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헨리에트 손타그(Henriette Sontag)

정준극 2010. 10. 23. 23:00

헨리에트 손타그(Henriette Sontag)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초연의 소프라노 솔리스트

 

 

소프라노 헨리에트(앙리에트) 손타그는 1823년 베버의 오페라 오이리안테(Euryanthe)의 세계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환희의 송가' 초연에서 소프라노 솔로이스트를 맡았고 이어 베토벤의 장엄미사곡 초연에서도 솔로이스트를 맡아 음악사에 영원히 기록된 독일의 소프라노이다. 헨리에트 손타그는 1806년 독일 라인강변의 코블렌츠에서 배우의 딸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거트루데 발푸르기스 존타그(Gertrude Walpurgis Sonntag)이었으나 성악가로서 활동하면서 헨리에트 손타그(Henriette Sontag)로 이름을 바꾸었고 나중에 결혼하여서는 로씨 백작부인(Contessa Rossi)으로 알려졌었다. 손타그는 어릴 때부터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이미 15세 때에 공식 석상에서 노래를 불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손타그는 프라하음악원에서 성악공부를 했으며 1823년, 16세 때에 라이프치히에서 공연된 베버의 '마탄의 사수'에서 아가테를 맡았고 이어 같은 해에 비엔나에서 베버의 '오이리안테' 초연에서 주역을 맡아 유럽 오페라계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인물이 되었다. 그로부터 손타그의 이름은 전독일에 알려지게 되어 오페라에 데뷔한 이듬해인 1824년, 18세의 소녀로서 베를린의 쾨니히슈태터극장에 진출할 정도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존타그로 발음해야 하지만 스펠을 Sonntag에서 Sontag로 바꾼 이후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손타그로 발음하게 되어 여기서도 손타그로 표기합니다. Henriette는 프랑스에서 지낼 때에 붙인 이름으로 프랑스에서는 앙리에트라고 부른다.]

 

 

'오이리안테'의 초연으로 비엔나와 인연을 맺은 손타그는 베를린의 쾨니히슈태터극장과 전속계약을 맺기 직전에 비엔나에서 있었던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의 초연에서 소프라노 솔로이스트를 맡았으며 이어 '장엄미사곡'의 초연에서도 소프라노를 맡아 놀라운 찬사를 받았다. 손타그는 1825년에 베를린 무대에 데뷔하였고 1826년에는 파리에, 1828년에는 런던에 데뷔하여 미모와 함께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특히 파리에서는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 역을 맡아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의 기량을 아낌없이 보여주어 파리 음악계를 놀라게 하였고 이어 카탈라니의 '라 왈리'(La Wally)에서도 찬란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런던에서는 유명한 오페라기획가인 메이플슨 대령과 함께 지방순회 공연도 가졌다.

 

  

손타그는 1827년 파리의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에 소속되어 있을 때에 사르디니아 대사인 로씨 백작의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하였다. 손타그가 21세 때였다. 그로부터 손타그는 로시백작부인으로 불려졌다. 손타그는 유럽의 거의 모든 유명 극장에 출연하였다. 그리고 3년후인 1830년에는 갑자기 은퇴를 선언하고 일체의 오페라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특히 미국의 초청은 집요하였다. 그는 마침내 1852년 미국을 방문하여 프랑스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카르밀라 우르소(Carmilla Urso: 1842–1902)와 함께 연주회를 가졌다. 손타그는 1854년 멕시코의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공연을 위해 멕시코에 갔다. 손타그는 이곳에서 시인 프란치스코 곤잘레즈 보카네그라가 가사를 붙인 멕시코 국가를 처음으로 멜로디를 붙여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멕시코 국가(國歌)이다. 그로부터 한달후 손타그는 콜레라에 걸려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손타그의 마지막 무대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6일전, 도니제티의 '루크레지아 보르지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