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호주를 빛낸 스타 조앤 해몬드(Joan Hammond)

정준극 2010. 10. 22. 10:23

오스트레일라의 조앤 해몬드(Joan Hammond)

윈저성의 성조지채플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다

 

새라 하디가 쓴 조앤 해몬드: 사랑과 음악 커버

 

뉴질랜드 및 오스트레일리아 소프라노인 조앤 해몬드는 영국 왕실로부터 귀부인(DBE)의 칭호를 받은 성악가, 골프 선수, 오페라 감독, 성악교사라는 화려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다. 뉴질랜드 성악가라고 한 것은 그가 뉴질랜드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며 오스트레일리아 성악가라고 한 것은 생후 6개월만에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조앤 해몬드의 풀 네임은 조앤 힐다 해몬드(Joan Hilda Hammond)이다. 1912년 5월에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쳐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뮈엘 후드(Samul Hood)는 영국에서 태어났다. 사뮈엘 후드는 에드스라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얼마후 후드는 뜻한바 있어서 부인 에디스를 떠나서 힐다 블랜드포드(Hilda Blandford)라는 여인과 동거하기 시작했다. 동거라고 한 것은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영국에서 이미 두 아들까지 두었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름에 Hammond(해몬드)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공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Mr & Mrs Samuel H Hammond 라는 명함을 찍어서 돌리며 다녔다. 남의 족보를 자꾸 캐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무언지 영화와 같은 스토리이다.

 

사뮈엘과 힐다 부부는 새 생활을 꿈꾸며 영국을 떠나서 뉴질랜드로 왔고 얼마후 조앤을 낳았다. 그리고 조앤이 6개월 되었을 때 가족들은 호주의 시드니로 이사를 갔다. 사뮈엘과 힐다는 결국 그로부터 15년 후에, 즉 조앤이 15살 되던 해에 공식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사뮈엘의 첫 번째 부인인 에디스가 세상을 떠났다든지 또는 두 사람이 정식으로 이혼을 했다든지 하는 기록은 없다. 조앤은 시드니에서 핌블여대(Pymble Ladies College)를 다녔다. 음악도 잘했지만 스포츠도 잘했다. 친구들은 조앤을 햄(Ham)이라고 불렀다. 돼지고기로 만든 햄? 해몬드를 줄여서 그렇게 불렀다. 사실 해몬드라는 이름은 조앤의 아버지가 그냥 그럴듯해서 붙인 이름일 뿐인데 그것이 정식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조앤은 핌블을 거쳐 시드니에 있는 ‘뉴 사우스 웨일스 주립음악대학’에 들어가 성악과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비아올린 실력도 상당하여서 졸업후 3년동안 시드니교향악단의 바이올린 멤버로 활동했다. 그런후 1936년 비엔나로 대망의 유학을 떠났다.

 

조앤 해몬드

 

조앤은 대단한 골프선수였다. 1929년 뉴 사우스 웨일스 챔피언쉽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1932, 1932, 1935년 연속으로 챔피언상을 받았다. 골퍼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조앤은 사람들이 골프공을 들고 와서 사인을 해 달라고 하면 Joan Hood Hammond라고 써주었다. 사람들이 ‘해몬드 가문이십니까?’라고 자꾸 묻는 바람에 대답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여 Hood라는 오리지널 가족의 이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조앤이 고우리 부인(Lady Gowrie)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고우리 부인은 뉴 사우스 웨일스 주지사인 고우리 경(Lord Gowrie)의 부인이었다. 고우리 부인은 젊은 조앤의 유럽 유학이라는 꿈을 실현시켜준 고마운 분이었다. 나중에 조앤은 고우리 부인을 ‘나의 수호천사’라면서 잊지 않고 존경심을 보였다. 고우리 부인은 나중에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윈저성의 세인트 조지 채플에서 거행되었다. 조앤이 조가를 불렀다. 여자로서 세인트 조지 채플에서 노래를 부른 것은 조앤이 처음이었다.

 

조앤은 비엔나에서 공부를 마치고 런던으로 가서 디노 보르지올리(Dino Borgioli)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로부터 조앤은 전문 성악가로서 세계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조앤은 특히 푸치니의 역할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조앤은 코벤트 가든을 비롯하여 비엔나의 슈타츠오퍼, 밀라노의 라 스칼라,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 등 세계 유명 오페라극장에 출연하였다. 그러나 조앤의 명성은 그가 취입한 푸치니의 ‘자니 스키키’중에서 O mio babbino caro 때문이었다. O My Beloved Father라는 영어 타이틀로 취입하였는데 1969년 골드 레코드 상을 받았다. 드보르작의 루살카 중에서 O, Silver Moon 을 취입한 것도 대단한 판매를 기록하였다. 조앤의 레퍼토리는 베르디, 헨델, 차이코브스키, 마스네, 베토벤에 국한하지 않고 민요, 예술가곡, 독일가곡까지 폭이 넓었다.

 

조앤 해몬드 묘비

 

조앤은 영국에 거처하면서 간혹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였다. 1957년에 엘리자베트극장의 오페라 시즌에 참여한 것은 그 중의 하나였다. 조앤은 1946년부터 961년까지 세계연주여행을 다녔다. 1965년 심장질환으로 무대에서 은퇴한 그는 빅토리아주립오페라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했고(1971-76), 빅토리아예술대학 성악자문이 되어(1975-1992) 후진들을 양성했다. 1970년에는 자서저인 A Voice, a Life가 발간되었다.

조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오페라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Australian Opera와 Victoria State Opera를 후원하고 지도하였다. 조앤 해몬드는 영국 왕실로부터 음악에 대한 기여로 DBE(Dame of British Empire)라는 칭호를 받았다. 조앤은 1996년 향년 84세로 호주의 뉴 사우스 웨일스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