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초초상의 이미지를 완성한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Solomiya Krushelnytska)

정준극 2010. 11. 26. 11:16

초초상의 이미지를 완성한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Solomiya Krushelnytska)

 

솔로미야 크루셸리츠카

 

오늘날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1904년 2월 17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을 가졌다. 타이틀 롤인 초초상은 소프라노 로지나 스토르키오(Rosina Storchio)가 맡았다. 하지만 라 스칼라에서의 '나비부인'은 생각 밖으로 실패였다. 단 1회로 막을 내려야 했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으니 일단은 푸치니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공연도중에 야유를 퍼붓고 난동을 부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로지나 스토르키오를 비롯한 주역들이 작품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것도 큰 이유였다. 더구나 로지나는 그때 임신중이었는데 지휘자인 토스카니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관중들의 핀잔을 받았다. 그런 스캔들 때문인지 지휘를 맡았던 토스카니니도 그렇지만 초초상을 맡았던 로지나 스토르키오는 형편없는 연주를 했다. 로지나 스토르키오는 '나비부인' 초연의 실패때문에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다. 그리고는 절대로 다시는 이탈리아 사람들 앞에서 '나비부인'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로지나 스토르키오는 그 약속을 16년간이나 지켰다. 그런후 로마에서 '나비부인'에 다시 출연하였다.

 

오늘날의 '나비부인'(전3막)이 처음 공연된 롬바르디 지방의 브레스키아 전경

 

밀라노 초연에서의 '나비부인'은 전2막이었다. 스토리를 너무 압축한 것도 문제였다. 푸치니는 밀라노에서의 실패를 교훈 삼아 '나비부인'을 대폭수정하여 음악을 손질하였으며 구성도 전3막으로 만들었다. 그해 5월, 푸치니는 수정본 '나비부인'을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 지방의 브레스키아(Brescia)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가졌다. 이번에는 초초상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테르노필(Ternopil)출신인 소프라노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에게 부탁했다. 솔로미야는 푸치니의 제안을 받고 '아니,  일본 여자 역할을 어떻게 하겠어요?'라면서 거절하였으나 토스카니니가 제발 한 번 해보라고 하여 결국 맡았다. 대성공이었다. 그러면 로지나 스토르키오는 어디에 있었가? 토스카니니와 함께 아르헨티나에 있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푸치니가 수정한 '나비부인'의 남미 초연에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1904년 7월 7일 아르헨티나에서의 '나비부인'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브레스키아에서의 '나비부인'에서 솔로미야 쿠르셸니츠카

 

솔로미야 쿠르셸니츠카는 상당한 미인이기도 했지만 대단히 아름답고 풍부한 음성을 지닌 소프라노였다. 리릭과 드라마틱한 역할을 모두 소화할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솔로미야에 대하여 현재의 우크라이나는 대단한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솔로미야는 우크라이나의 르비브(Lviv)에서 공부했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렘버그(Lemberg)라고 불렀던 도시이다. 르비브는 시내 중심지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서 깊은 도시로서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예술의 센터이다. 솔로미야는 르비브음악원을 졸업하고 르비브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 성악가로서 데뷔했다. 르비브시는 이를 기념하여 르비브오페라-발레극장을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 르비브 국립 오페라 아카데미 및 발레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솔로미야는 우크라이나의 자랑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오페라 극장들이 여럿 있지만 어느 하나도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성악가의 이름을 붙인 곳은 없다.

 

우크라이나 르비브 오페라-발레극장. 솔로미야 쿠르셸니츠카를 기념하는 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하여 있던 테르노필의 서남쪽 빌리아빈치(Bilianvyntsi)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부챠츠 라이온(Buchach Raion)이라는 마을이다. 어린 솔로미야는 아버지가 가톨릭 성직자였기 때문에 여러 마을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테르노필 북쪽의 빌라(Bila)라는 마을에 정착하였다. 솔로미야는 어린 시절에 오늘날 우크리아니아의 여러 곳에서 지냈기 때문에 각 지역의 민요를 많이 접하였다. 그것이 솔로미야로 하여금 음악의 길로 접어 들게 한 발판이었다. 음악에 대한 꿈을 이루려는 솔로미야는 1891년 19세 때에 르비브음악원에 들어갔다. 2년후 최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솔로미야는 학생시절에 이미 르비브 오페라극장애서 도니제티의 라 화보리타에서 레오노라를 맡아 전도가 유망한 소프라노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세계 어느 오페라극장에서든지 솔로미야 크루셸니츠라는 이름을 내걸기만 하면 성공한다는 공식이 성립 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타이틀 롤을 맡은 솔로미야 쿠르셸니츠카. 사진은 일곱베일의 춤.

 

솔로미야가 오페라 역사에 있어서 길이 남을 발자취를 남긴 것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1904년 브레스키아에서 '나비부인'의 타이틀 롤을 맡은 것이었다. 르비브음악원을 나온 그는 오페라에 대한 경험을 넓히기 위해 밀라노에 가서 공부하였다. 하루 여섯 시간씩의 강행군이었다. 혹시 쉬는 시간이 되면 박물관이나 성당 등을 찾아 다니며 역사와 종교,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오페라극장의 한 구석에 앉아 오페라를 구경하였다. 아무튼 솔로미야만큼 온갖 열정을 다 쏟아부으면서 공부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어느때는 1주일에 다섯 편의 각각 다른 오페라에 출연한 일도 있었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이 모두 훌륭하게 소화하였다. 솔로미야는 새로운 오페라를 단 이틀이면 마스터했다. 도대체 그만한 실력의 성악가는 사실상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어느 때는 단 3시간 후에 다른 역할을 맡은 일도 있었다. 솔로미야이 평상적인 레퍼토리는 63편의 오페라에 이른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63편에 속하는 오페라를 별다른 연습도 없이 연주할수 있었다. 솔로미야가 주로 맡아했던 역할은 19세기 말엽의 작품들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매우 사랑했다. 돌이켜보건대 '나비부인'의 수정본 초연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기 전에 이미 파리에서 로엔그린의 엘자로서 찬사를 받은바 있으며 1906년에는 밀라노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로서 대단한 갈채를 받은바 있다. 밀라노에서의 살로메는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유럽의 여러 극장, 이집트, 알제리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등지를 순방하며 오페라 애호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우크라이나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르비브 시내 중심지역

 

솔로미야는 1910년 이탈리아의 변호사인 세자레 리코니(Cesare Rocchoni)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솔로미야는 정상의 위치에 있었던 1920년에 돌연 오페라 무대를 떠났다. 그리고 3년후부터는 콘서트 순회연주를 시작하였다. 미국과 캐나다도 방문하였다. 솔로미야는 8개국어를 말할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콘서트 레퍼토리에는 여러 나라의 노래가 포함되는 대단히 폭이 넓은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살던 솔로미야는 1939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고향 르비브로 돌아갔다. 솔로미야는 르비브에서 195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용하게 지냈다. 1939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두어주 후에 나치와 소련간의 협정에 의해 소련군이 르비브에 진주했다. 소련군은 솔로미야가 살던 저택을 국유화했다. 그리고 솔로미야가 이탈리아로 돌아가려는 것도 못가게 했다. 솔로미야는 생활을 위해 르비브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전쟁이 끝난 한참 후인 1951년 소련의 위성국가인 우크라이나는 솔로미야를 공훈예술가로 임명하였고 이듬해인 1952년에는 르비브음악원의 정식 교수로서 발령을 냈다. 솔로미야는 비록 공산주의 치하에서 여러 제약을 받았지만 제자들을 양성함에 있어서 존엄과 사랑으로서 일관하여 무한한 존경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1997년에 발행한 솔로미야 쿠르셸니츠카 기념우표

 

솔로미야가 태어난 집은 오늘날 솔로미야 쿠르셸니츠카 기념관이 되었다. 1983년에는 키에프의 도브첸코영화사가 '나비의 귀환'(The Return of the Butterfly)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다. 1991년부터는 르비브에서 '솔로미야 쿠르셸니츠카 국제성악콩쿠르'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그는 르비브의 리챠키프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솔로미야 쿠르셸니츠카의 이름은 Salomea Krusceniski 등으로 변형해서 쓰기도 한다.

 

르비브에 있는 솔로미야 쿠르셸니츠카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