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오페라 성악가 일화

미니 호크(Minnie Hauk)

정준극 2010. 11. 1. 21:40

미니 호크(Minnie Hauk)에 대한 일화

 

미니 호크(또는 미니 하우크: 1851-1929)는 유럽 출신 디바들이 세계를 주름잡던 시대에 미국 출신으로서는 유일하게 세계무대에 우뚝선 존재였다. 소프라노로 시작하여 메조소프라노로서 정상에 오른 미니 호크는 미국 최초의 카르멘이었다.

 

미니가 비제를 만나다

미니 호크는 1860년대 후반에 성악에 대한 능력을 더욱 높이기 위해 파리에 가서 지낸 일이 있다. 어느날 저녁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의 저택에서 열린 예술가들의 모임(수아레)에 참석한바 있다. 작가이며 시인인 고티에(1811-1872)는 나중에 발레곡으로 유명한 지젤(Giselle)을 썼으며 발레작품인 지젤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발레리나 칼로테 그리시를 사모하였으나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그의 여동생으로 성악가인 에르네스틴 그리시와 결혼한 인물이다. 이날 저녁 수아레(Soiree)에는 알렉산더 뒤마(아들), 알퐁스 도데, 르낭(Renan), 성악가인 마틸데 마르케시, 작곡가인 다니엘 오버(Auber) 등 당대의 영향력있는 예술가들이 참석하였다. 고티에는 미니에게 '우리 모두 그대의 아름다운 음성을 듣고자 여기 모였으니 바라옵건대 우리를 허물하지 마시고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아직 20대에도 이르지 못한 젊은 미니로서는 큰 영광이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미니는 피아노 반주도 없이 어떻게 노래를 부르냐면서 짐짓 사양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 참석한 어떤 젊은이가 피아노 반주를 해 주겠다고 나섰다. 미니는 그 청년의 반주에 맞추어 정성을 다하여 노래를 불렀다. 모두들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대성할 성악가라고 입을 모았다. 얼마후 과연 미니는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노래를 부른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으며 뉴욕에 돌아온 이후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성악가가 되었다. 특히 미니는 비제의 카르멘의 미국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때는 이미 비제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비제는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의 카르멘 초연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미니는 그런 것을 생각하여 생전에 비제를 한번만이라도 만나보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만일 파리에 있을 때 비제를 만났더라면 카르멘을 더욱 잘 이해하여 미국 초연을 한층 빛나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성악가 매니저로 유명한 모리스 슈트라코슈(1825-1887)에게 했더니 그는 '아니, 전에 파리의 고티에 선생님 저녁 모임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준 그 청년이 바로 비제였는데...'라고 말해주었다. [사족: 황제나 국왕의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영어로 Command Performance라고 한다. 이 말은 가장 완벽하고 훌륭한 연주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카르멘 미국 초연에서의 미니 호크 

 

캐슬린 매버닌과 어전연주(御前演奏)

미니는 상당기간을 비엔나에 본거지를 두고 유럽 여러나라에서 활동한바 있다. 미니는 베를린 황실이 가장 총애하는 성악가였다. 베를린에서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는 빌헬름 황제가 직접 참석하는 경우도 여러번 있었다. 황제가 참석하는 오페라 공연에서는 황제가 박수를 치기 전에는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한편, 당시에는 만일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공연하게 되면 유명한 성악 레슨 장면에서 로지나가 아리아를 부른후 앙코르를 받는 것도 관례였다. 그러면 미니는 보통 영어로 된 노래를 불렀다. 미국 출신의 성악가가 독일 오페라 극장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은연중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주로 남북전쟁 때 남부의 노래인 Kathleen Mavourneed(내사랑 캐슬린)을 불렀다. 프레데릭 크라우치(Frederick Crouch)가 작곡한 아일랜드 노래였다. 그런데 황제는 미니가 보고 싶어서인지 미니의 사흘 공연에 계속 참석하였다. '캐슬린 매버닌'을 두번이나 부른 미니는 사흘째 밤에는 다른 노래를 불러서 황제를 즐겁게 해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리 반주자에게 포스터의 '스와니 강'(Swanee River)를 부르겠으니 준비하라고 말했다.

 

프레데익 크라우치가 작곡한 '캐슬린 매버닌'을 왈츠로 편곡한 악보의 표지

 

로지나와 백작의 성악 레슨 장면이 끝나자 과연 앙코르를 요청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미니는 무대 뒤에 대기하고 있던 스피넷(초기 피아노)을 가지고 나오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가 앉아 있는 로열박스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무슨 급박하고 큰 문제나 생긴듯 서둘러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후 시종장이 무대 위의 미니에게 소리쳤다. '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라 프로일라인 하우크는 마땅히 캐슬린 매버닌을 노래해야 합니다'라는 것이었다. 프로일라인 하우크는 미쓰 미니를 말한다. 미니는 어쩔수 없이 또다시 '캐슬린 매버닌'을 노래했다. 황제는 즐거워서 손벽까지 쳤다. 이후 사람들은 '캐슬린 매너닌'이라고 하면 미니 호크를 생각했다.

 

미니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던 독일제국의 빌헬름2세 황제. 통치기간은 1888-1918년으로 독일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돈 호세를 조심하라

미니는 카르멘의 연기를 대단히 실감있게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어느때 미니는 메이플슨 대령이 기획한 '카르멘'에서 테너 루이지 라벨리(Luigi Ravelli)와 함께 공연하게 되었다. 특히 3막에서 호세와 에스카미요가 결투를 하는 장면에서 카르멘이 호세를 붙잡고 '제발 떠나 달라'고 애절하게 간청하는 장면에서 그러했다. 이때의 미니의 연기는 그야말로 열렬하였다. 그날은 더구나 그러했다. 미니는 라벨리에게 달려 들어 옷을 붙잡고 매달렸다. 라벨리는 그것이 싫었다. 비교적 육중한 몸매의 미니가 너무 매달리는 바람에 멋있는 고음을 제대로 낼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붙잡히지 않으려고 미니를 뿌리치곤 했지만 그날따라 미니의 연기는 너무나 열렬하여서 도저히 떨쳐 버릴수가 없었다. 결국 라벨리의 저고리 단추들이 뜯어지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라벨리는 너무나 화가 나서 대사에도 없는 말인 Lassez-moi! Lassez-moi!(나를 놓아달라! 놓아달라!)고 소리쳤다. 라벨리가 화난 얼굴로 놓아달라고 소리치자 그제야 미니는 저만치 떨어졌다. 라벨리는 청중들을 향하여 Regardez! Elle a dechire on gilet!(보세요! 저 여자가 내 단추들을 뜯어 버렸습니다)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그것도 연기의 일부인줄 알고 박수를 보냈다. 3막이 끝나고 휴게시간이 되었다. 미니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혹시나 라벨리가 진짜 화가나서 쳐들어오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문을 잠갔다. 라벨리는 무대 뒤에서 Je la tuerai!(저 여자를 죽일꺼야!)라고 소리쳤다. 이 말은 사실상 4막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대사이므로 무대 뒤의 사람들은 라벨리가 그 파트를 연습하고 있는줄 알았다. '카르멘'의 마지막 장면은 호세가 카르멘을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이므로 라벨리는 미니에게 복수할 기회를 갖게 된다. 하지만 라벨리는 그 장면을 평상대로 넘겼다. 바닥에 죽어 넘어진 미니는 '정말 죽다 살았네!'라면서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테너 루이지 라벨리(루치아에서 에드가르도)  

 

어떤 작별

당대에 카르멘으로서는 따라 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차지했던 미니 호크는 어느날 갑자기 무대와의 작별을 결심했다. 미니는 공식 발표도 생략한채 혼자서만 은퇴를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카르멘에 등장하였다. 무대에 나온 미니는 정작 무대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카르멘이 호세에게 장미꽃 한송이를 건네주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난후 미니가 무대를 마지막으로 둘러 보니 그 장미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미니로서는 추억이 담긴 마지막 장미였다. 그런 장미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쓰레기 처럼 놓여있는 것을 보자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미니는 장미를 조심스럽게 집어서 누구에게 기념으로 주려고 했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니는 자기 분장실로 가서 그 장미를 거울 앞에 얌전히 놓고 나왔다. 누군가 카르멘의 장미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에서였다. 다음날, 청소하는 여자가 들어와서 장미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카르멘에서 미니 호크의 또 다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