. 영화 '제3의 사나이'에도 나오고 마리슈카의 감독으로 칼하인츠 뵘이 출연한 '세 아가씨의 집'에도 등장하였다. Das Dreimäderlhaus의 바로 왼편에는 유명한 베토벤의 파스쿠발라티 하우스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슈베르트 식당이 있다.

 

 묄커바슈타이에 있는 드라이마데를하우스 기념 명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