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오페레타의 프리마 돈나 기타 알파르(Gitta Alpar)
기타 알파르
헝가리에서 태어난 기타 알파르(1903-1991)는 유태 계통으로서 당대 최고 인기의 배우, 오페라 및 오페레타 소프라노, 댄서 였다. 참으로 재능있는 예술가였으며 미모의 여인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활동하였지만 나치가 권력을 잡은 후에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예술 활동에서 떠나야 했다. 이제 그의 생애를 잠시 살펴보자. 기타 알파르는 부다페스트에어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태교 회당의 칸토였다. 칸토는 유태교 예배의 집례시에 찬양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유태교 회당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를 말한다.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기타 알파르는 부다페스트음악원에 들어가 성악과 피아노를 배웠다. 기타 알파르가 오페라에 처음 데뷔한 것은 그라 20세 때에 부다페스트 오페라극장에서였다.
기타 알파르
1927년 기타 알파르는 청운의 뜻을 품고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로 향하였다. 기타 알파르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여러 역할을 맡아하며 오페라 소프라노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또한 비엔나 폭스오퍼에서는 오페레타에도 출연하여 비엔나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후 기타 알파르는 베를린으로 향하였다. 그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마술 피리',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등에서 주역을 맡아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베를린에서 가장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던 것은 카를 밀뢰커의 '거지 학생'에서 롤라로서였다. 이로써 기타 알파르는 새로운 오페레타 디바로서 사랑을 받았다. 기타 알파르는 이어 밀뢰커-맥레벤의 뒤바리 오리지날 버전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다시한번 놀라운 박수를 받았다.
1932년 베를린의 공원에서 노래를 부르는 기타 알파르.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아침일찍부터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1931년 기타 알파르는 영화배우이 구스타브 프뢸리히(Gustav Fröhlich)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딸 율리카를 두었더, 베를린의 영화제작자들은 기타 알파르가 영화배우로서도 최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타 알파르는 남편의 권유에 못이겨 영화에도 출연했다. '마음'(Herz)라는 영화와 '이것 아니면 아무것도'(Die oder keine)라는 영화였다. 이로써 베를린뿐만 아니라 비엔나의 사람들도 기타 알파르가 거리에 나타나면 하던 일도 멈추고 '기타,ㅡ 기타'를 외치며 환호하였다. 기타 알파르의 인기는 정상에 있었다. 그러한 때에 독일에서 커다란 정치적 변화의 태풍이 불기 시작했다.
기타 알파르와 남편 구스타브 프뢸리히의 행복한 한때
히틀러의 나치가 정권을 잡자 기타 알파르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베를린을 떠나야 했다. 1935년 나치의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서서히 몸통을 들어낼 때에 남편이라는 작자가 기타 알파르에게 이혼을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유태인 여인과 결혼하여 살았던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일설에 의하면 나치 체제 아래에서는 유태인과의 결혼이 무효였기 때문에 기타 알파르와 남편 구스타브 프뢸리히와의 결혼이 자연적으로 무효화 되었다고도 한다. 독일 시민이었던 기타 알파르는 처음에 오스트리아로 이민을 왔다. 비엔나에서도 영화배우로서 활동했다. '사보이 무도회'(Balll i m Savoy: 1935)는 대단한 히트를 기록한 영화였다.
영화 '사보이 무도회'의 포스터
그러다가 오스트리아에서의 정치적 기운도 이상하게 흘러가자 기타 알파르는 비엔나에서는 더 이상 나치의 손아귀를 피해갈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영국으로 건너 갔다가 기회를 보아 1년 후에 미국으로 떠나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기타 알파르는 미국에서 오페레타 성악가로서 계속 활동할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영화에도 자주 출연하였다. I Give My Heart(1935), The Loves of Madame DuBarry(1938), Everything in Life(1936), The Flame of New Orleans(1941) 등이었다. The Flame of New Orleans 에는 세기적 명우 말렌느 디트리이와 함께 출연하였다. 1970-80년대에 들어와서 기타 알파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사람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가는 세월을 누가 막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영화계는 기타 알파르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황금상을 수여하였다. 기타 알파르는 는 캘리포니아의 팜 스프링스에서 1991년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기타 알파르의 묘비. 뒤바리, 트라비아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캘리포니아의 팜 스프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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