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프랑스

므싸제, 앙드레(Andre Messager)

정준극 2010. 11. 27. 09:33

프랑스 오페레타의 중심인물

앙드레 므싸제(Andre Charles Prosper Messager)

 

앙드레 므싸제

 

앙드레 므싸제(또는 앙드레 메싸제)는 프랑스의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지휘자이지만 작곡가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30여편에 이르는 오페라 코미크와 오페레타를 남겼으며 이밖에도 발레곡 '두 마리의 비둘기'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오페레타는 프랑스 오페라 코미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대표적인 작품은 베로니끄(Veronique), 무슈 보케르(Monsieur Beaucaire), 레 프티트 미슈(Les p'tites Michu) 등이 있다. 또 하나 유명한 작품은 '국화부인'(MadameChrysanteme)이다. 1893년에 초연된 '국화부인'은 그로부터 7년 후인 1904년에 초연된 푸치니의 '나비부인'(Madama Butterfly)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수 있다. 스토리가 서로 흡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푸치니는 '나비부인'을 작곡함에 있어서 로티의 소설 '국화부인'을 크게 참고로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나비부인'은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지만 '국화부인'은 '그런 오페라도 있나?'라는 말을 듣고 있다.

 

오페레타 '베로니끄' 포스터

 

므싸제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돈이 없으면 공부도 하기 어려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다.

므싸제도 공부를 하지 못한 처지였지만 고학으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 그는 여러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가장 도움을 준 작곡가는 카미유 생생과 가브리엘 포레였다. 학교를 졸업한 므싸제는 작곡가로서 그리고 지휘자로서 파리와 런던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므싸제의 오페레타 공연은 상당한 인기를 끈 것으로서 몇몇 작품은 롱 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런던의 극장을 위해 영어로 된 오페레타도 몇편 작곡했다. 므싸제는 사보이 오페라를 위해 작품을 쓴 유일한 프랑스 작곡가였다. 그는 말년에 특별히 가수 겸 배우인 이본느 프랭땅(Yvonne Printemps)과 그의 남편인 배우 사샤 귀트리(Sacha Guitry)를 위해 작품을 쓰기도 했다.

 

이본느 프랭땅과 사샤 귀트리. 앙드레 므싸제는 이들을 위한 작품도 썼다.

 

므싸제는 뛰어난 지휘자였다. 작품의 해석에도 뛰어났지만 지휘하는 폼도 뛰어났다. 더구나 그럴듯한 콧수염의 풍채여서 오케스트라 앞에 나서면 마치 카이저 황제가 지휘하는 듯 위풍당당했다. 므싸제는 파리의 오페라 코미끄 극장, 파리 오페라극장,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 그리고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이 정도면 지휘자로서 대성공한 셈이다. 므싸제는 비교적 가볍고 명랑한 내용에 중점을 두고 작곡했지만 지휘는 여러 분야를 망라하였다. 특히 모차르트로부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까지의 오페라 지휘로서 유명했다. 그러나 정작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바그너의 오페라를 지휘하고서부터였다. 그건 그렇고, 므싸제는 파리에서 드빗시의 '플레아와 멜리상드'의 초연을 지휘했고 마스네의 '그리셀리디'(Griselidis), 샤펜티어의 '루이제'(Louise)의 초연을 지휘했다. 므싸제는 런던에서 여러 편에 이르는 생생과 마스네의 오페라의 초연을 지휘했다. 초연작품을 지휘한다는 것은 나중에 다른 지휘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거룩한 일이므로 지휘자로서 므싸제의 업적을 과소평가할수는 없는 일이다.

 

앙드레 므싸제는 1902년 파리 오페라 코미끄에서 드빗시의 '플레아와 멜리상드'의 초연을 지휘했다. 당시 메리 가든이 멜리상드의 역을 맡았다.

 

므싸제는 1853년 중부 프랑스의 몽루송(Montlucon)이라는 마을에서 부유한 세무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3년이라면 크리미아전쟁이 일어난 해이다. 하지만 얼마후 아버지가 관련하던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므싸제는 음악학교를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므싸제는 어떤 독지가의 후원으로 파리의 에콜 드 무지끄(음악학교)에서 공부할수 있었다. 당시는 이른바 파리 콤뮨(Paris Commune)의 시대였다. 도시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었다. 에콜 드 무지끄는 폭력을 피하여 한때 스위스로 피난을 갔었다. 므싸제는 아담 로쎄(Adam Lausset)로부터 피아노를, 클레망 로레(Clement Loret)로부터 오르간을, 그리고 작곡은 유제느 기구(Eugene Gigout)와 가브리엘 포레, 카미유 생-생으로부터 배웠다.

 

 

앙드레 므싸제에게 영향을 준 4명의 작곡가. 윗쪽은 생-생과 포레, 아랫쪽은 샤브리에와 기구

 

포레와 므싸제는 처음에는 사제지간이었으나 얼마후 가장 절친한 친구 겸 동료가 되었다. 1878년 두 사람은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를 보기 위해 쾰른을 찾아갔었다. 깊은 감명을 받은 두 사람은 내친 김에 '명가수'와 '탄호이저'를 보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가 '파르치발'을 보기위해 바이로이트까지 갔다. 포레와 므싸제는 바이로이트의 감동을 표현하기 위해 공동으로 Souvineirs de Beyreyth(바이로이트의 기념)을 작곡했다. 4손을 위한 피아노 소품인 이 작품은 바그너의 링 사이클에서 테마를 얻은 것이다. 포레와 므싸제는 다른 작품도 공동으로 작곡했다. 므싸제는 바그너의 링 사이클을 보고 난후부터 작곡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독일을 방문했던 그 해에 두 편의 발레곡을 작곡했다. '오렌지 꽃'(Fleur d'oranger)와 '프랑스산 포도주'(Les vins de France)였다. 그의 발레곡은 그런대로 환영을 받았다. 므싸제가 정작 오페레타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1883년부터였다. 피르맹 베르니카(Firmin Bernicat)라는 작곡가가 세상을 떠나면서 '푸른 수염의 프랑소아'(Francois les bas-bleus)라는 오페레타를 미완성으로 남겨 놓았다. 므싸제가 완성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므싸제는 처음부터 다시 편곡하여 그해 11월 초연을 갖게 했다.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므싸제는 1883년에 먼 친척이 되는 에디트 클루에트라는 여자와 결혼하였다. 포레가 결혼식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푸른 수염의 프랑소아'는 1885년 런던에서 '악당 프랑소아'(Francois the Radical)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오페라 코미끄 '라 바소셰'(La Basoche)의 한 장면 스케치

 

므싸제와 샤브리에는 죽을 때까지의 친구였다. 두 사람은 간혹 함께 무대에 올라가 피아노를 연주했다. 샤브리에의 '에스파냐'(Espana)의 피아노 버전의 초연도 므싸제와 샤브리에가 공동으로 치루었다. 므싸제는 샤브리에의 오페라인 그웬돌리네(Gwendoline)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래서 초연은 파리에서 자기가 지휘하겠다고 다짐했다. 므싸제는 다짐한 대로 그웬돌리네의 초연을 지휘하였다. 그로부터 므싸제는 '나도 저런 훌륭한 작품을 써야지'라는 생각으로 오페라 작곡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므싸제의 오페라는 행불행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1893년에 테아트르 드 라 르네상스의 무대에 올려진 '국화부인'(Madame Chrysantheme)은 그저 그랬다. 1894년 사보이 극장에서 공연된 미레트(Mirette)는 런던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프랑스 작곡가에 의한 최초의 사보이 오페라였다. 이 작품을 작곡할 때에 호프 템플(Hope Temple)이라고 불리는 노래 작가인 도티 데이비스(1859-1938)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호프 템플은 1895년 므싸제의 두번째 부인이 되었다. 버나드 쇼에 의하면 므싸제가 영국 관중을 위해 지나치게 인텔리젠트한 작품을 내놓은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소리를 들은 므싸제는 되도록이며 서민들을 위한 평범한 작품을 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므싸제는 파리로 돌아왔다.

 

므싸제의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했던 당대의 소프라노들. 윗쪽이 장느 그라니에(Jeanne Granier), 플로렌스 생 존(Florence St John), 아랫쪽이 마리 템페스트(Marie Tempest), 아델리느 즈네(Adeline Genee)

 

므싸제는 1902년 드빗시의 '플레아와 멜리상드'의 초연을 지휘했다. 사실상 므싸제는 드빗시가 이 오페라를 완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드빗시는 이를 고맙게 여겨서 '플레아와 멜리상드'를 므싸제에게 헌정했다. 므싸제는 파리와 몬테 칼로, 런던에서 지칠줄 모르는 활동을 했지만 반면에 그의 건강은 점차 약해졌다. 1919년 므싸제의 오페레타 Monsieur Beaucaire(무슈 보케르)가 영국의 버밍햄에서 초연되었다. 므싸제는 보통 자기의 작품이 초연될 때에는 당연히 지휘를 맡았었다. 하지만 좌골신경통이 심하여서 버밍햄의 초연에 참석하지 못했고 며칠후 런던 웨스트 엔드에서의 공연에도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므싸제는 파리로 돌아온 이후 계속 지휘를 맡아 마지막 열정을 쏟아넣었다. 특히 바그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공연에서 지휘를 맡은 것은 기록에 남을 만한 뜻깊은 것이었다. 므싸제는 1927년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29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 파리에서는 그의 오페레타 Coups de roulis가 공연되고 있었다. 므싸제는 파씨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태어난 몽루송에는 2009년 그를 기념하는 앙드레 므싸제 음악원이 문을 열었다.

 

발레 작품인 '두 마리의 비둘기'의 한 장면

 

앙드레 므싸제의 오페라/오페레타 수첩은 다음과 같다.

● Les paiens(오페레타: 1876. 분실) ● Les beignets du roi(오페라 코미끄) ● Francois les bas-bleus(오페라 코미끄: 1883) ● Gisele(오페레타: 1884. 분실) ● La fauvette du temple(오페라 코미끄: 1885) ● La Bearnaise(오페라 코미끄: 1885) ● Le bourgeois de Calais(칼레의 시민: 오페라 코미끄: 1887) ● Les premieres armes de Louis XV(오페라 코미끄: 1888) ● Isoline(요정이야기: 1888) ● Le mari de la reine(오페레타: 여왕의 남편: 1889) ● La Basoche(오페라 코미끄: 1890) ● Madame Chrysantheme(코미디 리리끄: 1893) ● Miss Dollar(오페레타: 1893) ● Amants elternels(판토마임: 1893) ● Mirette(1894) ● La finaceeen loterie(오페레타: 1896) ● Le chevalier d'Harmental(오페라 코미끄: 1896) ● La montagne enchantee(환상적 소품: 1897) ● Les p'tites Michu(오페레타: 1897) ● Veronique(오페라 코미끄: 1898) ● Les dragons de l'imperatrice(오페라 코미끄: 1905) ● Fortunio(코미디 리리끄: 1907) ● Beatrice(레장드 리리끄: 1914) ● Monsieur Beaucaire(로망스 오페레타: 1919) ● Cyprien, ote ta main de la(환타지: 1920) ● La petite fonctionnaire(코미디 뮤지칼: 1921) ● L'amour masque(코미디 뮤지칼: 1923) ● Passionement(코미디 뮤지칼: 1926) ● Deburau(코미디: 1926) ● Coups de roulis(오페레타: 1928) ● Sacha(1933)

 

오페라 코미끄 '베로니끄'의 한 장면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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