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초초상의 대명사 미우라 타마키(Miura Tamaki)

정준극 2010. 11. 26. 08:40

초초상의 대명사

미우라 타마키(Miura Tamaki)

 

피아노 앞의 미우라 타마키

 

오페라라는 것은 원산지가 서양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어쩔수 없이 서양의 오페라 성악가들을 소개하였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동양 출신의 오페라 성악가들도 상당히 많으므로 그중에서 음악사에 길이 기록될 인물들은 굳이 소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동양을 주제로 삼은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아 서양 곳곳에서 이름을 떨쳤던 성악가들이라면 자랑 삼아서라도 소개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서 푸치니의 '나비부인'에서 일본 소프라노가 한많은 초초상을 맡아 대기염을 토하였으며 역시 푸치니의 '투란도트'에서 타이틀 롤을 중국 소프라노가 맡아 드라마틱하면서도 신비스런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그래, 장맛은 뚝배기라고 동양을 주제로 삼은 오페라에서는 동양인이 주역을 맡는 것이 제격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하기야 '나비부인'을 벽안의 서양 소프라노가 맡아서 기모노를 입고 부채를 들고 아장아장한다는 것은 재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실감은 나지 않는다. 공연히 이야기가 곁길로 들어 갔음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일본이 잊지 못하는 소프라노인 미우라 타마키를 소개코자 한다.

 

1904년 2월 '나비부인'의 라 스칼라 초연에서 초초상 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로지나 스토르키아.

 

미우라 타마키(三浦環)는 20세기 초반, 일본에 서양 문물이 한창 유입하던 시기에 성악을 공부하여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1884년에 태어나서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프라노라는 명칭마저 어색하기만 하던 시절에 미우라 타마키는 '나비부인'만 무려 2천번이나 맡아 출연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성악가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푸치니의 '나비부인'이 초연을 가진 것은 1904년 2월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였다. 그로부터 '나비부인'은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세계 각지에서 공연되는 '나비부인'의 초초상 역할을 모두 서양의 소프라노였다. 동양인, 특히 아시아인이 서양의 오페라 무대에서 주역을 맡는 다는 것은 극히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밀라노에서 '나비부인'이 초연된지 10년이 지난 1915년 5월 런던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공연에서 비로소 아시아의 소프라노가 초초상을 맡았다. 그가 바로 미우라 타마키였다. 서양에서 아시아를 주제로 한 오페라의 주역을 처음으로 맡았던 아시아의 소프라노였다.

 

일본이 낳은 전설적인 소프라노인 미우라 타마키 여사

 

미우라 타마키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고시절 음악선생이 미우라 타마키의 음악적 재능을 알고 음악을 전공할 것을 권유하였다. 미우라 타마키는 토쿄의 우에노음악학교를 다녔다. 미우라 타마키는 젊은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타키 렌타로(Taki Rentaro)에게 스승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타키 렌타로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로부터 더 이상 사사하지 못했다. 미우라 타마키는 20세인 1903년 토쿄에서 처음으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였다. 오페라라기 보다는 뮤지컬인 오르페오에서 유리디체를 맡은 것이었다. 20세 초반에 우에노를 졸업한 미우라 타마키는 집안의 주선으로 결혼했다가 곧이어 자유연애 사상에 휩싸여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재혼하였다. 미우라 타마키의 결혼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미우라 타마키의 아버지는 딸이 음악공부를 하도록 허락하는 대신 미우라라는 성은 버리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여자가 결혼하면 서양처럼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미우라 타마키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우라라는 친정 성을 그대로 간직하였다. 첫 남편과 이혼하고 재혼한 미우라 타마키는 아무래도 유럽에 가서 음악을 공부해야 겠다고 다짐하고 타키 렌타로 선생의 평소 권유에 따라 독일로 갔다가 이어 영국으로 가는 여객선을 탔다. 당시 일본은 서구의 문물을 영국으로부터 최대한 유입코자 했기에 웬만하면 모두 영국으로 갔고 더러는 독일로 갔었다.

 

'나비부인'의 미우라 타마키. 1920년대.

 

미우라 타마키는 영국에서 유명한 지휘자인 헨리 우드 경(Sir Henry Wood)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알버트 홀에서의 콘서트에 출연했다.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동양여자도 서양 노래를 그토록 대단히 훌륭하게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년후인 1915년, 미우라 타마키는 알버트 홀로부터 '나비부인'의 초초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로부터 미우라 타마키라는 이름은 초초상의 대명사가 되기 시작했다. 마침 런던에서의 '나비부인' 공연을 보기 위해 영국을 방문한 위대한 푸치니가 미우라 타마키의 초초상을 보았다. 당시에는 기차는 물론 자동차도 거의 생활화되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나라간의 여행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1920년 푸치니는 로마에서 미우라 타마키의 '나비부인'을 보고 '미우라 타마키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초초상'이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런던에서 초초상을 맡았던 미우라 타마키는 그해에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보스턴에서 초청을 받아서였다. 미우라 타마키는 보스턴에서 '나비부인'뿐만 아니라 역시 일본을 배경으로 삼은 마스카니의 오페라 '이리스'(Iris)에도 출연하였다. 이어 뉴욕, 샌프란시스코, 시카고에서도 '나비부인'과 '이리스'를 공연하였다. 미국에서의 오페라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미우라 타마키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저명한 지휘자인 토마스 비첨경(Sir Thomas Beecham)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우라 타마키와 푸치니. 푸치니는 1920년 4월 루까의 토레 델 라고에 있는 푸치니의 별장으로 미우라 타마키를 초청하여 환담을 나누었다.

 

1918년, 우리나라에서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에, 미우라 타마키는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나비부인'에 출연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은 프랑스의 작곡가인 앙드레 므싸제(Andre Messager)의 오페라 '마담 크리산템'(국화부인)의 미국 초연에서 주역을 맡기 위해서였다. '국화부인'은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나비부인'의 재탕이라는 견해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고종황제가 승하하고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미우라 타마키는 미국을 떠나 런던으로 와서 그때부터는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주로 '나비부인'에 출연하였다. 미우라 타마키는 몬테 칼로, 바르셀로나, 플로렌스, 로마 등 가는 곳마다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음성은 빈약했지만 일본인라는 어드밴티지 때문에 흥미를 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어쨋든 인기를 끌었다. 1924년 미우라 타마키는 다시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시카고에서 초연되는 알도 판케티(Aldo Fancehtti: 1883-1948)의 오페라 '나미코 상'(Namiko-San)에 주역으로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그후 미우라 타마키는 1932년 일본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미국과 유럽의 여러 지역을 순방하면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 사이에 그의 두번째 남편도 세상을 떠났다. 미우라 타마키가 52세 때였다.

 

2차 대전 기간중 미우라 타마키는 후지 산록의 야마나카 호수(山中 湖)를 안고 있는 마을에 은둔하였다. 야마나카 마을은 미우라 타마키의 어머니가 영원히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토쿄로부터 자기가 사용하던 피아노를 야마나카까지 가져왔다. 당시로서는 그런 시골에 피아노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미우라 타마키가 집에서 피아노를 칠 때면 논밭일을 제쳐놓고 귀를 기울이며 들었다. 미우라 타마키는 도회지로부터 야마나카 마을로 전쟁을 피해 온 지식층 사람들과 다도(茶道)를 즐겼다. 미우라 타마키는 호수가에 나가 혼자서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산중에서 초근목피를 캐거나 호수에 나가서 고기를 잡던 마을 사람들은 호수가로부터 들려오는 신비스런 노래 소리에 넋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미우라 타마키의 음성은 어떠했는가? 아름다웠다. 하지만 '어딘가 얇으면서도 받쳐지지 않은 듯한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작고 하얗다'는 평을 들었다. (Somewhat thin and unsupported, but rather small and white.)

 

나가사키의 글로우버 가든(Glover Garden: 나비부인의 집)에 있는 미우라 타마키의 초초상 모습의 기념상. 어린아이는 핀커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트러블(고통). 글로우버는 1859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나가사키에 와서 무역을 시작한 영국인이다. 그의 집이 존 롱의 소설에 등장하는 나비부인(초초상)의 집과 비슷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나중에 사람들이 글로우버의 저택을 나비부인의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45년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고통에서 구원되었음을 뜻하지만 미우라 타마키에게는 더 힘든 시기였다. 그해 가을 낙엽이 떨어질 즈음부터 시름시름 앓던 미우라 타마키는 이듬해 5월 26일 야마나카 호수가 바라보이는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미우라 타마키는 유언에 따라 야마나카 호반의 어머니 묘소에 합장되었다. 묘비에는 미우라 타마키가 남겨 놓은 한 구절의 시가 적혀 있다.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죽음을 앞두고 시 한 구절을 적어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미우라 타마키의 글은 '프리마 돈나의 가슴 속에는 애국심이 넘쳐 있다. 애국심이 없다면 진전한 예술가라고 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가사키에는 이른바 '나비부인의 집'이라고 하는 글로우버 가든(Glover Garden: 구라바 엔)이 있다. 원래는 영국 상인의 저택이었지만 '나비부인'에 나오는 초초상의 집과 흡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집이다. 이 집의 정원에 푸치니의 기념상과 함께 초초상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미우라 타마키의 기념상이 있다. 사족: 미우라 타마키는 일본에서 자전거를 탄 최초의 여성이라고 한다. 1900년에 자전거를 타고 다녀서 화제가 되었다.

 

미우리 타마키(가운데)와 자전거

 

 

[참고자료]

타키 렌타로는 누구인가?

일본인이라면 '고조노 츠키'(황성의 달: 荒城の月)라는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일본 중학교 음악책에까지 들어 있는 노래이다. 하지만 그 노래를 작곡한 타키 렌타로에 대하여는 기억이 아물아물할 것이다. 타키 렌타로(1879-1903)는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일본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그는 '고조노 츠키' 이외에도 '하나'(花), '하코네 하치리'(箱根八里)와 같은 진실로 일본적인 애창가곡을 작곡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100년이 되는 오늘에도 그의 노래는 수많은 일본인들의 가슴을 적셔주고 있다. 토교에서 태어난 타키 렌타로는1901년 마침내 토쿄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독일의 라이프치히 음악원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당시로서 홀홀단신 독일유학이라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아닐수 없었다. 토쿄에서 배를 타고 함부르크를 거쳐 라이프치히까지 가는데에만 두달 이상이 걸렸다. 타키 렌타로는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라이프치히였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우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날이면 날마다 고향생각 때문이었는지 또는 으슬으슬한 날씨 때문이었는지 폐렴에 걸렸다. 당시로서 폐렴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쩔수 없이 학업을 중단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만일 독일에서 계속 음악공부를 했더라면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작곡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에 '우라미'(憾)이라는 피아노 작품을 남겼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어 유감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가 토쿄에서 살던 집에는 그의 기념상이 서 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타키 렌타로와 그의 기념상

 

[참고자료]

'국화부인'은 또 무엇인가?

오페라 '나비부인'은 너무나 잘 알겠는데 오페라 '국화부인'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국화부인'(Madame Chrysanthème)은 프랑스의 작곡가 앙드레 므싸제(Andre Messager: 1853-1929)이 작곡한 오페라이다. 프랑스의 해군장교 겸 작가인 피에르 로티(Pierre Loti: 1850-1923)가 쓴 소설을 기본으로 삼은 오페라이다. 줄거리는 미국의 존 롱(John Long: 1861-1927)이 쓴 '나비부인'과 신통하리만치 흡사하다. 다만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배경 따위가 조금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존 롱의 소설에서는 게이샤인 초초상(나비부인)이 주인공이지만 로티의 소설에서는 결혼후 '국화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오카네상(오카네는 돈이라는 뜻)이 주인공이다. 로티의 소설은 사랑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 해군장교와 일본 여인간의 편의상 결혼에 중점을 두었다. 존 롱의 소설에서 초초상은 15세로 그려져 있지만 로티의 소설에서는 오카네상이 18세로 되어 있다. '국화부인'에 나오는 아리아인 Le Jour Sous le Soleil Beni는 간혹 콘서트의 레퍼토리로 올려지는 곡이다.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존 롱의 소설을 기반으로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피에르 로티의 '국화부인'도 크게 참고하였다. 소설 '국화부인'은 피에르 로티의 자서전적 작품이라는주장도 있다. 왜냐하면 로티는 프랑스 해군장교로서 일본에 가서 현지처를 두고 지낸 일이 있기 때문이다.

 

'국화부인'을 작곡한 앙드레 므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