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오스트랄리아의 플로렌스 오스트랄

정준극 2010. 8. 9. 17:56

오스트랄리아의 플로렌스 오스트랄 (Florence Austral)

1920년대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

 

플로렌스 오스트랄. 1929년.

 

오스트랄리아 출신으로 1920-30년대에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소프라노 플로렌스 오스트랄(1892-1968)의 원래 이름은 플로렌스 메리 윌슨(Florence Mary Wilson)이지만 조국인 오스트랄리아를 생각하여 이름을 오스트랄로 바꾼 당대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였다. 플로렌스 오스트랄은 1900년대 초반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바그너 소프라노였지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비엔나의 슈타츠오퍼, 그리고 메트로폴리탄의 무대에는 한번도 등장하지 못하였다. 플로렌스 오스트랄은 노르웨이 출신의 크리스텐 플라그스타트가 세계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로서 각광을 받기 직전에 활동했던 당대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였다. 당시 그의 음성은 너무나 순수하고 청아하여서 다른 어떤 바그너 소프라노들은 도저히 필적할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아마도 당대에 플로렌스 오스트랄에 견줄만한 바그너 소프라노로서는 제르맹 뤼뱅(Germain Lubin) 이나 프리다 라이더(Frida Leider) 정도였다. 플로렌스 오스트랄이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로서 찬사를 받고 있을 때 크리스텐 플라그스타드는 신인이었다.

 

오스트랄은 호주 빅토리아주의 리치몬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웨덴 이민자로서 목수였고 어머니는 역시 스웨덴 출신으로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만들던 여자였다. 오스트랄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목공소를 경영하였다. 어머니 헬레나는 오스트랄이 11살이었을 때 무려 28세 연하의 시리아 출신 회계사인 존 화와즈(John Fawaz)와 재혼하였다. 그래서 플로렌스 오스트랄도 한때 플로렌스 화와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랄의 성악적 재능은 멜버른에 있는 웨슬리감리교회의 성가대지휘를 맡았던 에드워드 서그든 목사님이 발견하였다. 현재의 만국교회(Church of All Nations)이다.

 

브륀힐데 역의 오스트랄

 

1914년 서그든 목사님은 오스트랄에게 호주에서는 알아주는 발라라트(Ballarat) 성악경연대회에 출전하라고 권면하였다. 오스트랄은 소프라노 부문과 메조소프라노 부문의 두 부문에서 1등상을 받았다. 그래서 장학금을 받아 유명한 성악교사인 엘리제 비더만으로부터 레슨을 받을수 있었다. 1919년, 오스트랄은 21세 때에 청운의 뜻을 품고 뉴욕으로 향하였다. 오스트랄의 음성은 뉴욕의 음악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메트로폴리탄에서 계약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나 오스트랄은 메르토폴리탄의 제안을 거절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그후 오스트랄은 전생애를 통하여 메트로폴리탄의 무대에 설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오스트랄은 런던에서 당대 최고의 베이스인 로버트 라드포드(Robert Radford)의 지도와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2년 오스트랄은 드디어 코벤트 가든에서 발퀴레의 브륀힐데를 맡아 바그너 소프라노로서 데뷔를 하였다. 당시 오스트랄과 함께 출연했던 바그너 소프라노는 프리다 라이더였다. 프리다 라이너의 음성은 오스트랄에 비하여 순수성이 결여되었다고 하지만 다만 무대에서 라이더의 연기력이 더 훌륭하여서 더 인기를 끌었다. 그후 오스트랄은 코벤트 가든에서 이졸데, 아이다를 맡아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서 더 할수 없는 찬사를 받았다.

 

1923년에 오스트랄은 역시 호주 출신의 전설적인 소프라노인 넬리 멜바와 함께 무대에 등장하였다. 멜바는 오스트랄에 대하여 '그의 음성은 세계적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멜바는 오스트랄의 음성이 특히 고음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어찌된 일인지 지휘자 브르노 발터는 오스트랄을 싫어하였다. 발터는 오로지 멜바만을 치켜 세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오스트랄은 더 이상 세계의 무대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영국국립오페라단과 코벤트 가든에서 지내야 했다. 하지만 오스트랄은 당시 유행처럼 되었던 음반 취입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플로렌스 오스트랄

 

오스트랄은 920년대에 HMV 회사와 함께 100회 이상의 레코드 취입을 하였다. 그때 만들었던 음반은 아직도 많은 음악에호가와 레토드 수집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스트랄은 오페라 아리아 뿐만아니라 가곡과 성가, 오라토리오 발췌곡도 취입하였다. 러시아 출신의 베이스 훼오도르 샬리아핀과의 듀엣 레코딩은 최상의 음반으로 꼽히고 있다. 오스트랄은 미구엘 플레타(Miguel Fleta), 튜도르 데이비스(Tudor Davies), 월터 위봅(Walter Widdop)등과도 레코딩을 하였다. 오스트랄은 영국에서 처음으로 영어로 링 사이클을 취입한 소프라노였다.

 

1925년 오스트랄은 유명한 플륫주자인 존 아마디오(John Amadio)의 두번째 부인이 되었다. 이후 오스트랄은 미국, 유럽, 호주를 여행하며 연주회를 가졌다. 미국에서는 필라델피아에서 프릿츠 라이너의 지휘로 링 사이클의 아리아를 불러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메트로폴리탄에서 바그너의 오페라에 출연할 기회는 한번도 갖지 못했다. 뿐만아니라 바이로이트 음악제와 비엔나 슈타츠오퍼에도 한번도 출연하지 못했다. 비엔나에서의 출연은 거의 성사될뻔하였으나 결국 계약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는 큰 역할을 맡아하였다. 1930년의 일이었다.

 

토스카역의 플로렌스 오스트랄

 

그러나 오스트랄에게도 뜻하지 아니한 불행이 찾아왔다. 베를린에서 바그너의 발퀴레를 공연하던 기간에 동맥경화증이 발견되어 고통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오스트랄의 상대역은 유명한 베이스인 프리드리히 쇼르(Friedrich Schorr)였다. 쇼르는 무대에서 오스트랄가 갑자기 힘들어 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감싸듯 보호아여 무대 뒤로 데려가서 쉬게 하였다. 그후 오스트랄은 더 이상 오페라 무대에 서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리사이틀이나 콘서트는 계속하였다. 오스트랄은 1934-35년에 베이스 월터 위돕과 함께 호주에서 순회연주회를 가졌지만 예전과는 다른 순수하고 힘에 넘친 청아한 음성을 듣기는 어려웠다.

 

1939년 오스트랄은 영국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고 따듯하게 맞아 주었다. 오스트랄은 주로 런던에서 2차 대전을 위한 여러 자선음악회에 참가하여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였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져서 결국 1940년에 무대에서 은퇴할수 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랄은 고향인 오스트랄리아로 돌아왔다. 그때 쯤해서 오스트랄은 중풍으로 팔다리가 거의 마비상태였다. 이제 오스트랄은 더 이상 레코딩으로 로열티를 받는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1954년, 오스트랄은 뉴캐슬대학교의 음악원에서 성악 레슨을 할수 있게 되어 겨우 생활을 연명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병세 때문에 계속할수 없었다. 오스트랄은 1959년에 음악원에서 은퇴하였다. 그후 거의 10년동안 오스트랄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스트랄은 1968년 5월 15일 뉴캐슬의 메이필드에 있는 어떤 교회의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였다. 남겨놓은 재산도 없었다. 하지만 플로렌스 오스트랄의 이름은 세계 오페라계에서 전설적은 바그너 소프라노로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그가 취입한 레코드를 지금 들어보아도 그의 음성이 얼마나 청아하고 순수하며 힘이 있었는지는 당장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