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에피소드

[참고자료] 메이플슨 대령

정준극 2010. 10. 23. 09:51

[참고자료]

메이플슨 대령(Colonel Mapleson)은 어떤 사람인가?

James Henry Mapleson

 

메이플슨 대령 

 

오페라의 연혁을 언급하면서 메이플슨 대령의 이야기를 빼놓을수는 없다. 메이플슨 대령은 오페라 역사상 가장 열심히 활동한 임프레사리오, 즉 흥행가 겸 기획가라고 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런던과 뉴욕에서 활동했다. 이를 통하여 수많은 오페라 성악가들이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였다. 그의 기획을 거쳐 나간 유명 오페라 성악가들로서는 드 무르스카(De Musrka), 마리오(Mario), 줄리아 그리시(Giulia Grisi), 크리스티나 닐쓴(Christina Nilsson), 이탈로 캄파니니(Italo Campanini) 등 헤아릴수 없다.

 

메이플슨 대령이라고 더 잘 알려진 제임스 헨리 메이플슨(James Henry Mapleson)은 1830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왜 그를 대령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그는 원래 음악을 전공했지만 훗날 군대에 들어가 복무를 하다가 대령으로 제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페라계에서는 제임스 헨리 메이플슨이라는 이름보다는 커널 메이플슨, 즉 메이플슨 대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메이플슨은 음악가가 되려는 꿈을 품고 런던의 왕립음악원에 들어가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음악원을 나온 그는 런던의 어떤 극장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했다. 그는 사업 능력이 뛰어났었다. 이미 19세의 청년 시절에 연주단(Concert company)을 조직하여 영국 각 지방을 순회공연하였다. 이때에 그는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소프라노 헨리에트 손타그(Henriette Sontag), 테너 루이지 라블라셰(Luigi Lablache), 피아니스트 지기스몬트 탈버그(Sigismond Thalberg) 등을 섭외하여 함께 지방순회 공연을 가졌다. 이듬해인 1850년에는 유명한 메조소프라노인 폴랭 비아도르(Pauline Viadort)도 메이플슨의 지방순회 공연에 합세하였다. 우리로서 보면 MBC 전국순회 가곡의 밤이나 비슷하 기획이었다.

 

소프라노 헨리에트 손타그

 

하지만 음악회를 주관하는 것이 원래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는 24세의 청년시절에 이탈리아의 베로나로 성악 유학을 가서 엔리코 마리아니(Enrico Mariani)에게 사사했다. 그해에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말하자면 귀국독창회를 개최하여 바야흐로 전문 성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로 인하여 더 이상 노래를 부를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음악회 기획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26세 때인 1856년, 런던 최초의 음악기획사를 설립하여 발프(Balfe)의 '보헤미아 소녀'(The Bohemian Girl: La Boheme)의 영국 초연을 이루어냈다. 그러다가 큰 극장에서 경력을 쌓아야 겠다고 생각하여 헤이마켓 극장(Haymarket Theater)에 들어가 부지배인으로 일하다가 지배인인 스미스(E.T. Smith)가 은퇴하자 그 자리를 물려 받아 주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활동을 했다.   

 

 

윌리엄 발프의 그랜드 오페라 '보헤미안 걸'(집시 소녀)의 포스터 

 

얼마후 그는 리세움(Lyceum)극장의 지배인이 되었다. 그리고 첫해에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를 무대에 올렸고 이어 '가면무도회'의 영국 초연을 주관하였다. 두 편 모두 소프라노 테레스 티티엔스(Therese Tietjens)가 주역을 맡았다. 그로부터 티티엔스는 은퇴할 때까지 메이플슨의 동료로서 무대에 섰다. 당대의 아델리나 패티(Adelina Patti)도 메이플슨의 공연에 참여하였다. 메이플슨은 1862-67년간에 여왕폐하극장(Her Majesty's Theater)의 지배인으로 활약하며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여왕폐하극장은 1868년에 화재로 전소되었고 나중에 메이플슨이 재건사업의 책임자가 되어 1877년 재개관하게 되었다. 에이플슨은 여왕폐하극장이 사라지자 드러리 레인(Drury Lane)의 왕립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에 이탈로 캄파니니(Italo Campanini: 1845-1896)가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캄파니니는 평생을 메이플슨과 함께 오페라 활동을 하였다. 그후 메이플슨은 드러리 레인 극장과 코벤트 가든의 연합을 이루어 공동공연을 주선하였다.

 

테너 이탈로 캄파니니

 

메이플슨은 1875년에 전용 오페라극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테임스 강변에 새로운 국립오페라극장을 건설키로 했다. 하지만 건설사업은 재정난으로 중단될수 밖에 없었다. 얼마후 런던경시청(Scotland Yard)가 메이플슨의 오페라극장 부지를 매입하여 경시청 청사를 완성하고 입주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유명한 런던경시청 건물이다. 공교롭게도 런던경시청 건물이 완성되던 해에 메이플슨은 여왕폐하극장을 완성하였다. 여왕폐하극장을 완성한 그는 새로 오페라단을 조직하여 대망의 미국순회공연에 들어갔다. 뉴욕으로 자리를 옮긴 메이플슨은 뉴욕의 음악아카데미극장에서 비제의 카르멘의 미국초연을 주관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메이플슨은 1878년부터 1886년까지 8년동안 미국 각지를 순회공연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던 차에 뉴욕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가 새로 건설되었다. 음악아카데미극장은 메트의 라이벌이 되기에도 어려웠다. 메트는 든든한 재정으로 당대의 성악가들을 거느리는 대극장으로 발전하였지만 메이플슨은 소속 성악가들의 월급도 제대로 주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결국 메이플슨은 1887년 파산하여 오페라단을 해산하였다.

 

메이플슨은 오페라 소프라노인 마리 로즈(Marie Roze: 1846-1926)와 결혼하였다. 마리 로즈의 원래 이름은 마리-히폴리트 폰신(Marie-Hippolyte Ponsin)으로 메이플슨과는 두번째 결혼이었다. 메이플슨의 동생인 알프레드 메이플슨은 런던에서 빅토리아여왕의 음악비서 겸 사서로서 봉직하였다. 삼촌인 라이오넬 메이플슨(1865-1837)은 미국에 와서 메트의 바이올린 단원으로 활동했다. 라이오넬은 발명가이기도 하여 이른바 메이플슨 실린더라고 하는 축음기를 개발하여 음악사에 이름을 남겼다. 메이플슨은 1901년 브라이트병(신장염의 일종)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였다. 그는 The Mapleson Momoirs라는 비망록을 남겼다. 뉴욕에서 발간된 이 책은 19세기 오페라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마리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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