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프랑스

레이날도 한(Reynaldo Hahn)

정준극 2011. 7. 7. 08:16

레이날도 한

프랑스 벨르 에포크 시기의 영향을 받은 작품

 

레이날도 한

 

레이날도 한(Reynaldo Hahn: 1874-1947)은 베네주엘라 출신이지만 프랑스에 귀화하여 활동한 작곡가, 지휘자, 음악평론가이다. 작곡가로서 그는 멜로디를 중요시하는 프랑스의 고전 전통을 이어받아 작품을 썼다. 그의 음악은 뛰어난 테크닉과 아름다운 멜로디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기본적으로 그의 음악은 프랑스 벨르 에포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레이날도 한은 베네주엘라의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로스는 독일-유태계로서 부유한 기업인이었다. 그는 발명도 하고 공장에서 기계를 생산하는 일도 했다. 어머니 엘레나 마리아는 스페인의 바스크 계통의 베네주엘라 여인이었다. 1870년대에 베네주엘라의 정치정세는 혼미를 거듭하는 것이었다. 레이날도 한의 가족은 아버지의 인솔로 베네주엘라를 떠나 파리에 정착하였다. 레이날도 한이 세살 때였다. 파리는 그가 음악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젊은 시절 고향인 베네주엘라의 음악에 대하여 잠시 관심을 가졌지만 평생을 프랑스인으로서 프랑스 음악을 만들며 지냈다. 레이날도 한은 어려서부터 음악의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대여섯살의 어린이일 때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치던 마틸드 공주(나폴레옹의 조카)의 살롱에 참석하여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레이날도 한은 여덟살 때에 첫 가곡을 작곡했다.

 

파리음악원은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어린이들의 입학은 허용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프란츠 리스트도 청소년 시기에 파리음악원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학교 당국이 거절한바 있다. 그러나 레이날도 한은 열살 때에 입학을 허락 받았다. 그는 쥘르 마스네, 샤를르 구노, 카미유 생 생, 에밀 드꽁(Emile Descombes),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 등으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그의 동료 학생으로는 모리스 라벨이 있었다. 1888년 그는 불과 14세일 때 빅토르 위고의 시를 바탕으로 Si mes vers avaient des ailes(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즉각적인 환영을 받아 Le Figaro지가 출판했다. 그로부터 그는 파리 음악계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여러 사람들과 교분을 쌓으며 지내게 되었다. 당대의 소프라노 시빌 샌더슨(Sybil Sanderson)과 작가인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는 레이날도 한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그는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 처럼 빅토르 위고의 시에 매료하면서 또한 폴 발렝(Paul Valaine)의 시를 소재로 아름다운 가곡들을 작곡했다. 폴 발렝은 10대 초반의 이 뛰어난 작곡가가 자기의 시에 음악을 붙인 노래를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특히 L'heure exquise는 레이날도 한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보여준 작품이었다. 1894년, 그가 19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수많은 사랑의 노래로서 파리 음악계의 총아가 되었다. 그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수줍어 하는 습성이 있었다. 파리 사교계의 여인들은 그런 그를 몹시 사랑하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레이날도 한이 동성연애자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특히 그와 마르셀 프로스트(Marcel Proust)와의 교분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은 미술, 문학, 음악의 모든 장르에서 애정을 함께 하였다.

 

1909년 레이날도 한은 프랑스 시민이 되었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군에 자원입대하여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는 전선에서 로베르 루이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 시를 바탕으로 송 사이클을 작곡했다. 지휘자로서 그는 모차르트에서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모차르트'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도 작곡했다. 1차 대전이 끝난후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부활하였을 때 그는 릴리 레만의 초청으로 참석하여 모차르트를 지휘했다. 그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칸느 오페라 하우스의 총감독을 지냈다. 뛰어난 문장력을 지닌 그는 몇년동안 Le Figaro 지의 음악평론을 맡아했다. 1940년 그는 나치에 의해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다가 1945년 전쟁이 끝나자 다시 파리로 돌아와 파리 오페라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47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레이날도 한은 오페레타, 오페라 코믹, 콩트 리릭(Conte Lyrique), 코메디 무지칼(Comedie musicale), 코미디 리릭, 신 리릭(Scene lyrique), 오페라 등 여러 장르의 무대작품을 남겼다.

 

파리 샤틀레 극장

 

레이날도 한의 무대작품 수첩

 

● Fin d'amour(발레 판토마임): 1892. 파리 Cercle Funambulesque ● L'île du rêve(idylle polynésienne): 1898.파리 Opéra-Comique ● La Carmélite(comédie musicale): 1902. 파리 Opéra-Comique ● La pastorale de Noël(mystère): 1908. 파리 Théâtre Hébertot ● Les fêtes de l'hymen et de l'amour(발레): 1909  ● La fête chez Thérèse(발레 판토마임): 1910. 파리 오페라  ● Le dieu bleu(발레): 1912. 파리 Théâtre du Châtelet ● Le bois sacré(발레 판토마임): 1912. 파리 Théâtre Sarah-Bernhardt ● Miousic (앙드레 메사저와 샤를르 르코크 공동작품; 오페레타): 1914 파리 올림피아극장 ● Nausicaa(오페라 코믹): 1919. 몬테 칼로  ● Fête triomphale(오페라): 1919. 파리 오페라  ● La colombe de Bouddha(꽁뜨 리리크): 1921. 칸느 ● Ciboulette(시불레트: 오페레타): 1923. Théâtre des Variétés ● Degas(spectacle de danses): 1925 ● Mozart(모차르트: comédie musicale): 1925. 파리 Théâtre Édouard VII ● La reine de Scheba(시바의 여왕: scène lyrique): 1926. 파리 Théâtre du Châtelet ● Une revue(comédie musicale): 1926. Théâtre de la Porte Saint-Martin ● Le temps d'aimer(comédie musicale): 1926. 파리 Théâtre de la Michodière ● Brummel(오페레타): 1931. 파리 Folies Wagram ● Valses(발레). 1932 ●   Ô mon bel inconnu(comédie musicale): 1933. Théâtre des Bouffes Parisiens ● Le marchand de Venise(베니스의 상인: 오페라): 1935. 파리 오페라 ● Malvina(말비나: 오페레타): 1935. Théâtre de la Gaîté ● Beaucoup de bruit pour rien(comédie musicale): 1936. Théâtre de la Madeleine ● Aux bosquets d'Italie(발레): 1937  ● Le oui des jeunes filles (젊은 여인의 예스: 코미디 리리크): 1937. 파리 Opéra-Comiq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