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에두아르트 바이트(Eduard Veith)

정준극 2016. 9. 14. 20:42

아름답고 섬세한 인물화의 에두아르트 바이트

비엔나 폭스테아터 천정화 등


에두아르트 바이트 자화상


에두아르트 바이트(Eduard Veith: 1858-1925)는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풍경화가 겸 인물화가였다. 마치 동화나 신화 속의 풍경, 또는 그런 동화나 신화에 나올 것 같은 인물들을 그려서 유명했다. 바이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 매렌(Mähren) 지역의 노이티챠인(Neutitschein)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매렌이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아니한 국왕령(Kronland)이었다. 매렌은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영토로 되어 있다. 바이트의 아버지인 율리우스 바이트(Julius Veith: 1820-1887)는 실내화가였다. 바이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비엔나의 응용미술학교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k.k. Kunstgewerbeschule des k.k. Osterreichischen Museums für Kunst und Industrie라고 부르는 학교였다. 오늘날 슈투벤링에 있는 Universitat für angewandte Kunst(비엔나 응용미술대학교)이다. 바이트는 파리에 가서 공부를 더 했고 이어 이탈리아, 벨기에,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튜니스에까지 가서 미술공부를 더 하였다. 1890년경에 그는 비엔나 예술가협회(Wiener Künstlerhaus)의 멤버로 활약했다. 그후에는 미술산업박물관 산하 응용미술학교의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는 일을 했다. 바이트는 1952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고 되블링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는 율리우스 스몰리크(Julius Smolik: 1879-1948)일 것이다. 바이트의 화풍은 네오로코코 양식이라고 볼수 있다. 하지만 한스 마카르트(Hans Makart)와 안젤름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의 역사주의적 상징주의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바이트는 비엔나에서 이른바 '그륀더차이트'(Grunderzeit)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대표작으로서는 폭스테아터의 천정화인 '빈도보나의 충성맹세'(Huldigung der Vindobona), 비엔나 수영장의 천정화인 '목욕하는 다이아나'(Dianabad), 로나허 극장의 벽화, 호프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홀의 천정화, 뷔르거테아터의 벽화, 케른트너슈트라쎄 16번지 건물의 벽화 등이다.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 극장의 천정화도 바이트의 작품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해 즐겁게 들어오는 뮤즈들'(Einzug der heiteren Musen durch das Brandenburger Tor)이라는 타이틀이다. 프라하 독일극장의 벽화 및 천정화도 바이트의 작품이다.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인 아기 예수와 성모. 1900년.

젊음의 샘.

캐른트너슈트라쎄 16번지 외벽의 모자이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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