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화가 지망생 히틀러

정준극 2016. 8. 31. 11:12

화가 지망생 히틀러

비엔나 미술대학에 두번 응시했으나 낙방

루돌프 알트를 가장 존경


히틀러가 1913년에 그린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2차 대전이 막을 내리기 직전까지 나치 독일의 지도자였던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스스로를 화가라고 내세운 별난 인물이었다. 사실상 히틀러는 독일 제3제국의 막강한 총통으로서 세계를 뒤흔든 2차 대전을 치룬 대단한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제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화가가 되려는 꿈을 버리지 못한 평범한 인물이었다. 악명 높은 히틀러가 화가가 되려는 미련을 얼마나 버리지 못했는가 하면 어떤 때 그는 사람들에게 '나는 화가이지 정치가가 아니야. 정말이지 폴란드 문제만 해결을 보고는 다 집어 치우고 화가로 돌아가겠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던 것을 보면 알수 있다. 물론 폴란드를 점령하고 나서 화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히틀러는 화가 지망생이었을 뿐, 정작 화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의 화가적 재능을 보이고 싶어서 그저 시간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현재로서는 수백 장의 그림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예술혼이 담긴 미술작품이라고까지 말할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특히 팔기 위해서 그림엽서를 그린 것이 많았다. 그나저나 미술 전문가들은 히틀러의 그림이 별로 들여다 볼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고 보았다. 다만, 나치 시대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상황이 상황이니만치 히틀러의 그림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인기라기 보다는 오히려 히틀러의 작품이기 때문에 억지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찬밥 신세의 작품들이 되었다. 전후 뉘른베르크의 전범 재판에서는 히틀러의 그림들을 압수하여 폐기토록 했다. 상당수의 히틀러 그림들이 폐기처분되었다. 그렇지 못한 그림들은 미국이 가져가서 아직도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독일의 일부 사람들은 설령 히틀러의 그림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창피해서 들어내 놓지 못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전쟁이 끝난지도 어언 반세기가 지나자 히틀러라는 희대의 악인이 그렸다는 것 때문인지 그의 그림을 소장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히틀러의 그림이 혹시라도 미술품 경매에 나오면 값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만 달러는 보통이었다. 주로 아랍의 부자들이 은근히 사갔다.  


히틀러가 그린 비엔나 슈타츠오퍼. 그림엽서 용이다.


히틀러를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의 카테고리에 넣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지만 히틀러는 분명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 사람이며 화가가 되기 위해 비엔나 미술대학에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입학원서를 냈던 사람이므로 비록 악명 높은 인물이지만 그가 화가가 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했으며 어떤 그림들을 남겼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소개하는 바이다. 잘 아는대로 히틀러는 오늘날 오스트리아 서북지역인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의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이란 곳에서 테어났다. 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히틀러는 어린 시절에 린츠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히틀러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린츠에 살고 있던 히틀러는 18세 때인 1907년에 화가가 되려는 청운의 뜻을 품고 비엔나미술대학(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Wien: Academy of Fine Arts of Vienna)에 입학원서를 냈다. 비엔나미술대학은 오늘날 비엔나 링 슈트라세(Ring Strasse)의 쉴러플라츠(Schillerplatz)에 있는 학교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입학을 허락받지 못했다. 예비 심사에서 그런 재능을 가지고는 곤란하다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단념하지 않고 이듬해인 1908년에 다시 입학원서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재능이 없다고 판단되어 정식 시험을 볼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그래도 히틀러는 포기하지 않고 그로부터 5년 동안 비엔나에 머물면서 막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며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마침내 1913년, 그러니까 1차 대전이 일어나기 1년 전에 독일의 뮌헨(당시는 바바리아)으로 가서 다시 그림이나 그리려고 하다가 1차 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군에 입대해서 하사로서 복무하였고 제대한 후에는 자기가 무슨 정치가라고 나치당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청년 히틀러가 미술가가 되기 위해서 들어가려 했던 비엔나미술대학의 오늘날의 모습. 만일 이 대학에서 히틀러를 학생으로 받아 들였다면 히틀러는 평생을 화가로서 지냈을 것이며 2차 대전의 참화는 없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주로 건물들을 그렸다. 위에서 보는대로 성화를 그린 일도 있고 제일 하단에서 보는 대로 여인의 누드도 그린 일이 있지만 주로 건물들을 그렸다. 건물을 그릴 때에 히틀러의 스타일은 대단히 계산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그렸다. 그런데 자기의 창의적인 스타일은 부족했고 대신에 19세기 다른 화가들의 걸작들을 모방하는 스타일이었다. 히틀러는 자기 그림에 대해서 여러 예술사조들을 종합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가만히 보면 그리스-로마의 고전주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 신고전주의를 주로 모방했다고 볼수 있다. 그런 중에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알트(Rudolf Alt)를 가장 존경하여서 '스승'이라고 부르며 그의 스타일을 따르고자 노력했다. 루돌프 알트는 사실주의 건물들을 즐겨 그린 화가이다. 본 블로그의 처음 페이스에 나오는 비엔나의 성슈테판대성당의 그림은 루돌프 알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아무튼 히틀러의 그림을 보면 주제는 물론이고 색채에 있어서도 루돌프 알트와 비슷한 점을 많이 발견할수 있다. 다만, 루돌프 알트는 자연과 주변 환경을 동일하게 환상적으로 그린 편이지만 히틀러는 자연보다는 건물을 중심으로 그린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고 말할수 있다.


히틀러가 뮌헨 등기사무소 건물을 그린 것. 1914년. 워싱턴의 미육군역사관 지하실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히틀러가 비엔나미술대학에 들어가려 했던 이야기를 조금 더 소개코자 한다. 히틀러는 '마인 캄프'(Mein Kampf)라는 자서전적인 저서에 그가 젊었을 때 전문 화가가 되려고 했던 이야기를 자세히 적었다. 그렇지만 그의 희망은 비엔나미술대학 입학시험에 두번이나 실패하는 바람에 좌절되었다고 썼다. 히틀러는 1907년 18세 때와 1908년 19세 때에 각각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 입학시험을 보았을 때는 예비시험에는 합격을 했다. 이콘 또는 성서 이야기를 주제로 삼아서 두 작품을 그리는 시험이었다. 한 작품을 그리는 데에 세시간씩이 주어진 시험이었다. 두번째 시험은 자기가 그려온 화집을 제출해서 평가를 받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제출한 작품들은 인물화는 거의 없고 대부분 건물화였다고 한다. 시험관들은 히틀러가 화가보다는 건축가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험관 중의 한 사람은 히틀러에게 비엔나미술대학의 회화과에 원서를 낼 것이 아니라 건축과에 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건축과에 들어가려면 히틀러가 중퇴한 중고등 과정을 다시 이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건축과에 응시하라는 의견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히틀러는 비엔나의 건물들을 그린 그림엽서를 팔아서 그나마 돈을 벌어 생활했다. 뮌헨에 온 히틀러는 화가로서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 뮌헨에서 화가들이 자주 드나드는 카페에 가서 화가들과 만나는 것으로 자기의 희망을 되살려 보고자 했다. 기록에 의하면, 2차 대전이 터지기 직전인 1939년 8월에 당시 독일의 총통이던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영국 대사인 네빌 헨더슨에게 '나는 화가이지 정치가가 아닙니다. 폴란드 문제가 해결되면 나는 화가로서 나의 생애를 마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히틀러가 그린 바바리아의 노이슈봔슈타인 성. 건물과 주변환경의 조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건물만을 위주로 삼았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얘기였다.


미술학도가 되고자 했던 히틀러의 비엔나 시절에 대하여 조금 더 부연코자 한다. 히틀러는 1908년부터 1913년까지 5년 동안 비엔나에서 지냈다. 주로 그림엽서와 건물 그림들을 그려서 그걸 팔아서 생활했다. 히틀러가 자화상을 처음으로 그린 것은 21세 때인 1910년이었다. 히틀러의 자화상은 다른 작품 12점과 함께 1945년 전쟁이 끝난 직후 독일의 에센에서 발견되었다. 히틀러가 비엔나에서 지낼 때에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사업가 사무엘 모르겐슈테른(Samuel Morgenstern)은 히틀러의 그림을 여러 점이나 사서 간직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자기의 그림들을 사무엘 모르겐슈테른의 상점에 들고 와서 사라고 했고 그러다가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무엘 모르겐슈테른은 유태계였다. 그후 히틀러의 그림들은 사무엘 모르겐슈테른의 주선으로 유태인들이 주로 샀다. 히틀러가 유태인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모르겐슈테른의 단골 고객 중의 하나였던 변호사인 요제프 페인골트는 히틀러가 비엔나의 구시가지를 그린 일련의 작품들을 모두 구매했다. 요제프 페인골트도 물론 유태계였다. 1914년에 1차 대전이 일어나자 25세였던 히틀러는 입대하였다. 그런데 히틀러는 전선에 나가면서 그림 그리는 도구들을 챙겨 가지고 갔다. 전투가 없는 휴식 시간에는 주로 그림을 그리면서 지냈다는 것이다. 아무튼 히틀러는 전쟁에 나가서까지 화가가 되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히틀러가 1차 대전의 전선을 그린 작품


히틀러의 그림 중 상당수는 2차 대전의 막바지에 미군의 손에 들어갔다. 이들은 미국으로 보내져서 다른 압수품들과 함께 미국정부의 소관이 되었다. 미국 정부는 히틀러의 그림들을 전시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었지만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히틀러의 다른 그림들은 개인소장이어서 소재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개인 소장의 히틀러 그림들이 경매에 나오기 시작했다. 영국의 미술품 경매상인 슈롭셔어의 물로크는 2009년에 15점의 히틀러 그림들을 9만 7천여 파운드에 판매한 일이 있다. 이어서 다른 13점은 10만 유로가 넘는 금액으로 팔리기도 했다. 2012년에 슬로바키아 경매는 다른 그림과 함께 히틀러의 그림을 3만 2천 유로에 매각하였고 2014년에는 뉘른베르크의 경매에서 히틀러가 그린 뮌헨 등기사무소 건물 그림이 무려 13만 유로에 매각되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1억 6천만원이 넘는 금액이다. 그러면 히틀러는 몇 점의 작품들을 남겼는가? 히틀러 전문가들은 히틀러가 전생에를 통해 약 3백점의 그림을 남겼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히틀러의 '마인 캄프'를 보면 히틀러는 비엔나에 있을 때에 하루에 2-3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6백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는 계산이다. 히틀러 점눈가 중의 하나인 피터 얀이란 사람이 어느때 히틀러와 인터뷰를 한 일이 있는데 이때 히틀러는 '1908년부터 뮌헨에서 있을 때인 1914년까지 아마 1천 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피터 얀은 나치 정부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직전인 1937년에 슐테 슈트라우스가 임명한 히틀러 작품 회수 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치는 1936년부터 히틀러가 1907년부터 1912년 비엔나에서 지낼 때의 작품들, 그리고 1921년부터 1922년까지 그린 작품들을 회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를 통해서 히틀러의 많은 작품들을 나치가 회수해서 보관하기는 했다. 오늘날 히틀러 그림을 가장 많이 공식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은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나티크(Natick)에 있는 2차대전 박물관이다.


히틀러가 그린 '안개 낀 프라하'


그러면 히틀러의 그림 솜씨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현대에 활동하고 있는 어떤 저명한 미술평론가에게 히틀러의 그림을 보여주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물론 히틀러가 그렸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고 그림에서 히틀러의 서명도 가리고 보여주었다. 그 평론가는 '상당히 관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물화를 보고서는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이 도무지 없는 모양이다'라고 덧붙여 말했다. '히틀러의 수채화'(The Water Colors of Hitler)라는 논문이 있는데 프라텔리 알리나리라는 저자는 히틀러의 수채화에 대하여 '화가로서 냉혹하고 모질며 공포심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한 작품들'이라고 논평했다. 평론가들은 예언자를 겸해야 했던 모양이다.


히틀러가 그린 여인 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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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정치도구로 사용하다


히틀러는 화가가 되려는 야망을 1914년 8월에 군대에 입대하느라고 일단 접어 두어야 했다. 그후로 잘 아는 대로 히틀러는 2차 대전의 막바지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정치 인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미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런 그는 예술을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엉뚱한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1937년 7월부터 11월까지 뮌헨에서는 나치당이 주관하여 '퇴폐 미술 전시회'(Entartete Kunst: Degenerate Art Exhibition)가 열렸다. 독일 국민들에게 현대미술이란 것이 얼마나 퇴폐적인가를 교육하기 위해 마련된 전시회이다. 나치가 규정한 퇴폐적인 현대미술이란 구체적으로 바우하우스(Bauhaus), 큐비즘(Cubism), 다다이즘(Dadaism), 표현주의(expressionism), 포비즘(Fauvism), 인상주의(Impressionism), 뉴 오브젝티비티(New Objectivity), 초현실주의(Surrealsim)를 말한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고전주의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난 받아서 마땅한 미술분야라는 것이었다. 나치는 뮌헨의 한쪽에서 '퇴폐미술전시회'를 여는 중에 다른 한쪽에서는 '위대한 독일미술전시회'(Great Germany Art Exhibition)를 열었다. 미술이란 이래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독일의 전통적인 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그 중에는 히틀러의 작품도 하나인지 둘인지 전시되었다. '퇴폐미술전시회'에는 대단한 인파가 몰렸다. 6주 동안 계속된 전시회에 무려 1백만명 이상이 방문하였다. 독일의 각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던 작품들 중에서 나치가 퇴폐로 인정한 작품 약 650점이 전시되었다. 112명 화가들의 작품이었다. 히틀러는 간혹 유태계 볼셰비키주의자들을 독일의 적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나치가 주선한 퇴폐미술전시회의 112명 작가들 중에서 유태계 화가는 단 6명뿐이었다. 그러므로 유태계 볼셰비키주의자들의 작품이 퇴폐적이라고 묶어서 비난한 것은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나치가 주장하는 이른바 '나치미술'이란 것은 인종적으로 순수해야 하며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쉬어야 하고 독일 민족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했다.


1937년 뮌헨의 퇴폐미술 전시회장.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 들었다. 마치 보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할 것 같아서 비가오는 날에도 줄을 서서 관람 차례를 기다렸다. 전시장 내부는 조잡했다. 나치가 퇴폐 미술작품이라고 간주한 그림, 조각들을 촘촘히 전시해 놓았다. 작품 설명은 허술한 종이에 아무렇게나 적어 놓았다. 그래서 간혹 엉뚱한 설명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1937년 뮌헨의 퇴폐미술전시장을 찾은 히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