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오페라 성악가 일화

[참고자료] 애스터 플레이스 폭동

정준극 2010. 11. 1. 14:37

[참고자료]

애스터 플레이스 폭동(Astor Place Riot)

 

미국 극장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고는 1849년 뉴욕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연극배우가 서로 지나친 라이발 의식 때문에 일어난 참사였다. 미국의 연극배우 에드윈 포레스트(Edwin Forrest)와 영국의 연극배우 윌리엄 챨스 매크레디(William Charles Macready)의 라이발이 발단이었다. 하지만 영국이라고 하면 절절 매는 모영주의 상류층, 그리고 하루하루를 힘들게 사는 서민 노동자들간의 격차와 갈등이 근본원인이라고 볼수 있다. 이 참사로 인하여 무려 23명이 죽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건은 1849년 5월 10일 저녁으로 돌아간다. 약 1만5천명이나 되는 엄청난 군중이 애스터 오페라 하우스의 밖에 모였다. 이들은 영국의 셰익스피어 배우인 매크레디의 뉴욕 공연을 반대하기 위해서 몰려왔다. 매크레디(1793-1873)는 영국 귀족의 심볼이었다. 그런고로 뉴욕의 상류층이라는 사람들은 당연히 매크레디의 후원자들이었다. 당시 대개의 영국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크레디도 미국 사람들을 은근히 경멸했다. 촌스럽고 교양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매크레디가 뉴욕에 와서 연극공연을 하게 되었으니 그러지 않아도 영국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안방에 앉아서 맥주나 마시면서 가만히 있을수만은 없었다.

 

1849년 5월 10일의 뉴욕 애스터 오페라 하우스 폭동사건. 군대가 동원되어 시위군중에게 발포하였고 일부 상류층 인사들은 서민들로 구성된 폭도들을 규탄하고 있다.

 

메크레디와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 배우인 미국 출신의 포레스트(1806-1872)가 뒤에서 매크레디 반대데모를 사주했다.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계층인 노동자 들이 대부분이었다. 군중들은 도로를 포장한 돌을 빼내어 애스터 오페라 하우스에 던졌다. 돌덩어리들이 비오듯 떨어져 유리창들이 깨지고 기물이 파손되었다. 극장 측은 위협을 느끼고 경찰을 불렀다. 경찰이 나타나자 군중들은 더 난폭해졌다.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경찰들이 부상을 당했다. 결국 주방위군이 동원되었다. 총성이 멎었을 때 23명이 죽어넘어져 있었다. 1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다는 말인가? 단순히 두 배우의 인기다툼이 이런 참사를 불러일으켰단 말인가?당시 두 배우는 서로 다른 극장에서 똑 같이 맥베스를 공연하고 있었다. 어떻게하여 무대 위의 비극이 거리까지 스며 나왔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영국과 미국의 애국적인 감정 싸움이 애스터 오페라 하우스에서 폭발되었다는 말인가?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찬찬히 살펴보자.

 

돌이켜 보아 1826년 매크레디와 포레스트는 같은 시기에 뉴욕의 연극무대에 데뷔하였다. 두 사람의 연기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다. 한마디로 말하여 매크레디는 귀족적인 연기였고 포레스트는 서민적인 연기였다. 매크레디는 좀더 신중하고 전형적인 연기를 펼쳤고 포레스트는 마치 천둥과 번개가 치는 것과 같은 열정적인 연기를 했다. 그래서 관중들도 서로 달랐다. 포레스트에게는 주로 극장의 꼭대기 자리인 갤러리 또는 제일 바닥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고 환호했다. 매크레디에게는 주로 칸막이 좌석에 앉아 있는 점잖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라이벌 의식을 갖고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포레스트가 좀 더 적극적이었다. 영국 놈이 공연히 폼만 재면서 연기한다고 비난을 쏟아 부었다. 매크레디는 그저 참으면서 지내다가 런던으로 돌아갔다.

 

윌리엄 챨스 매크레디

 

그러던중 이번에는 포레스트는가 참사가 일어나기 3년전인 1845년 런던을 방문하여 공연을 가진 일이 있다. 런던 신문은 포레스트의 연기가 형편없었다고 하며 혹평을 아끼지 않았다. 포레스트는 매크레디가 뒤에서 조종해서 그런 비평이 나왔다고 믿었다. 포레스트는 반대펀치를 날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얼마후 두 사람은 에딘버라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물론 공연날짜는 서로 달랐다. 매크레디가 공연하는 날, 포레스트는 2층 객석에 앉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휘파람을 부르며 야유를 보냈다. 매크레디의 팬들이 달려와서 '그만두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포레스트는 '극장에서 배우의 연기를 보고 찬사를 보내던지 야유를 보내던지 하는 것은 관객의 자유인데 당신들이 무엇이관대 나에게 이래러 저래라 하느냐?'면서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아무튼 매크레디의 연극은 포레스트의 줄기찬 훼방과 비난으로 스타일을 크게 구기게 되었다.

 

에드윈 포레스트

 

그러다가 1849년 매크레디가 뉴욕을 방문하여 공연하게 되었다. 메크레디는 신문기자 회견에서 '뉴욕에서 5월 7일 애스터 오페라 하우스 극장에서 맥베스를 공연한다'고 발표했다. 포레스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자기도 기자회견을 갖고 '본인으로 말씀 드리자면 5월 7일에 보워리 극장에서 맥베스를 공연합니다'라고 발표했다. 그날 밤, 일단의 포레스트 극성 팬들이 애스터극장을 찾아가 매크레디의 연극을 구경하는 척 하면서 중간중간에 먹다 남은 음식과 심지어는 돌맹이를 무대 위로 던져 배우들이 얻어 맞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극장 측에서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더니 이번에는 의자들을 집어 던지거나 발코니에서 쓰레기를 내던지는 난리를 피웠다. 공연이 아수라장이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다음날, 매크레디를 지지하는 일단의 유지들이 매크레디에게 사태가 수상하니 이틀쯤 공연을 취소하고 쉬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 중에는 유명한 작가인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도 포함되어 있었다. 매크레디는 그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8일과 9일은 공연을 취소하고 10일에는 마지막 공연을 갖기로 했다. 포레스트 측은 매크레디가 10일에는 다시 무대에 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번에는 아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어서 쫓아버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저드슨(E.Z.C. Judson)이라는 사람이 메크레디 타도 데모를 주도하였다. 저드슨은 일단의 청년들을 이끌고 5월 10일 저녁, 애스터 극장을 공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청년들로 하여금 매크레디를 지지한 인사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공격토록 했다. 저드슨은 뉴욕에서도 알아 모시는 골치아픈 악당이었다.

 

저드슨이 이끄는 일단의 무리들이 손에는 돌맹이와 몽둥이를 들고 애스터 극장을 향하여 행진하자 거리에 있던 일반 시민들도 '심심하던 차에 이게 웬 구경꺼리냐!'면서 데모대에 가담하였다. 데모대는 순식간에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데모대가 애스터 극장에 도착해보니 경찰들이 극장을 둘러싸고 경비하고 있었다. 일설에는 데모대가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극장측이 급히 경찰을 불렀다고도 한다. 아무튼 데모대는 경찰을 보자 더 흥분하여 육탄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숫자적으로 열세여서 후퇴하였다. 극장측은 주방위군의 파견을 요청했다. 일설에는 이미 군인들이 와 있어서 경찰과 함께 극장을 경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데모대들은 해산하기는 커녕 군인들을 향해서 돌진하여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데모대는 군인들이 자기들보다 무장을 잘 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것 같았다. 군인들이 폭도들을 향해서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뉴욕의 사회지도층은 우드헐 뉴욕시장이 과감하게 방위군을 동원하여 폭동을 진압한 것은 참으로 타당한 조치였다고 하면서 지지를 표명했다. 일부 극단적인 시민들은 '아무리 그래도 발포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항의를 했지만 소리가 약해서 별로 들리지도 않았다.

 

애스터 오페라 하우스의 건물은 개축되어 머캔타일 도서관이 되었다.

 

폭동을 주도했던 저드슨은 체포되어 1년형을 받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진짜 주동자는 포레스트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애스터 참사는 참으로 어이없게도 두 연극배우의 개인적인 라이벌 의식 때문에 야기되었지만 후유증은 다른 잇슈로 번졌다. 미국에는 상당수 상류층이 아직도 영국을 마치 주인의 나라처럼 생각하고 있었지만 애스터 참사를 계기로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영국을 원수쯤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서민들은 엘리트 부유층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상류층은 일반 서민들을 더욱 멸시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같은 양극화 현상은 사회 곳곳에서 마찰을 빚었다. 그 예를 들자면 한이 없기 때문에 생략코자 한다. 그러면 애스터 극장은 어떻게 되었는가?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3년후에 결국 문을 닫았다. 뉴욕의 오페라 하우스로서 명성을 떨치며 수많은 디바와 디보들이 무대를 빛나게 했던 애스터는 이렇게 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애스터 극장은 현재 도서관 겸 회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보워리 극장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셰익스피아와 몰리에르의 연극이 사라지고 서민들을 위한 신파조의 연극을 공연하는 극장으로 전락했다. 포레스트는 어떻게 되었나? 얼마 동안은 대중들의 인기를 차지하였으나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 들어 은퇴를 서두르지 않을수 없었다. [사족: 1992년에 리챠드 넬슨이라는 작가가 Two Shakespearean Actors(두명의 셰익스피어 배우)라는 드라마를 썼다. 애스터 극장 사건이 주제였다.]

 

애스터 플레이스 지하철역에 있는 비버 그림. 애스터 플레이스는 비버 가죽 무역으로 돈을 많이 번 존 제이콥 애스터가 처음 설치한 구역이다. 그래서 지하철역의 벽에 비버를 조각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