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오스트리아 유태인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 파란의 역정(歷程)

정준극 2010. 12. 18. 12:25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파란의 역정

 

세상에는 수많은 인종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유태인이라고 하면 어쩐지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어쩔수 없는 관념이다. 대체로 기독교인들은 유태인이라고 하면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못박아 죽인 악한 백성들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유태인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선입감이 있어서인지 일종의 경외심을 갖는다. 하기야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도 유태인이고 초대 교황으로 추앙받고 있는 베드로, 위대한 신학자이며 전도가인 바울도 유태인이다. 성모 마리아도 유태인이고 예수께서 가장 사랑했다는 막달라 마리아도 유태인이다. 그리고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도 모두 유태인이다. 구약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사무엘과 다니엘과 이사야와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인물들이 모두 유태인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유태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고 그러므로 다른 민족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성경의 역사를 떠나서 유태인들은 세계의 여러 민족 중에서도 학문의 진보와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서 지대한 업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세인들의 관심을 더욱 갖게 된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유태인들이 과거 수천년동안 끊임없이 강자의 박해를 받아왔으므로 측은해서 동정어린 관심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유태인들이 나치 히틀러에 의해 6백만명이나 희생된 것은 세계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다. 돌이켜보건대 유태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미움과 박해를 받으며 힘들게 지내왔다. 유태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종교적으로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다.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어찌하여 그렇게 박해를 받아 왔던 것일까?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로서 궁금한 일이 아닐수 없다.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알수가 없는 노릇이다.

 

크리스탈나하트의 다음날, 거리에 끌려와서 강제로 길바닥 청소를 하는 비엔나의 유태인들. 11월이면 추운 날씨이다.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은 대략 1870년부터 나치의 군화가 비엔나 거리를 짓밟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까지 학문, 예술, 과학, 정치, 사상의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유태인들은 언제부터 오스트리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나? 기록에 의하면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유태인들은 로마제국 시기의 이전에도 살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로서는 2-3세기에 살았다는 증거에 의하여 그 때가 시초라고 보고 있다. 부르겐란트의 할브투른(Halbturn)이라는 곳에서 3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태인 소녀의 무덤이 발견된 것은 좋은 예이다. 2008년에 발견되었다. 로마제국이 붕괴하자 로마가 건설한 오스트리아 지방의 도시들은 대다수 방치되어 상당기간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6세기 말에 바바리아족과 슬라브족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며 살기 시작했는데 이때에 소수이긴 하지만 유태인들도 함께 들어와 살았다. 그후 바바리아족과 슬라브족들은 점차 기독교를 받아들여 오늘날 오스트리아가 로마 가톨릭 국가로 남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 시기에 유태인들은 이미 오스트리아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주교인 아르노(785-871)라는 사람이 유태인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유태인들의 사회적 활동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는 일이다.

 

비엔나 유덴가쎄의 밤거리. 대개의 경우에 경찰이 경비를 서고 있다.

 

10세기에 만들어진 Raffelstettener Zollordnung(라펠슈테테너 촐오르드눙)이라는 서류를 보면 오스트리아에서 유태인 상인들이 활동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서류는 세관과 세금에 대한 규정을 적어 놓은 카탈로그로서 유태인 상인들로부터는 얼마의 세금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유태인이 비엔나에서 사회적으로 활동했다는 처음 기록은 아마도 1194년의 기록일 것이다. 슐롬(Schlom)이라는 유태인이 프레데릭 1세의 주조관(Munzmeister)으로 활약했다는 기록이다. 그후 1238년 프레데릭 2세는 유태인들에게 몇가지의 특권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14세기 이후에는 비엔나에 유태인 회당, 병원, 도축장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비엔나는 법으로 특별 유태인 법관(Judenrichter)을 두도록 했다. 이 법관은 유태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고 재판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유태인간의 분쟁을 다루지는 않았다. 다만, 유태인이라고 해도 상대방에게 문서로서 고소를 하면 유태인 법관이 맡아서 처리토록 했다. 비엔나 1구에서 유태인들이 처음으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자이텐슈테텐가쎄(Seitenstettengasse)이다. 유태인들이 오늘날의 유덴플라츠(Judenplatz)에 살기 시작한 것은 1280년 경부터이다. 유덴플라츠 일대는 13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비엔나에서 유태인들을 위한 종교적, 문화적 센터의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알베르트 5세가 1421년에 시내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모두 내쫓으라고 지시함으로서 유태인들의 비엔나 생활을 위기를 맞았었다. 이를 비엔나 게세라(Wiener gesera)라고 부른다. '비엔나 칙령'이라는 뜻이다.

 

유태인 시나고그가 있는 자이텐슈테텐가쎄

 

12세기에는 잘츠부르크에도 유덴가쎄(Judengasse)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잘츠부르크는 1816년까지 오스트리아에 속하지 아니하고 대주교가 다스리는 독자적인 영토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유태인들에게 사회경제적인 어떤 권리를 주기 시작한 것은 1244년 영명한 프리드리히2세 황제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일부 권한만을 인정했으나 1338년에 와서는 오스트리아 시민과 똑 같은 권리를 주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유태인들이 고리대금업이나 한다면서 증오하여 오스트리아 시민과 똑같은 권리를 주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래서 그 해에 유태인을 타겟으로 한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은 니더외스터라히이히주의 홀라브룬(Hollabrunn)에 있는 풀카우(Pulkau)라는 곳에서 시작하여 유태인들이 살고 있는 다른 도시들로 번질 기세였다.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걱정이 되어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를 대폭 낮추었다. 그래서 폭동은 겨우 진정되었다.

 

오스트리아에 유태인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자 회당(시나고그)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의 첫 유태인 시나고그는 아마 1370년에 세운 잘츠부르크의 시나고그일 것이다. 한편, 14세기에 들어와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커지고 이에 따라 교회의 권세가 약화되자 교회는 유태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여 난관을 타개코자 했다. 마침 유태인들은 반제국주의자 또는 반가톨릭주의자들과 결탁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러한 때에 후스 전쟁(Hussite Wars: 1419-1434)이 일어났다. 후스 전쟁은 보헤미아의 후스파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탄압에 항거하여 일으킨 것이다. 참고로 말하지만 후스 전쟁에서 소총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로부터 유럽의 전쟁에서 기사들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를 들고 싸우던 시기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후스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시간만 끌다가 끝났지만 유태인들은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왜냐하면 전쟁이 시작되자 가톨릭 중심국인 오스트리아는 비엔나와 기타 도시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을 집중적으로 못살게 굴고 추방하였기 때문이다.

 

보헤미아의 후스파가 합스부르크의 탄압에 한거하여 일으킨 후스전쟁

 

오스트리아에 속하여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대주교가 통치하던 잘츠부르크는 그러지 않아도 유태인들이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을 곱게 보지 않고 있던 터에 비엔나에서 유태인 추방 운동이 벌어지지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1492년 잘츠부르크에 살고 있는 모든 유태인들을 추방하였다. 그로부터 미안한 말이지만 잘츠부르크 지방에는 19세기까지 어떠한 유태인도 정착하지 못하였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1세는 1496년에 지방 상인들의 요구에 못이겨서 슈티리아와 카린티아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추방하고 이들은 아이젠슈타트 인근의 치스터스도르프(Zistersdorf)라는 곳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당시 아이젠슈타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동쪽 변경이었다. 1551년에는 어떤 유태인이든지 도시에 들어올것 같으면 옷에 노란 표시를 해야 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나치 시대에 유태인들이 마치 이름표 처럼 노란 별을 달고 다녔던 것은 이 때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둥근 모양이었으나 나치 시대에는 다윗의 별(Magen David)을 본따서 만들었다. 이때 쯤해서 당국은 유태인들이 나라의 경제활동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유태인들에 대한 상당히 완화된 규제 정책을 내놓았다. 그래서 시장에 드나들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는 비엔나에서 집을 사서 살수도 있었다.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났다.

 

비엔나의 유태인들을 강제 이주시켜서 살게 했던 아이젠슈타트 인근의 치스터스도르프

 

그러자 '이러면 안되는데'라며 곤란하다는 얘기들이 나왔다. 1624년에는 유태인들이 새로 들어와서 정착하는 것을 금지하는 시책이 발표되었다. 그렇지만 조금 여유를 주기는 했다. 예를 들어 새로운 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것은 허락했다. 그래서 제가쎄(Seegasse)에 있는 유태인 공동묘지를 확장할수 있었다. 그러다가 1637년에 또 다시 유태인들의 권익을 제한하는 조치가 있었다. 비엔나에 새로 들어와서 살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다. 이러한 조치는 나중에 레오폴드 1세의 유태인 추방의 촉진제가 되었다. 레오폴드 1세는 1669-70년에 걸쳐 비엔나의 유태인들을 시내에서 모두 나가도록 조치했다. 시내에서 쫓아낸 유태인들은 오늘날의 2구인 레오폴드슈타트에만 한정하여 살도록 했다. 그후 1683년에 터키의 2차 비엔나 공성이 있었다. 비엔나의 경제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 궁정에도 돈이 필요했다. 레오폴드 1세는 유태인 부자로서 뛰어난 경제가인 사무엘 오펜하이머(Samuel Oppenheimer)를 궁정의 재정담당관으로 임명하지 않을수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봄스(Worms)에 있던 삼손 베르트하이머(Samson Wertheimer)를 비엔나로 오도록 했다. 베르트하이머는 랍비였으며 은행가였다. 베르트하이머는 비엔나 궁정에서 재정 관련 고위직을 맡았다. 아마 베르트하이머는 유태인으로서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고위직을 맡았던 마지막 인물일 것이다. 유태인으로서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고위직을 맡은 사람들을 Hofjude(호프유데: 궁정유태인: Court Jew)라고 불렀다. 호프유데에게는 일반 유태인들과는 달리 여러 특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베르트하이머는 당국의 유태인 추방이 임박하자 궁정 유태인이라는 직함을 버리고 아이젠슈타트로 내려가서 지냈다. 당시 아이젠슈타트를 통치하던 파울 1세는 유태인들을 와서 사는 것을 환영했다. 파울 1세는 갈란타의 에스터하지 공자였다.

 

비엔나의 유덴가쎄 어느 집에서 거행되고 있는 유태인 결혼식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가 통치하던 1736년에 비엔나에는 세파르디 유태인들이 소수나마 살고 있었다. 세파르디(Sephardi) 유태인이란 중동, 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유태인들을 말한다. 얼마후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에는 시내에 유태교 회당이 들어설 정도로 유태인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여러가지 제약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독일 지역, 또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온 아슈케나지(Ashkenazi) 유태인들에 대한 제약이 그나마 풀어진 것은 프란츠 요셉 1세 때였다.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주로 폴란드나 보헤미아 지방에 살던 유태인들이다. 이들은 처음엔 이디쉬어를 사용했으나 그것도 차츰 원래 독일어에 동화되었다. 참고로 아슈케나지와 연관이 있는 저명 유태인들을 몇 명만 소개한다면,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배우 사라 베른하르트,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영화감독 스탠리 쿠브릭 등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반종교개혁 캠페인이 마무리되고 이어 30년 전쟁도 끝나자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상황도 개선되었다. 마침 유럽에서는 계몽운동이 불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에도 영향을 미쳐 유태인의 기본권도 향상되었다. 1780년대에 들어서서 요셉2세의 Toleranzpatente(톨러란츠파텐테: Edict of Tolerance: 관용칙령)은 오스트리아에서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요셉2세의 관용정책은 주로 개신교와 그리스 정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그 틈에 유태인들도 초등학교에 들어가 의무교육을 받을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초등교육을 의무교육으로 한 것은 요셉2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 의해서였다. 유태인들은 학교 입학뿐만 아니라 군대와 대학교에도 들어갈수 있게 되었으며 농업, 공업의 일도 자유스럽게 할수 있게 되었다. 요셉2세가 유태인들에 대하여도 기회를 준 것은 이들로 하여금 사회에 기여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기존 시민들과의 경쟁력도 부추켜서 사회와 경제를 더욱 발전시키자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기존 시민들은 유태인들과 경쟁하게 되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여 계속 반대운동을 일 삼았다. 특히 상인조합(길드)이 그러했다. 유태인들은 처음에는 무역에만 종사했으나 차츰 생산업에도 손을 대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현재의 체코공화국)의 방직산업은 거의 독차지하였다. 게다가 원래부터 금융업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유태인들인지라 점차 은행업에도 진출하여 경제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비엔나에 발판을 둔 로트쉴트(Rothschild) 가문의 은행업은 알아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에게는 완전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레오폴드슈타트 거리에서 유태인들의 모습. 1915년. 지금도 간혹 네스트로이플라츠 등지에서 이런 유태인들의 모습을 볼수 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 전역에서 인권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퍼지게 해준 것이었다. 평등사상과 계몽주의는 비엔나에서 유태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와 함께 몇몇 유태인들은 비엔나에서 부와 정치적 세력을 획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태인에 대하여 고마움을 가지지는 않았다.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는 절대군주 체제의 오스트리아로서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불어닥친 국수주의, 공화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반교회적인 아이디어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군대의 지휘관들과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특히 그러하였다. 그런데 상당수 유태인들은 진보적인 프리메이슨이었다. 보수적인 계층과 진보적인 계층간의 반목은 점차 심화되어갔다. 물론 요한 에마누엘 바이트(Johann Emanuel Veith)와 같은 인물은 사회에 만연되어 가고 있는 반유태인 정서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커다란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유태인인 요한 에마누엘 바이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슈테판성당의 사제로서 강론을 하였다.

 

프랑스혁명 중에 파리의 튈러리궁을 공격하는 혁명세력. 1793년

 

1800년대에 들어서서 합스부르크 제국내의 유태인들의 숫자는 점점 증가하였다. 프라하의 유태인은 1800년에 모두 8천5백명 정도여서 전체 시민의 10%를 차지하였으나 1848년에는 1만 2천명 남짓이 되었다. 비엔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800년에는 고작 5백-6백명이어서 전체 시민의 0.25%였다. 더구나 당시에는 갈리치아 등 제국의 동쪽 변방으로부터 오는 유태인으로서 재산이 없는 사람은 아예 비엔나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8년에는 4천명으로 늘어났다. 1848년에는 마침 진보적 학생들과 국가주의자들에 의한 혁명이 일어났다. 유명한 3월 혁명이다. 상당수의 유태인 지식인들이 혁명세력에 동조하였다. 혁명의 결과, 1848년의 Pillersdorf(필러스도르프) 헌법이 채택되었다. 이에 의하여 제국 내에서 모든 종교의 자유와 민권이 보장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전제군주인 프란츠 요셉 1세 황제에 의해 혁명이 분쇄되자 그런 모든 자유는 없던 일로 되었다. 1851년의 새로운 조치는 유태인에게도 해당되었다. 유태인으로서 공직을 맡으려면 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1853년의 법령에 의하면 어떤 유태인도 토지를 가질수 없으며 이어 1855년의 법령에 의하면 유태인은 법률업무나 교사의 직업을 가질수 없게 되었다.

 

계몽주의 군주인 요셉2세

 

많은 수의 유태인들은 출판업에 손을 대었다. 당시에 출판업은 금지업종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신문과 잡지업에 종사하는 유태인들이 많게 되었다. 당시의 언론은 신구파로 갈라져 있었다. 보수적인 부류는 친합스부르크주의자, 가톨릭옹호자, 군주제 지지자 들이었다. 진보적인 부류는 반합스부르크주의자, 공화주의자, 종교자유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보수주의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반유태주의자들이 많았다. 진보주의 성향의 사람들 중에는 유태인 저널리스트가 많았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비엔나에는 유태인 문화가 서서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1867년의 헌법에 따라서 유태인들은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역사에서 처음으로 자기가 살고 싶은 장소에서 살수 있었으며 회당에 가서 제사를 드릴수 있었다. 레오폴드슈타트에는 비엔나의 전체 유태인 중 절반 이상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858년에는 레오폴드슈타트에 웅장한 회당이 건설되었다. 자이텐슈테텐가쎄에 있었던 슈타트템펠(Stadttempel)이다. 이 회당은 악명 높은 크리스탈나하트에도 피해를 입지않고 건재했어으나 2차 대전중에 폭격으로 일부가 파괴되었고 현재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지만 예전만큼 웅대한 것은 아니었다. 레오폴드슈타트의 이웃인 브리기테나우에도 유태인들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 브리기테나우는 1900년에 레오폴드슈타트와 분리되어 별도의 구(베치르크)가 되었다. 9구 알저그룬트에도 유태인들이 들어가서 살기 시작했다. 레오폴드슈타트, 브리기테나우, 알저그룬트의 유태인들은 비엔나 전체의 유태인들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은 주로 노동계급이었다. 그렇지만 열심히 일해서 중류 정도의 생활을 하였다. 어떤 유태인들은 무역을 하거나 카페를 운영하는 등 자영업을 하였다. 부유한 유태인들은 비엔나의 빌라 지역인 되블링이나 히칭에 살았다. 그런가하면 인네레 슈타트에 사는 보란듯이 살았던 유태인들도 더러 있었다. 유태인들은 비엔나 사회에 적극 동화코자 했다. 유태인들은 독일어와 히브리어의 혼합인 이디쉬(Yddish)어를 사용했지만 비엔나에서는 이디쉬어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유태인들은 점차 독일어만을 사용했다. 유태인들은 아이들에게도 전통적인 히브리 이름이 아니라 독일어 이름을 지어 주었다.

 

1938년 크리스탈나하트에 체포되어 정렬한 비엔나의 유태인들. 부헨봘트강제수용소로에 도착하여 점호를 받고 있다.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아우스글라이히(Ausgleich)라는 명칭아래 하나의 제국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와 함께 유태인들에게도 완전한 시민권이 주어졌다. 비엔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도시 중에서 유태인이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대부분 보헤미아, 모라비아, 헝가리에서 온 유태인들이었다. 갈리치아의 빈촌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비엔나의 유태인은 4만명에 이르렀다. 제국의 여러 도시에도 유태인들이 들어가서 살기 시작했다. 1816년 이래 유태인이 살지 않았던 잘츠부르크에도 유태인 콤뮤니티가 이루어졌다. 이렇듯 유태인들이 오스트리아의 곳곳에서 생업을 영위하자 오래전부터 불씨로 남아 있던 반유태주의(Antisemitism)가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뜻있는 유태인 지도자들은 이에 대하여 무슨 대책이던지 세워야 했다.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이 주도한 시온주의(Zionism)는 하나의 해결책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빌붙어 살며 구박을 받느니 차라리 힘은 들지만 시온산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유태인들만의 나라를 세우자는 주장이었다. 시온주의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유태인들도 있었다. 비엔나 사회에 동화되어 살고 있는 유태인들이 특히 그러했다.

 

1914년에 1차 대전이 일어났다.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를 하였다. 갈리치아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동부지역에서 거의 35만명에 이르는 주민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그 중에는 약 5만-7만명의 유태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거의 모두 비엔나의 북부역이 있는 레오폴드슈타트에 도착해서 잠 잘 곳을 찾았고 일자리를 찾았다. 얼마후 동부전선의 상황이 안정되자 피난민 중에서 거의 절반 가량이 굶어 죽어도 고향에서 죽자라는 생각으로 자기들 고향으로 돌아가긴 했다. 이렇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비엔나의 유태인 집단과 비엔나의 기독교 주민들 사이에 묘한 대립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태인들에게는 일종의 극복해야 하는 시련이었다. 동구에서 온 유태인 피난민들은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힘든 막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일자리가 없었다. 더구나 공장들은 유태인 피난민들을 고용하기를 꺼려했다. 독일에서는 유태인들이 고된 강제 노동으로 힘들어 했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나마 그런 일자리조차 얻지 못해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동구의 유태인들은 거리에서 행상을 하거나 구걸을 하면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비엔나 사람들은 그런 유태인들을 경계하고 혐오했다. 마치 이탈리아에서 집시들을 무시하고 경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이와 함께 비엔나는 물론, 오스트리아 전역에 걸쳐 반유태주의적인 감정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제국이 몰락하자 유태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스럽게 다닐수 있게 되었다. 비엔나의 유태인 사회는 다시 성장하였다. 그러한 상태는 1930년대 초반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게 되었다. 하나는 비엔나에서 태어났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오래 살았던 유태인으로서 대부분 기독교(로마 가톨릭)로 개종하는 등 비엔나 사회에 동화된 그룹이다. 다른 하나는 정통 유태인들이다. 세상 어디를 가서 살던지 정통 유태인으로서의 관습과 신앙을 유지하는 그룹이다. 두 그룹은 정치적으로도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동화된 유태인들은 사민당을 지지했지만 정통 유태인들은 자기들이 만든 유태인당을 지지함으로서 사민당에 반대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유태인들이 만든 유태인당은 세력이 약했고 또한 다른 모든 정당들이 반유태주의를 표방하였으며 어찌보면 사면초가였다. 다른 정당들은 심지어 유태인들을 당원으로 받아 들이지 않는 형편이었다. 아무튼 이 시기에 반유태주의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비엔나의 유태인 구역, 특히 레오폴드슈타트에서는 반유태 조직이 만들어져서 유태인들을 비방하는 전단을 만들어 뿌리는가 하면 심심찮게 시위도 벌였다. 신문들도 그런 반유태운동에 동조하였다. 프라터슈테른에서 사회주의자들과 공사주의자들이 반유태주의를 반대하는 모임을 가졌지만 모임은 반유태주의자들과의 폭력으로 마감되었다. 그러다가 독일 국수주의자인 요제프 모하플이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어떤 사람에게 살해되자 우익의 신문들은 이를 '레오폴드슈타트에서의 기독교 포그롬'이라면서 반유태주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그로부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반유태주의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레오폴드슈타트에 건달과 같은 나치 폭력배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로부터였다. 1929년 12월에는 나치 깡패(훌리간)들이 유태인 지식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카페 프로둑텐뵈르제(Cafe Produktenbörse)를 습격하여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어 1932년에는 카페 슈페를호프(Cafe Sperlhof)에 있는 유태인 기도실이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 훌리간들은 기도를 하던 유태인들이 구타했으며 건물에 쓰레기를 던져 넣었다.

 

유태인들은 '다윗의 별'이라는 것을 어깨나 가슴에 부착해야 했다. 이것은 유태인들이 인간에 가까운 인종들, 즉 인간이하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표시였다. 나치는 유태인들을 운터멘센(Untermenschen), 즉 서브 휴먼(Sub-human)이라고 불렀다.

 

유태인들은 무언가 의자할 대상이 필요했다. 상당수 유태인들은 사회주의 또는 시온주의 조직에 가담했다. 가장 규모가 큰 조직은 하쇼머 하차이르(Hashomer Hatzair: 청년방위대: The Youth Guard)와 포알레 시온(Poale Zion: 시온의 일꾼들: Workers of Zion)이었다. 유태사회주의노동청년연맹이라는 단체도 생겨서 여러 유태인들이 가입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일부 사회주의자들, 유태주의자들, 시온주의자들이 연합하여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거리를 순찰하거나 유태인들을 공격하는 하켄크로이츨러(Hakenkreuzler: 스와스티카 완장을 찬 사람들)들의 과격한 행동을 제지코자 했다. 이 공동 조직을 위디셰 젤브스트베르(Judische Selbstwehr: 유태인 자체방어대)라고 불렀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군대조직을 닮은 베타르(Betar: 요새)도 비엔나에서 활동하였다. 시온주의의 수정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사회당이 반유태적 공격을 부추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독일 인민당(Greater German People's Party)이라는 정당과 나치도 반유태운동에는 지지않으려고 나섰다. 이 시기의 반유태주의 운동을 적나라하게 설명한 작품으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인 휴고 베타우어(Hugo Bettauer: 1872-1925)의 '유태인 없는 도시'(Die Stadt ohne Juden: The City Without Jews)라는 것이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관심을 끌었던 작품이다. 어떤 정치가가 나타나서 비엔나에서 유태인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웃 나라에서 기차의 화물칸 30량을 빌려준다. 화물차에 유태인들을 밀어 넣고 동부로 보낸다. 얼마후 유태인이 없는 비엔나는 극장이 문을 닫고 은행과 백화점이 파산하는 등 심한 어려움을 겪는다. 시민들은 유태인들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고 외친다. 그리하여 유태인 추방법은 폐지되고 유태인들은 다시 비엔나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비유적으로 유태인들을 박해함으로서 존재의미를 가졌던 나치당이 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파멸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소설이 나오자 나치는 휴고 베타우어를 '붉은 시인'(Red poet)이라며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작가 후고 베타우어(1872-1925). '유태인없는 도시'의 작가이다.

 

1938년 3월에 나치와 오스트리아가 합병을 하기 하루 전날, 비엔나에서 유태인들이 모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치 추종자들이 일단의 유태인들을 마치 개를 끌고 가듯이 거리를 가로 지르며 끌고 다녔다. 유태인들의 집과 상점들은 약탈을 당했다. 오스트리아에서의 본격적이 유태인 박해 운동은그렇게 하여 본격화 되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자기들도 순수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안 민족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박해는 그해 11월 9-10일 양일간의 이른바 크리스탈나하트(Kristalnacht)로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하룻밤 사이에 비엔나에 있는 유태교 회당과 기도처는 모두 파괴되었다. 자이텐슈테텐가쎄에 있는 슈타트템펠만의 요행으로 폭도들의 발길을 피할수 있었다. 왜냐하면 주택지에 있었기 때문에 방화를 하면 주위의 주택들이 피해를 입을수 있기 때문이었다. 비엔나에 있는 거의 대부분 유태인 상점들은 약탈을 당하거나 문을 닫아야 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약 6천명의 유태인들이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들중 대다수는 다음날 다하우(Dachau)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뉘른베르크 인종법은 1938년 5월부터 비엔나에 적용되었다. 유태인들은 그동안 누리던 그나마의 자유를 모두 박탈당했다. 유태인들은 거의 모든 직장에서 쫓겨났다. 학교에서도 쫓겨났다. 그리고 노란 표지를 가슴에 달아야 했다. 유태인들은 점점 더 죽음의 골짜기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비엔나의 크리스탈나하트 여파

 

나치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유태인 조직들과 기관들을 폐쇄했다. 나치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유태인들이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기를 바랬다. 가지 않겠다고 하면 강제로라도 보낼 심산이었다. 나치의 계획은 성공했다. 1941년 말까지 연인원 13만 명의 유태인들이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그중에서 약 3만 명은 미국으로 떠났다. 모든 재산을 그대로 놓아두고 떠나야 했다. 대신에 제3제국을 떠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것 없이 과도한 액수의 제국비행세(Reichsfluchtsteuer: Reich Flight Tax)를 내야 했다. 제국비행세는 액수가 과다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여러가지로 까다로운 조건들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유태인들로서는 감히 추진하기가 어려운 과제였다. 특별한 사람들 몇몇은 국제기구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겨우 제국비행세를 내고 오스트리아를 떠날수 있었다.

 

1942년 1월에 베를린 인근의 봔제(Wannsee)에서 나치의 각 기관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비밀회의가 있었다. 유태인들을 완전히 처리하는 내용의 회의였다. 이에 따라 비엔나에 남아 있던 일부 유태인들마저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대략 6만 5천명 이상의 비엔나 유태인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중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2천 명도 채 안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동안 나치에 협조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홀로코스트를 저지른데 대하여 국제사회와 유태인들에게 어떻게 해명하고 사죄해야 할지를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은 의외로 오래 걸렸다. 결국 1991년 6월 브라니츠키 수상은 의회에서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독일 제3제국의 범죄에 동참한 것을 명백히 밝히는 성명서를 내놓았다. 비엔나의 유태인 인구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1938년 이전에 18만 5천여 명이었다. 전쟁이 끝난 1946년에는 비록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었지만 2만 5천 명만이 남아 있었다. 그 이후로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미국이나 남미 또는 호주 등지로 상당수가 이민을 떠났다. 물론 동구로부터 유태인들이 비엔나로 이민을 와서 정착하는 경우도 많았다. 1990년대 말에 비엔나의 유태인 수는 7천명 정도였다. 1989년 구소련의 철의 장막이 무너지자 구소련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비엔나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로 인하여 비엔나의 유태인 사회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92년에는 비엔나에 세파르디 센터(Sephardic Center)가 문을 열었다. 1994년에는 사회심리학적 센터인 에스라(Esra: Help)가 문을 열었다. 1999년에는 아우가르텐에 새로운 유태인 학교가 문을 열었다. 2000년에는 시내 중심지역의 유덴플라츠에 홀로코스트 기념 조형물이 제막되었다.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라는 사람이 설계한 것이다. 유덴플라츠에는 유태역사박물관도 문을 열었다. 비엔나 유태인 사회의 역사, 생활, 종교를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현재 오스트리아에는 얼마나 많은 유태인들이 살고 있는가? 2001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오스트리아에는 8천 1백 40명의 유태인들이 살고 있으며 그 중에서 6천 9백 88명은 비엔나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문화공동체(Israelitische Kulturgemeinde Wien)는 약 1만 5천 명의 유태인들이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다고 전했다. 어떤 자료는 약 2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레오폴드슈타트는 비엔나 유태인 생활의 센터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레오폴드슈타트에는 여덟 곳의 아슈케나지 회당과 세 곳의 세파르디 회당 또는 기도처가 있으며 유태인 교육기관은 일곱 곳이 있다.

 

오늘날의 도나우와 레오폴드슈타트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