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루돌프 예트마르(Rudolf Jettmar)
루돌프 예트마르
유럽 상징주의의 대표인 루돌프 예트마르는 1869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여 있는 갈리치아의 자보드치(Zawodzie)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폴랜드가 되어 있는 곳이지만 당시에는 넓은 의미에서 보헤미아라고 부르는 지역이었다. 예트마르는 처음에 음악공부를 했으나 미술에 뜻을 두어 1805년에 비엔나미술대학교에 들어가 독일 출신의 프란츠 럼플러(Franz Rumpler: 1848-1922)와 아우구스트 아이젠멩거(August Eisenmenger: 1830-1907)의 문하에 들아서 화가로서의 길로 정진하였다. 이어 1892년에는 1년동안 칼스루에의 Badische Kunstakademie에서 수업하였고 그 후에는 라이프치이화 드레스덴에서 풍경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에게도 영광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1895년 프리 드 롬(Prix de Rom)을 받아 6개월간 이탈리아를 여행하루 있었던 것은 그의 전도에 큰 영향을 준 것이었다. 그로부터 그는 풍경화 이외에도 동물화, 역사화, 그래픽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상징주의적인 작품에 몰두하였다. 1897년 비엔나로 돌아온 그는 Meisterschule für Graphische Künste(그래픽예술전문학교)에 들어가 거장 윌리엄 웅거(William Unger: 1837-1932)로부터 현대그래픽에 대한 수업을 받았다. 그는 1898년부터 제체시온(Secession)의 멤버가 되어 독일 상징주의 화가인 막스 클링거(Max Klinger: 1857-1920)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트마르 서거 50주년 기념 우표
예트마르의 대표작인 Stunden der Nacht(밤의 시간), Prometheus(프로메테우스), 그리고 바이론의 연작시 Kain(카인)을 주제로 한 에칭은 근대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작품이다. 예트마르는 또한 키르헨 암 슈타인호프(Kirche am Steinhof)의 측면제단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의 대작인 Weg des Lebens(인생의 길)은 1909년 전쟁중에 파손되어 이제는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예트마르는 1939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후에 여러가지로 압박을 받는 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의 서거 5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다. 1954년에는 비엔나의 23구 리징에 있는 Jettmargasse(예트마르가쎄)는 그를 기념하는 거리이다. 예트마르는 1910년부터 비엔나미술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1936년 명예교수로 은퇴할 때까지 후진들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예트마르의 대작 '헤라클레스와 헤스페리데스'(Hercule et les Hesperi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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