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오페라 성악가 일화

아델리나 패티(Adelina Patti)

정준극 2010. 10. 30. 21:38

아델리나 패티(Adelina Patti)

아델리나 패티(1843-1919)는 당시 가장 출연료를 많이 받는 소프라노였다. 패티는 공연이 끝나면 우선 출연료부터 챙겼다. 그래서 패티의 별명은 '노래의 여왕'이었지만 '캐쉬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들을 정도였다. 패티는 오페라 무대에 여왕처럼 군림하였다. 전률을 느낄 정도의 찬란한 음성이었다. 여왕이어서 그런지 성격이 대단했다. 아주 괴팍한 면도 많았다. 언제나 최고의 찬사는 자기가 들어야 했다. 패티는 커튼 콜을 무척 엔조이했다. 전성기의 커튼 콜을 잊지 못하는 패티는 은퇴후에 웨일스의 저택에 개인극장을 마련하고 이웃 사람들을 불러 노래를 한후 커튼 콜을 받았다.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가 그린 아델리나 패티. 1863년. 빈터할터는 무도회 드레스를 입은 합스부르크의 엘리자베트 왕비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서 유명하다.

 

페티가 이혼한 사유

패티는 1876년 러시아의 생페터스부르크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날씨가 고약해서 그런지 콘디션이 무척 나빴다. 게다가 알프레도를 맡기로 했던 테너는 사정이 생겨서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그래서 기분도 상해 있었다. 주위에서는 콘더션도 나쁘니 공연을 취소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런데도 패티는 '노래의 여왕'이 그럴수는 없다고 하면서 강행을 주장했다. 1막이 끝났다. 솔직히 말해서 패티는 평소보다 훨씬 못했다. 하지만 무릇 여왕은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패티는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편 마르키스 드 꼬(Marquis de Caux)에게 자기가 1막에서 어떠했느냐고 물었다. '정말 대단했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다. 남편은 솔직히 그날따라 패티의 노래가 별로였지만 그렇다고 패티의 성질을 잘 아는 처지에 느낀 그대로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궁리끝에 딴에는 외교적인 언사를 동원하여 '아주 잘해기는 했지만 나는 지난번이 더 좋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패티는 당장 얼굴색이 변하더니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남편으로부터 '형편없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패티는 심지어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던지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제풀에 지쳐서 쓰러졌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물도 먹이고 팔다리도 주물러 준 후에야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튼 어찌어찌하여 라 트라비아타를 끝내긴 끝냈다. 며칠후 파리에 있는 패티의 변호사가 패티의 남편에게 서류 뭉치를 하나 보내왔다. 이혼서류였다. 이정도였다. 하여튼 소프라노는 못말린다.

 

아델리나 패티. 사진

 

라이발 골탕먹이기

패티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무대에 나가는 디바들은 화장에 무척 신경을 썼다. 특히 속눈섶을 특대짜리로 마련하며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 게다가 옷도 엄청나게 화려한 것을 입기를 좋아했다. 그런점을 감안해서인지 작곡가들도 오페라의 여주인공을 왕족이나 귀족으로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날 패티는 평소 라이벌인 어떤 소프라노와 함게 무대에 서게 되었다. 관례에 따라서 그 소프라노는 짙은 화장에 대단한 속눈섶을 붙이고 대단히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로시니의 영향을 받은 패티는 '디바는 노래로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속눈섶이나 드레스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었다. 마지막 막에서 패티는 라이발 소프라노에게 '어머, 오른쪽 속눈섶이 없네요. 어떻게 하죠?'라고 말했다. 라이발 소프라노는 깜짝 놀라더니 슬며시 뒤로 돌아서서 재빨리 왼쪽에 있는 속눈섶을 떼어냈다. 없는 것을 만들어서 붙이기는 어렵지만 있는 것을 떼어내어 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쉽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원래부터 라이벌 소프라노의 오른쪽 속눈섶은 떨어져 나가지 않고 제대로 붙어 있었다. 라이벌 소프라노는 오페라 내내 한쪽 속눈섶만 달고 무대에 섰던 것이다. 모두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저 참고 있었다. 하여튼 못말리는 디바들의 근성이었다.

 

패티와 게르스터

패티와 헝가리 출신의 에텔카 게르스터(Etelka Gerster)는 음성도 비슷했고 용모도 비슷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더구나 더블 캐스팅의 공연 같으면 하나의 역할을 번갈아 맡는 일도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패티가 게르스터보다 열두살이나 더 많았다. 패티로서는 한참 나이가 어린 게르스터와 같은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기획사들이 그렇게 주선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같은 무대에 섰다. 게르스터도 한 성질 하는 여인이어서 너무 잘난체만 하는 패티가 아니꼬와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선배로서 고분고분하게 대하지 않을수 없어서 참고 지내는 형편이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같은 역할을 맡는 일이 자주 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리골레토의 길다, 몽유병자의 아미나,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람메무어의 루치아에서 루치아, 사랑의 묘약에서 아디나 등에 최적이어서 자주 맡았다. 그러다 보니 서로 경쟁심만 더해갔다. 패티가 루치아를 부른 다음날 게르스터가 루치아를 부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사람들이 두 사람을 비교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미모의 패티이지만 나이만은 속일수가 없어서 게르스터와 비교가 되는 경우에는 항상 마이너스 점수를 먹고 가기 마련이었다.

 

에텔카 게르스터

 

패티와 게르스터가 얼마나 서로 원수처럼 지냈는가 하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아도 잘 알수 있다. 어느때 미국에서 루치아를 공연하는데 게르스터가 커튼 콜에서 패티보다 더 많은 꽃다발을 받았다. 이 모습을 보던 패티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로 가버렸다. 호텔로 가서 잠자코 쉬고 있다면 그나마 말이라도 하지 않겠는데 아무 얘기도 없이 짐을 꾸려서 혼자 기차를 타고 뉴욕으로 가버렸다. 생기기는 그렇지 않은데 정말 한 성질 하는 패티였다.

 

게르스터와 지진

테너 에르네스토 니콜리니(Ernesto Nikolini)는 패티와 게르스터의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적대관계를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에르네스토 니콜리니는 패티의 두번째 남편이었다. 그러므로 패티와 게르스터간의 전쟁이 벌어지면 어쩔수 없이 패티편을 들지 않을수 없었다. 니콜리니는 한술 더 떠서 게르스트가 원래는 마녀인데 마법을 행사하여 패티를 괴롭히고 있다고 자꾸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게르스터의 눈을 보면 얼마나 사악한지 당장 알수 있다고까지 말하였다. 물론 악의가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두 사람의 전쟁을 은근히 즐기기 위해 부추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패티는 게르스터를 점점 마녀로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슨 이상한 일이 생기면 게르스터가 마법을 써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기차가 예고없이 연착을 하는 경우, 패티가 탄 자동차가 다른 자동차와 부딪히는 경우, 식당에서 접시까 깨지는 경우 등등이다. 1884년의 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상당한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다. 호텔에 묵고 있던 메이플슨 대령의 오페라단 사람들은 지진 때문에 겁이나서 모두들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지진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패티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패티는 혼자서 속으로 '게르스터!'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게르스터의 대꾸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패티는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특히 패티가 '홈 스위트 홈'을 부르고 나자 사람들은 그야말로 열광했다. 마침 그자리에는 미주리 주지사도 참석하였다. 노신사인 미주리 주지사는 너무나 감격하여 무대 뒤로 패트를 찾아가 패티를 포옹하고 패티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패티는 철학적이었다. 갑자기 노신사로부터 키스를 선물받은 패티는 '정말로 멋있고 점잖으신 신사분께서, 특히 위대한 주지사께서, 저에게 예고치 않았던 키스를 보내시면 저로서는 거절할 방법이 없답니다. 제가 뭘 어떻게 할수 있겠어요!'라면서 은근히 자랑스럽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어떤 신문기자가 게르스터에게 패티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게르스터는 '남자분이 자기 어머니처럼 생각되는 나이 든 여자에게 키스를 하는 것이 뭐가 잘못 되었나요?'라고 대꾸했다.

 

패티의 전성시대는 지나가다

산이 깊으면 골도 깊다는 말대로 누구든지 전성기가 있으면 쇠퇴기도 있기 마련이다. 1884년 패티는 미국 서부에 대한 순회공연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아카데미 오브 뮤직 극장에서 루치아를 부르도록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패티는 25년전 바로 이 극장에서 바로 루치아로서 미국 데뷔를 하였다. 당시 상대역인 에드가르도는 테너 파스쿠알레 비르뇰리(Pasquale Brignoli)였다. 원래 계획은 바로 그 비르뇰리와 루치아를 공연한다는 것이었다. 아, 그러나 하늘도 무심치 않으시지! 공연 바로 얼마전에 비르뇰리가 세상을 떠났다. 메이플슨 대령의 오페라단은 공연작품을 변경해야 했다. 토마의 마르타를 공연키로 했다. 11월 26일 패티는 마르타를 노래했다. 미국 데뷔 25주년 기념일로부터 이틀 후였다. 청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수많은 사람들이 호텔로 돌아가는 패티의 마차를 횃불을 들고 뒤따랐다. 당시에는 디바를 치하하기 위해 횃불을 들고 극장으로부터 호텔까지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티를 진짜 축하하는 자세가 상당히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흥행주인 메이플슨 대령의 주선으로 박수부대가 동원되었고 이어 횃불부대도 동원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용들을 미리 파악한 음악평론가 헨리 크레비엘(Henry Krehbiel)은 위대한 디바 패티에게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패티의 일부 극성팬들과 함께 호텔 브룬스위크에서 갈라 연회를 베풀기로 했다. 미리 올만한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하지만 부인들이 거의 모두 참여를 꺼려했다. 당시 패티는 첫 남편인 마르키스 드 꼬(Marquis de Caux)와 막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스캔들을 뿌리고 있었다. 점잖은 뉴욕의 상류층 부인들로서는 그런 패티와 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날 밤의 갈라 연회는 그야말로 스택 파티(Stag Party: 남성들만의 파티)였다. 비록 여성들은 한사람도 참석하지 않은 연회였지만 미국에서의 무대생활 25주년을 맞는 패티에게는 만감이 교차하는 모임이었다.

 

돌이켜보건대 패티가 처음 뉴욕에 도착하여 공연을 가졌을 때 흥행주인 메이플슨 대령은 공연이 끝나고 막이 내려지자 일단의 취주악대를 동원하여 무대위에서 행진하며 연주토록 했다. 그리고 천정에서부터 '패티 1859'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내걸리도록 했다. 이날의 행진곡은 취주악대 대장이 패티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것이었다. 25년이 지난 1884년, 메이플슨 대령은 25년 전의 이벤트를 재현하였다. 당시의 취주악대를 소집하여 당시 패티를 위해 작곡한 행진곡을 연주토록 했다. 현수막에는 '패티 1859-1884'라는 글이 커다랗게 써 있었다. 패티는 감회에 젖었다. 그리고 비로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패티는 '여러분의 친절을 마음 속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엎드려 절을 했다. '노래의 여왕'도 은퇴할 때가 되니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갔던 모양이다.

 

뉴욕의 아카데미 오브 뮤직 극장. 수많은 디바와 디보들이 이 극장의 무대를 찬란하게 만들었다. 1890년대. 오래전에 철거되어 지금은 그 자리에 콘솔리데이티드 에디슨 캄페니(Con. Ed. Co.)의 빌딩이 들어서 있다.

 

디바가 디바의 음성을 듣다

독일의 그라마폰이 패티의 노래를 레코드에 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패티는 여러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우선 스튜디오가 아니라 자기 집에서 취입할것,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다시말하여 콘디션이 좋아고 생각되는 시간에 취입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라마폰의 제작진은 크레이그 이 노스(Craig-y-nos)에 있는 패티의 집에 가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나절이 되었는데도 패티는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패티는 대신 제작진들에게 샴페인과 함께 저녁을 대접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고서야 겨우 레코딩을 할수 있었다. 그런데 역시 나이는 속일수 없었다. 그때 패티는 61세였다. 취입은 하였지만 음성이 그게 아니었다. 그래도 당대의 패티가 아니던가! 그라마폰은 일단 제작한 레코드이므로 크게 선전하여 판매코자 했다. 상점마다 '패티가 오늘 이곳에서 노래를 부릅니다'(Patti is singing here today)라고 써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코드는 잘 팔리지 않았다. 레코드를 들어본 사람들은 '이게 아닌데..'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레코드 상점에 나왔다가 자기가 취입한 음반을 처음으로 직접 들어본 패티는 '아, 이젠 나도 패티가 누구였는지 알수 있다. 무슨 음성이 이렇단 말인가! 무슨 예술가가 이렇단 말인가!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