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좀 더 알기/시작하면서

예수의 인성과 그의 이름

정준극 2010. 12. 12. 17:20

예수의 인성과 그의 이름

 

Jesus라는 이름은 라틴어의 Iesus(이에수스)에 근거하여 영어화한 것이다. 그리스어에서도 철자는 다르지만 발음은 같은 Iesous(이에수스)이다. 이는 히브리어의 Yehosua(여호수아: Joshua)를 그리스 스타일로 변형한 것이다. 여호수아라는 단어는 히브리-아람어에서 '야훼께서 구원하시다'라는 뜻이다. Christ(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의 Christos(크리스토스)에서 가져온 것으로 '기름부은 자'라는 뜻이며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메시아이다. 즉,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시아라는 말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하나님이 승락하시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히브리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메시아는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았으면 예수는 이사야, 예레미아 등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라벤나의 모자익. 예수의 모습을 표현한 것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예수에 대한 호칭으로서 간혹 성경에는 '인자'라는 말이 나온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8장 32절에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라는 말씀이 있다. '인자'라고 하니까 인자(仁慈)하다는 말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님이 '인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Son of Man)을 말한다. 글자그대로라면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지만 예수님의 시절에는 반드시 그런 뜻만은 아니었다. '인자'는 타이틀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할 때에 쓰는 관용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라는 것이다. '인자'라는 말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로부터 사용되던 관용구라고 한다. 언어적으로 보면 셈어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인자가....'라는 표현이 나오면 그건 '인간의 아들'이니하는 종교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용어로 생각하지 말고 그저 '제가...'라는 일상적인 뜻으로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영원한 말씀과 연계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영생을 얻을수 있다고 믿는다.


얘기가 조금 빗나가지만,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한 것이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므로(또는 삼위일체설에서 볼수 있듯이 신과 동격이므로) 당연히 신성을 소유자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시고 인간적인 생활을 하시다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인성의 소유자라는 주장이 있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기록은 성경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것,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 한것 등등이다. 하지만 인간 예수의 모습을 보여 준 기록도 있다. 성경은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다섯가지의 감정을 모두 표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섯 가지 인간의 감정이란 공감(Empathy), 동정(Compassion), 행복(Happiness), 슬품(Sadness), 분노(Anger)를 말한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첫째로 공감이다. 공감이란 단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을 함께 나누는 능력과 수준이라고 설명할수 있다. 학술적으로 말하면 감정이입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 몇 시간 동안 인간으로서 공감을 보여주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을 당하시는 순간에도 십자가 아래에 계신 어머니 마리아가 얼마나 마음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지를 이해하시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잘 모셔 달라고 부탁하였다. 요한복음 19장 25-27절에 그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십자기의 예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걱정하시다


둘째는 불쌍이 여기는 것, 즉 동정이다. 예수께서는 여러번이나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을 보였다. 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또는 죄악으로서 마음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동정하셨다. 마태복음 9장 20-22절, 요한복음 8장 1-11절의 말씀을 보면 알수 있다. 마태복음 9정 36절에는 예수께서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동정하신 기록이 있다. 기록된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이다. 이는 시편 103장 13절의 말씀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기록된바,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이다. 세번째 예수께서 표현하신 인간의 감정은 '행복'이다. 이사야 53장 3절을 보면 예수는 행복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어 있다. 기록된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이다. 그런데 그런 단정과는 달리 예수는 행복하고 기쁨에 넘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기록들이 있다. 누가복음 10장 21절에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ㅇ르 지혜롭고 슬기 있는 다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나이다'라는 기록처럼 예수께서 기뻐하셨다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또한 침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도 말씀하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네번째는 '슬픔'이다. 예수께서는 라사로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시었다는 기록이 있다. 누가복음 11장 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라고 되어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보고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일도 있다. 누가복음 19장 41절의 말씀이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고 우시며'이다. 이렇듯 예수는 생애의 마지막 시간에 두번이나 눈물을 흘리셨다.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울지 않으셨는데 진실로 인간적인 감정에서 눈물을 흘리신 경우이다. 마지막으로 다섯번째는 '분노'의 감정이다. 예수는 특히 종교 지도자들에 대하여 분노를 표명하셨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의 종교계가 당면한 상황과 다를바가 없다. 마태복음 23장 33절을 보면 외식하는 서가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지극한 분노를 표현하셨다. 또한 마태복음 7장 15절에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니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분노를 표출하신 경우도 찾아 보기 힘들다. 그런가하면 요한복음 2장 14-16절에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라는 기록이 있다. 이 또한 예수님의 분노의 감정을 표현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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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다

 

한편, 예수께서는 '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다. 상당수 신약성서학자들은 예수께서 '내가...'(I am)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함으로서 간접적으로나마 하나님과 동격임을 설명한 것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 58절이다. 기록된바,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으니라 하시니'이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셨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그런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이라고 하여 분노했다. 아니, 어떻게 예수라는 사람이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아담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것인가? 더구나 요한복음 10장 30절에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I and the Father are one)이라는 말이 나온다. 예수께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임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과연 그럴까?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런 말을 들은 유태인들이 난리를 친 것은 아무래도 수긍이 가는 일이다.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에 비추어 예수께서 태초로부터 계셨던 존재라고 믿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라고 할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타이틀로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유태인의 전통을 고려한 표현이라고 볼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어떤 특정한 사람, 특히 의인을 말할 때에 그런 표현을 쓰며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엠마누엘'이라는 타이틀도 나온다. 엠마누엘은 히브리어의 Immanu-El 이라는 말에서 연유한 것이다.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다'라는 뜻이다. 이사야 7장 14절에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르리라'라는 말씀은 메시아적 해석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그런데 이런 작품들을 보면 혹자는 아무래도 이해 못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다. 아들인 예수의 나이가 30이 훨씬 넘었는데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그런 나이 많은 아들을 둔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궁금증은 신학적으로 풀수 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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