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오스트리아 유태인

비엔나의 유태인

정준극 2014. 10. 4. 07:48

비엔나의 유태인 

번영과 박해의 역사

 

[본 블로그에서 오스트리아 유태인의 역사에 대하여 일고한바 있지만 다시 고찰하는 의미에서 정리해 보았다. 다른 항목의 설명과 내용이 대동소이하지만 이번에는 초기의 역사, 유태인 르네상스 시기, 반유태주의 운동, 2차 대전의 고난, 2차 대전 이후의 유태인 사회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비엔나는 인류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여러 유태인들의 고향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정신분석학자), 구스타브 말러(작곡가), 아르투르 슈니츨러(작가), 아놀드 쇤버그(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작곡가), 리제 마이트너(물리학자), 마르틴 부버(철학자) 등등 헤아일수 없이 많은 유태인들이 비엔나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제 비엔나의 유태인 사회는 어떤 변화를 겪으며 존속되어 왔는지를 편린이나마 고찰코자 한다.

 

 

비엔나 중심지의 유덴플라츠(유태광장). 오른쪽에 레싱의 기념상이 있고 광장 가운데에는 쇼아(홀로코스트) 기념 조형물이 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건물 중의 한 곳에는 비엔나 유태인들의 영욕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태박물관이 있다.

 

[초기의 역사]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혼돈스런  과거에서 영욕이 거듭되는 역사를 빏고 지내왔다.. 번영을 누렸던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박해를 받으며 고개를 숙이고 살았던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비엔나에 유태인들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전부터이다. 그런데 12세기에 비엔나에 살고 있던 유태인 중에서 16명이 기독교인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도 교황의 축복 속에서 유태인들을 살해한 끔찍한 일이었다. 1348년-49년에는 죽음의 검은 역병이 유럽의 여러 지역을 강타했다. 그런 지역에서는 유태인들 때문에 역병이 돌게 되었다면서 유태인들을 비난하고 박해했다. 그러나 비엔나는 유태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 박해를 받아 살던 집을 버리고 피난의 대열에 참가한 유태인들에게는 그런 비엔나가 안식처나 마찬가지였다. 비엔나에 유태인들이 점차 몰려와서 살기 시작했다. 비엔나 중심지역의 유덴플라츠에는 유럽에서도 규모가 큰 유태교 회당(시나고그)이 있었다. 그만큼 유태인들은 비엔나에서 별다른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지낼수 있었다. 14세기에 비엔나의 유태인은 전체 시민의 약 5% 정도를 차지했었다. 그런데 1420년에 유태인들을 싫어한 알브레헤트 5세 대공(1397-1439)이 비엔나에서 유태인들을 추방했다. 뿐만 아니라 유태인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유덴플라츠의 시나고그를 파괴했다. 파괴된 시나고그의 석재는 나중에 비엔나대학교를 건축할 때에 사용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알브레헤트 5세 대공은 어릴 때인 1405부터 오스트리아 대공이었다. 그는 독일왕, 헝가리왕, 보헤미아왕, 룩셈부르크왕을 겸했다. 이때에는 알브레헤트 2세라고 불렀지만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는 알브레헤트 5세가 된다.

 

 

인스부르크에 있는 알브레헤트 5세(알브레헤트 2세) 동상. 비엔나에서 유태인을 처음으로 추방한 인물이다.

 

유태인들은 그로부터 거의 30년 후인 1451년에야 비엔나에 돌아와 살수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황제들이 유태인들에게 신변을 보호해 주겠으니 비엔나에 들어와서 살라고 허락했기 때문이다. 아마 유태인들의 재산을 사용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유태인들을 핍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크라이나의 유태인들은 핍박을 피해서 비교적 차별대우가 없는 비엔나로 몰려왔다. 그러자 비엔나 당국은 1624년에 유태인들이 비엔나 시내에 들어와서 사는 것을 제한하고 다른 곳에서 살도록 했다. 당시에는 임 베르트(Im Werd)라고 부르는 곳이었으며 나중에는 레오폴드슈타트라고 불린 곳이다. 오늘날의 비엔나 제2구이다. 유태인들은 게토를 이루며 살았다. 훗날 이 지역이 레오폴드슈타트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레오폴드 1세를 기억하여서였다. 유태인들을 특별히 증오한 레오폴드 1세는 1670년에 임 베르트에 있는 유태인 게토를 해체하고 그곳에 있는 두개의 유태교 회당을 파괴했다. 그중 하나의 회당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 가톨릭 성당을 세웠다. 성레오폴드교회(Kirche St Leopold: Leopoldskirche)이다.

 

 

1733년의 레오폴드키르헤. 원래 레오폴드슈타트의 유태교 회당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로마 가톨릭 교회이다.

 

그런데 비엔나에서 유태인들을 모두 쫓아내자 문제가 생겼다. 부유한 유태인들이 모두 빠져 나갔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진 것이다. 황제는 어쩔수 없이 유태인들을 다시 비엔나로 불러 들여야 했다. 다만, 부유한 유태인에 한해서였다. 그래서 비엔나에는 다시 유태인들이 이민이 시작되었다. 역병이 지나고 나서 이민을 왔고, 우크라이나에서 이민을 왔고 이번이 세번째이다. 일부 유태인들은 궁정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지냈다. 물론 부유한 재산가들이었다. 이들을 호프유덴(Hofjuden)이라고 불렀다. 대표적인 인물은 사무엘 오펜하이머와 삼손 베르트하이머였다. 이들 호프유덴은 1683년 터키의 2차 비엔나 공성 때에 오스트리아 군대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터키군을 몰아내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래서 유태인들과 비엔나는 친선적인 관계를 유지할수 있었다. 1740년부터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실상 제국을 통치했다. 유태인들의 세력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태인들을 억압하는 여러가지 차별법들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유태인들은 세금을 더 내야 했으며 회당이나 탈무드 학교를 건설하는 것도 어려웠다. 아무튼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많은 제약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암울했던 시기가 풀린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요셉 2세가 황제가 되고부터였다. 계몽군주인 요셉 2세는 유태인들 악박하는 여러가지 규제들을 철폐하였다. 이때 비엔나에서 어떤 유태인이 인쇄소를 차렸고 그후 비엔나는 중부유럽에서 히브리어 서적들의 출판센터가 되었다.

 

 

레오폴드 1세. 오늘날 비엔나 제2구인 레오폴드슈타트는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이다. 그는 유태인 게토를 폐쇄하고 유태인 회당을 파괴하는 등 유태인 핍박에 앞장 섰었다. 그런데도 가톨릭은 나중에 그를 성자로 시성했다.

 

[유태 르네상스] 비엔나 유태인들의 르네상스는 대략 1848년부터 시작되어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고 본다. 1848년이라고 하면 젊은 프란츠 요셉 1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해이다. 1848년이라고 하면 또한 3월 혁명(Märzrevolution)으로 유럽의 곳곳이 어수선하던 때였다. 유태인들에게는 민권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자치적인 종교 집단을 구성하는 것도 허용되었다. 비엔나는 또한 일반적인 계몽운동인 하스칼라(Haskalah)의 센터가 되었다. 1867년에는 유태인에게도 온전한 시민권에 주어졌다. 그러자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동부로부터 많은 유태인들이 비엔나로 이민을 왔다. 특히 부코비나(Bukovina), 갈리치아(Galicia), 체코지역, 그리고 헝가리에서도 유태인 이외에 일반 백성들까지 비엔나로 몰려 왔다.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문화와 과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유태인 상인들, 기업인들, 은행가들, 공장경영자들은 비엔나의 경제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유태계인 홰니 폰 아르슈타인(Fanny von Arstein)은 비엔나 사교계에서 뛰어난 인물로서 그의 살롱에는 당대의 거물급 인사들이 드나들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도 찾아왔었고 모차르트도 찾아 왔었다. 그만큼 유태인들은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동했다. 유태인 중에는 의사로서 명성을 떨친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프레드 아들러, 빌헬름 라이히, 테오도르 라이크 등이다. 이때에 시온주의도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테오도르 헤르츨, 페스트 출신의 막스 노르다우(Max Nordau: 1849-1923)는 시온주의를 이끈 사람이다. 특히 막스 노르다우는 우간다 계획을 수립하여 관심을 끌었다. 우간다 계획(Uganda Scheme)이란 영국의 영향 아래에 있는 아프리카의 우간다에 땅을 확보해서 유태인들이 가서 나라를 세우고 살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시온주의의 또다른 주창자로서 유명한 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도 당시에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유태인들은 음악분야와 극장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구스타브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나중에는 아놀드 쇤버그), 오페레타 작곡가로서 유명한 오스카 슈트라우스(Oscar Straus), 역시 오페레타 작곡가인 엠메리히 칼만(Emmerich Kalman), 그리고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배우인 프리트 코르트너(Fritz Kortner), 역시 배우인 릴리 다르바쉬(Lily Darvas), 피아니스트인 엘리자베트 베르너(Elisabeth Berner) 등이 모두 유태계였다. 아르투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슈테판 츠봐이크(Stefan Zweig), 펠릭스 잘텐(Felix Salten), 페터 알텐버그(Peter Altenberg) 등은 모두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시인이며 작가들이다. 유태인들이 의학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것은 노벨의학상 수상자 네명중에서 세명은 유태인이란 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는 일이다. 비엔나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사, 치과의사들은 거의 절반이 유태계이다. 그리고 변호사와 대학교수의 60% 정도가 유태인이다. 사회민주당 지도층 중에서도 상당수가 유태인이다.

 

 

홰니 폰 아른슈타인

 

유태인들의 종교활동은 비엔나에 있는 두개의 시나고그(회당)에 집중되어 있다. 비엔나 시나고그와 레오폴드슈타트 시나고그이다. 자이텐슈테텐가쎄에 있는 비엔나 시나고그(슈타트템펠)는 1824-26년에 건설되었다. 슈타트템펠은 요셉 2세 황제가 주도한 '관용칙령'의 산물이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이 회당을 되도록이면 화려하게 꾸미고자 했다. 하지만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미면 공연한 미움을 받을 것 같아서 일단은 내부만 정성을 들여서 화려하게 꾸미도록 했다. 건물의 설계는 유명한 건축가인 요제프 코른하우젤(Josef Kornhausel)이 맡았다. 그리하여 겉 모양은 일반 주택처럼 보이게 했다. 또한 일반 교회에서처럼 첨탑(종탑)을 두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무리 관용정책이 제시되었다고 해도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높은 첨탑을 가질수 있었다. 그래서 슈타트템펠은 시나고그가 아니라 일반 아파트처럼 보였다. 덕분에 1938년 11월의 크리스탈나하트에서 슈타트템펠은 다행히 파괴의 참화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나치들은 슈타트템펠을 유태교 회당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일반 주택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 다른 시나고그는 레오폴드 시나고그(레오폴드템펠)이다. 1858년에 봉헌되었다. 비엔나에는 이 두개의 대표적인 시나고그 이외에도 약 40개에 이르는 작은 규모의 기도처와 유태인 사회봉사 사무실이 있었다. 비엔나에는 유태인들이 세운 여러 기관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1872년에 문을 연 로트쉴드 병원이다. 로트쉴드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유태인 은행가였다. 당시 비엔나 유태인 사회의 수석 랍비인 츠비 페레즈 샤예스가 주도하여 세운 고등학교와 사범학교도 있었다. 한편, 세계 최초의 유태박물관이 1895년에 비엔나에서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은 1938년 합병 때 퍠쇄되었다. 전시물들은 모두 나치가 압류했다. 비엔나의 유태인 수는 1860년에 불과 6,200명이었으나 1870년에는 42,000명으로 크게 늘어났고 19세기 말에는 14만 7천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던 1938년에는 비엔나의 유태인 인구가 18만 5천여명이었다.

 

 

안식일에 레오폴드슈타트의 유태인들

 

[반유태주의의 상승] 비엔나에서 유태인들은 생존을 위해 그야말로 열심히 노력해서 비엔나의 경제, 과학,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크게 기여하였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태인에 대하여 불안감을 느끼거나 공연한 증오감을 가지는 반유태주의도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반유태주의자 중에서 특히 유명했던 사람은 게오르그 쇼네러(Georg Schonerer)였다. 그는 유태인을 악마가 인간의 탈을 쓰고 나타난 존재라고 주장하여 모두 때려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행동으로 보이기 위해서 유태인이 소유자로 되어 있는 신문인 노이스 비너 타그블라트(Neuss Wiener Tagblatt)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기물들을 부수고 거기서 일하고 있는 유태인들을 심하게 구타하여 모두 병원신세를 지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신문의 발행을 잠시나마 중단토록 만들었다. 쇼너러는 체포되었지만 얼마후 석방되었고 이후 그를 지지하는 알도이치 파르티(Alldeutsch Parti)의 당원 중에서 무려 21명이나 오스트리아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니 그만하면 비엔나 사람들의 반유태 정서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노릇이다.

 

또 다른 반유태주의자로는 칼 루에거(Karl Lueger) 비엔나 시장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칼 루에거는 어찌보면 쇼너러보다 더 심한 인종주의자였다. 루에거는 1897년부터 1910년까지 13년 동안 무려 다섯 번이나 비엔나 시장으로 선출된 인물이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처음에 그를 지지하지를 않았다. 그러나 루에거가 계속 비엔나 시장으로 선출되고 정치세력이 점차 커지자 그를 지지하지 않을수 없었다. 러다보니 비엔나=루에거라는 공식이 성립될 정도였다. 칼루에거는 비엔나의 경제사정이 악화 된 것은 모두 유태인 때문이라면서 유태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대중들에게 반유태 정신을 고취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루에거는 개인적으로 유태인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자기 저택에서 유태인들을 초청해서 만찬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어쨋든 루에거 시장은 반유태주의 운동의 선봉 격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도 루에거와 쇼너러의 반유태주의 주장에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루에거와 쇼너러가 비엔나에서 반유태주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을 당시에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서북방의 작은 마을인 브라나우 암 인(Branau am Inn)에 별로 할 일 없이 지내고 있던 청년이었다. 훗날 히틀러는 그의 저서인 '나의 투쟁'(마인 캄프: Mein Kampf)에서 자기의 반유태주의 사상은 루에거와 쇼너러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털어 놓은바 있다. 1930년대에 비엔나에서의 반유태주의 운동은 사회민주당을 타겟으로 하여 겨냥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주로 유태인들이 주도하고 있던 정당이었다.

 

[2차 대전]

1838년 3월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과 합병되었다. 이를 안슐르스(Anschluss)라고 부른다. 원래는 접속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합병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이다. 두 나라의 합병이 선언되자 이제는 나치들이 길에서 공공연히 유태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유태인들을 붙잡아서 더러운 길바닥을 청소시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던 비엔나의 시민들은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유태인 상점들을 파괴하고 물건들을 약탈하는 비인간이 되었다. 그래도 누구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경찰도 팔짱을 끼고 바라만 보았다. 무엇때문에 성이 났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성난 시민들은 심지어 유태인 아파트까지 처들어가서 닥치는대로 부수고 훔쳐갔다. 유태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사회민주당은 완전히 분쇄되었다. 나치의 통치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명한 수많은 비엔나의 일반 시민들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끝내는 죽음을 마지했다. 나치는 1938년 5월부터 독일에서나 해당되던 뉘른베르크 인종법(Nürnberger Gesetze: Nuremberg Racial Law)을 오스트리아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뉘른베르크 인종법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다른 항목에서 다루었으므로 참고 바란다. 아무튼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뉘른베르크 인종법의 적용으로 그동안 누렸던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느닷없이 박탈 당할수 밖에 없었다. 유태인들은 대학에 다닐수가 없었고 거의 모든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검은 바탕에 노란 색의 다윗의 별 표시를 가슴에 달아야 했다. 유태인 기구들과 조직들, 그리고 교육기관 등은 문을 닫아야만 했다. 나치는 유태인의 해외 이민을 권장했다. 결과, 무려 13만 명이나 되는 유태인들이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그중에서 3만 명은 미국으로 갔다. 물론 나치는 유태인들의 이민을 허락하면서 막대한 돈을 받아 챙겼다.

 

 

크리스탈나하트 이후 유태인들은 거리로 끌려와서 추운날 거리에 물걸레질을 해야 했다. 그 모스블 바라고보 있는 비엔나의 시민들. 이런 모욕을 당하고 어찌 살수 있단 말인가. 될수만 있으면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 했다.

                                                 

유태인이 경영하는 상점이나 공장, 기업들은 11월 9일-10일의 크리스탈나하트 때에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도시 전체가 유태인 증오로 넘쳐나는 것 같았다. 비엔나에 있는 시나고그는 불길에 휩싸였다. 다행히 파괴로부터 피한 시나고그는 슈타트템펠 하나였다. 주택가에 있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탈나하트의 밤에 약 6천명의 유태인들이 체포되어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사정은 1942년 1월 독일 반제(Wannsee) 회의 이후에 더욱 악회되었다. 요행히 크리스탈나하트의 만행에서 도피하여 숨어 지내던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나치 당국의 검거작전에 견디지 못하고 거의 모두 체포되었다. 체포된 유태인들은 처형을 당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약 6만 5천명의 비엔나 유태인들이 강제수용소로 떠났다. 강제수용소에서 지내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존한 비엔나 출신의 유태인은 2천 여명에 불과했다. 비엔나에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나자 모습을 보인 유태인은 고작 8백여명이었다.

 

 

크리스탈나하트에 파괴된 레오폴드슈타트의 유태교 회당

 

[전후의 반유태주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반유태 정서는 별로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런 정서는 아마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1986년에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쿠르트 발트하임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발트하임은 외교관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오스트리아 대사도 맡아했고 외무장관도 지냈으며 유엔 사무총장도 지냈다. 그렇지만 그는 2차 대전 중에 나치 독일군의 정보장교 겸 통역관으로 복무한 경력이 있었다. 발트하임이 배속되어 있던 군부대는 살로니카의 유태인들을 추방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 부대는 유고슬라비아 저항운동가들과 민간인에 대하여 잔혹한 행동을 했다. 그런 군부대의 정보장교였던 발트하임을 대통령으로 뽑았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야 그 부대와 홀로코스트와의 연관성을 조사하였다. 그리하여 1991년 7월,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 부대의 행동이 나치 제3제국의 부추킴에 의해 어쩔수 없이 저지른 범죄행위였다고 발표했다.

 

 

쿠르트 발트하임 오스트리아 대통령.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2차 대전 중에는 독일군 정보장교로서 유고슬라비아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책임을 맡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현재의 상황] 오스트리아 정부는 과거에 유태인들을 핍박했던 사실을 인정하고 유태인들이 비엔나이던 어디던 자유스럽게 살수 있게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유태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유태인들은 보이던 보이지 않던 무시를 당하고 차별을 당하며 지내야 했다. 유태인들은 멋도 모르는 반달리즘에 시달려야 했고 스와스티카 그라프티에 모욕을 당해야 했으며 간혹 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 외르크 하이더라는 사람이 유태인들의 이민 반대와 국수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정당운동을 통해서 유태인 핍박운동을 펼치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하이더는 홀로코스트는 정당한 것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내세웠고 나치의 정책과 행동이 합법적이었다는 식의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런가하면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오스트리아 사회가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믿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일반인들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에 있어서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앞잡이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국제적인 이해 증진을 도모하고 있다. 그런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가 시몬 비젠탈이란 사람이다. 나치 사냥꾼으로 이름난 사람이다.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자료들을 최대한으로 수집하여 많은 사람들이 참고토록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늘날 시몬 비젠탈의 홀로코스트 자료는 아마 세계 최고일 것이다. 또 한 사람은 페터 지히로브스키이다. 그는 '고향에서의 이방인'(Strangers in Their Own Land)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오늘날 유태인들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어떻게 박해를 받아오며 지내왔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비엔나의 유태인 사회(게마인데: Gemeinde)는 전국 이스라엘 문화협회(Bundesverband der Israelitischen Kultusgemeinden)에 속하여서 운영되고 있다. 모든 유태인들은 자기들의 연간 수입에서 일정 금액을 협회에 기부하여 이스라엘 문화협회의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협회는 무주택 고령자를 지원하는 사업, 일반 유태인 교육사업, 유치원 운영사업 등을 펼치고 있도 또한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학생연맹 등 차세대 유태인들을 지원하는 사업도 수행하고 있다. 유태인 공동묘지를 관리하는 것도 협회의 몫이다. 비엔나의 세파르디 협회는 1922년에 재발족하였다. 이 협회는 두개의 시나고그를 건설했고 유태인 회관도 마련해서 유태인 축제행사 등을 치룰수 있도록 했다. 1980년에는 이른바 '웰컴 서비스'(Welcome Service) 사업이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정보센터이다. 비엔나 유태사회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종교활동] 비엔나에는 현재 15개의 시나고그가 있다. 그 중에서 본부는 1구 자이텐슈테테에 있는 슈타트템펠이다. 슈타트템펠은 나치의 크리스탈나하트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 남았지만 2차 대전의 포화로 피해를 본 시나고그이다. 이곳에 유태인 협회 사무실이 있고 수석 랍비의 사무실이 있다. 슈타트템펠은 피해복구를 하여 1963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 자이텐슈테텐가쎄 4번지이다. 슈베덴플라츠 인근의 루프레헤츠교회 부근이다. 그런데 1982년에 이곳에 폭탄테러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는 경비가 철저하다. 슈타트템펠의 내부는 다른 어느 시나고그보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정통파(오토독스) 회당이기 때문에 아직도 여자들을 위한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슈타트템펠 내부(자이텐슈테텐가쎄 4번지)

 

[교육사업] 비엔나에는 유태인 유치원들이 여러개가 있고 초등학교 한 곳, 고등학교 한 곳이 있다. 고등학교 격인 츠비 페레츠 김나지움은 거의 50년 동안 문을 닫고 있다가 1990년대 말에 다시 문을 열었다. 츠비 페레츠 김나지움은 2차 대전 중에 비엔나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추방할 때에 집합 장소로 이용되었다. 초정통(울트라 오토독스) 협회는 별도의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별개의 학교들을 운영하고 있다. 2004년 2월에는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예쉬바가 준공되었다. 탈무드를 주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일종의 대학이다. 비엔나에는 유태인 스포츠 클럽도 있다. S.C. Hakoah(스포츠 클럽 하코아)이다. 종전의 레오폴드 시나고그가 있던 자리에 세운 건물에 본부를 두고 있다. 레오폴드 시나고그는 1938년 크리스탈나하트 때에 파괴되었었다. 비엔나에는 코셔 식당이 두 곳이 있다. 그리고 코서 수퍼마켓도 있고 코셔 정육점, 코셔 제과점도 별도로 있다. 유태인 잡지나 신문은 많이 있다. 월간 Die Gemeinde(협회보)가 대표적이다. 이스라엘 문화협회의 공식 기관지이다.

 

[비엔나 유태인 인구] 비엔나에는 비엔나에 원래 정착해서 살고 있던 유태인들 이외에도 동구에서 홀로코스트의 고난을 극복하고 생존하여 비엔나에 온 피난민들, 2차 대전 중에 다른 나라로 피신했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들, 이란 유태인들로서 정치적 망명으로 비엔나에 온 사람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엔나는 냉전시대에 소련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유태인들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1960년 이후 오스트리아를 떠나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는 유태인들이 점점 증가했다. 5천 4백명 이상의 오스트리아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에서 살기 위해 떠났다. 1990년 말에 비엔나에는 공식적으로 7천명의 유태인이 있었다. 공식적이라고 말한 것은 유태인 협회에 등록한 숫자를 말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대략 1만 5천명 이상의 유태인이 비엔나에 살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엔나에서 유태인 더 알기] 유태박물관은 비엔나 유태인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비엔나의 발전을 위해서 유태인들이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전시해 놓은 곳이다. 다음으로 흥미있는 박물관은 오스트리아 저항운동 박물관이다.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이 나치에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비엔나 시내의 곳곳에는 유태인들이 벌인 지하운동을 기리는 명판들이나 기념상들이 있다. 알베르트 미술관 앞의 광장에 있는 파치슴 반대 조형물이라든지, 과거 메트로폴 호텔이 있었던 자리의 인근(모르친플라츠)에 나치희생자 기념물이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로사우어 공동묘지는 유태인 공동묘지로서는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16세기부터 사용되던 것이다. 2차 대전 중에 상당수 묘지들이 훼손되었으나 근자에 새단장하였다. 유덴플라츠에 있는 유태박물관에는 알브레헤트 5세가 파괴한 유태교 시나고그의 유적이 전시되어 있다. 유덴플라츠에는 오스트리아 홀로코스트 희생자 기념조형물이 있다. 나치에 희생된 오스트리아 유태인 6만 5천명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2000년에 제막되었으며 강화 콘크리트 사각형 구조물이다. 콘크리트 벽돌은 7천개이다. 7천권의 책을 상징한다. 그런데 책들이 제본한 쪽이 바깥 쪽이 되게 설치했다. 한쪽에 있는 문은 잠겨져 있다. 보티프키르헤의 인근에 지그문트 프로이트 기념관이 있다. 프로이드의 생전대로 보존되어 있다. 일기장도 있고 그가 피우던 파이프도 있으며 지팡이도 있다. 그리고 정신분석을 받는 환자가 누워있던 소파도 있다. 유태인들을 기억하는 곳이 비엔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젠슈타트에도 유태박물관이 있다. 합스부르크 왕실에 봉사했던 삼손 베르트하임이 살던 집을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호에넴스(Hohenems)에도 유태박물관이 있다. 또 하나의 역사적 장소는 린츠 부근 도나우 강변에 있는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이다. 가장 처참하고 잔혹했던 나치의 강제수용소였다.

 

[비엔나의 유태관련 기관]

- Israelitische Kultusgemeinde(이스라엘 예배-교육 공동체) - Seitenstettengasse 4

- Stadttempel(슈타트템펠) - Seitenstettengasse 4

- Or Chadasch(오르 하다슈: 진보적 유태교 모임) - Robertgasse 2

- Jewish Welcome Center(유태 봉사 센터) - Stephansplatz 10

- Alef Alef(알레프 알레프: 히브리어 연구교육기구) - Seitenstettengasse 2

- Museum Judenplatz(유덴플라츠 박물관) - Judenplatz 8

- Jüdisches Museum der Stadt Wien(비엔나 유태박물관) - Dorotheergasse 11

 

 

1구 도로테어가쎄 11번지의 비엔나 유태 박물관(Judisches Museum W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