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오스트리아 유태인

레오폴드슈타트와 유태인

정준극 2014. 10. 2. 20:19

레오폴드슈타트와 유태인

 

비엔나의 제2구인 레오폴드슈타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레오폴드 1세를 기억하여서 붙인 지명이다. 일찍이 17세기 중반에 비엔나 시당국은 유태인들보고 도나우 건너의 교외에 적당한 땅을 마련해 줄테니 그곳에 가서 살라고 하며 사실상 유태인들을 비엔나 시내에서 쫓아냈다. 당시 도나우 건너편 지역은 벌판과 같은 곳이었다. 물론 사람들도 더러 살고 있었다. 그래도 지명만은 그럴듯하게 '임 베르트'(Im Werd)라고 불렀다. 발전하고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유태인들은 게토를 이루어 살았다. 유태인들의 게토 지역을 '운테러 베르트'(Untere Werd)라고 불렀다. 베르트 지역의 아랫쪽에 있다는 뜻도 되지만 덜 발전된 지역이라는 뜻도 있다. 세월이 흘러 그곳에 정착한 유태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이 지냈다. 유태인 주민들의 수도 상당히 늘어났다. 그러한 때에 유태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레오폴드 1세가 유태인들은 비엔나에 살지도 말며 새로운 구역인 운테레 베르트에도 살지 말며 니더외스터라이히에도 살지 말라고 했다. 유태인들은 보따리를 싸서 다시 나라 없는 설음, 집없는 설음을 삼키며 남부여대해야 했다. 원래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유태인들이 떠나자 황제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지역의 이름을 레오폴드슈타트라고 바꾸어 불렀다. 그러다가 또 세월이 흘러서 시대가 바뀌자 유태인들은 옛날에 살던 레오폴드슈타트에 하나둘씩 들어와서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프란츠 요셉 황제 시절에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와 대타협을 거쳐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이 되자  제국의 동부지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레오폴드슈타트로 상당수가 몰려와서 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유태인 이민자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지금의 프라터슈테른 기차역(전에는 노르드반호프: 북부역) 주변 지역에 정착해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프라터슈테른 기차역 일대에는 동구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특히 멕시코교회(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교회) 일대(포아가르텐슈트라세 일대)는 정기적으로 동구 사람들의 장이 서는 곳으로 유명하다.

 

2구 템펠가쎄에 있었던 레오폴드슈타트 회당(템펠)의 웅장한 모습. 1938년 11월 10일 크리스탈나하트에 완전 파괴되었다.

 

프라터슈테른 기차역 일대에 유태인들이 많이 몰려와서 살게 되자 사람들은 이 지역을 '마쩨스인젤'(Mazzesinsel)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마쩨스인젤이라는 말은 '마초(Matzo)의 섬'이라는 뜻이다. 마초(또는 Matza, Matzah)는 유태인들이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을 말한다. 유월절은 애급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가 인도하여 출애급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유태인들은 그때의 어려웠던 생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無酵餠)을 만들어 먹는다. 그로부터 무교병(마초 또는 마차)이라는 말은 유태인들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레오폴드슈타트의 유태인 게토를 '마초의 섬'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이다. 한때 레오폴드슈타트에는 비엔나에서도 이름 있는 유태교 회당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레오폴드슈타트 회당(Leopoldstädter Tempel)이었다. 이밖에도 이 지역에는 터키에서 이민 온 유태인들을 위한 터키 회당(Türkischer Tempel), 폴란드에서 온 유태인들을 위한 폴란드 회당(Polnische Schul), 파츠마니텐가쎄에 있었던 파츠마니텐회당(Pazmanitentempel), 그리고 탈무도 또는 토라를 공부하는 교육기관인 예쉬바(yeshiva)들도 여럿 있었다. 레오폴드슈타트 회당은 네스트로이플라츠 인근의 템펠가쎄에 있었으나 1938년 11월 10일 이른바 크리스탈나하트(Reichskristalnacht: 깨진 유리의 밤)에 파괴되었고 현재는 회당이 있던 장소에 새로 지은 건물이 들어 섰는데 그 건물의 벽에 모자이크로 과거 회당의 모습을 그린 것이 있어서 예전에 그런 모습의 회당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이와 함께 벽면에는 원래의 회당이 크리스탈나하트에 파괴되었다는 내용의 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레오폴드슈타트 회당은 홀로코스트 이전에 비엔나에 있는 유태정교회 회당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비엔나의 유태인들을 이 회당을 Israelitische Bethaus in der Wiener Vorstadt Leopoldstadt(비엔나 교외의 레오폴드슈타트에 있는 이스라엘 장막)라고 불렀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Khal Adas Yiusroel(칼 아다스 이우스로엘)이라고 했다. 터키 회당은 세파르디 유태인(Sephardi Jews)들을 위해 지은 회당이다. 세파르디는 터키에서 이민온 유태인들을 일컫는 단어이다. 그래서인지 터키 외당은 이슬람 양식의 건물이었다. 터키 회장은 1938년 11월 크리스탈나하트에 파괴되어 지금은 그때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볼수가 없다.

 

2구 템펠가쎄에는 레오폴드슈타트 회당이 있었다. 그 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건물의 벽에 옛날 회당의 모습을 모자익으로 그려 놓았다.

 

레오폴드슈타트의 유태인들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부터는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했고 심심하면 테러를 당했으며 종국에는 아우슈비츠 등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수천명 주민으로 한때 활기에 넘쳤던 레오폴드슈타트의 유태인 구역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만, 그저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유태인들만이 숨어 지내다가 살아 남아서 종전을 지켜보았다. 레오폴드슈타트에 유태인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89년 소련의 철의 장막이 걷히고나서 부터이다. 구소련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하나 둘씩 레오폴드슈타트로 모여 들어서 지금은 비록 옛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규모의 유태인 구역을 만들어 살고 있다. 코셔 식품을 파는 집들도 많아졌다. 유태인 식당들도 생겼다. 회당들도 다시 짓기 시작했고 탈무드를 가르치는 예쉬바들도 들어섰다. 전에는 노동자 계급의 유태인들이 많이 살았지만 지금은 대체로 생활이 안정된 유태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2008년에 비엔나에서 유럽축구대회가 열리는 것과 함께 U2 지하철 노선이 메인 스터디움까지 연장되자 축구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레오폴드슈타트는 점점 비엔나의 중심지 비슷하게 변모하였다.

 

레오폴드슈타트 프라터슈트라쎄의 옛 모습

 

레오폴드슈타트 출신의 저명인사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거의 모두 유태인 계열이다. 

 

- Bernd Fasching(1955-): 화가, 조각가

- Sigmund Freud(1856-1939): 정신분석학자

- Bernhard Gal(1971-): 작곡가, 음악학자

- Jazz Gitti(1946-): 가수

- Karl Goldmark(1830-1915): 작곡가

- Clemens Haipl(1969-):

- Theodor Herzl(1860-1904): 시온주의자

- Rudolf Hilferding(1877-1941): 경제학자

- Ludwig Hirsch(1946-2011): 배우, 작사자

- Hans König(1947-): 정치인, 작가

- Fritz Kreisler(1875-1962):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 Marie Langer: 정신분석학자

- Lise Meitner(1878-1968): 핵물리학자

- Robert Menasse(1954-): 작가

- Johann Nestroy(1801-1862): 극작가, 배우, 가수

- Richard Neutra(1892-1970): 건축가

- Klaus Nuchtern(1961-): 저널리스트

- Alfred Polgar(1873-1955): 작가

- Michoel Pressburger: 랍비, 쉬프슐(Schiffschul) 지도자

- Arthur Schnitzler(1862-1931): 작가

- Arnold Schoenberg(1874-1951): 작곡가

- Jura Soyfer(1912-1939): 저널라스트, 작가

- Max Steiner(1888-1971): 영화음악 작곡가. 1920년 미국 귀화

- Ursula Stenzel(1945-): 정치인, 한국과의 인연이 많은 사람

- Johann Strauss I(1804-1849): 작곡가

- Johann Strauss II(1825-1899): 작곡가

- Hannes Swoboda(1946-): 정치인

- Katharina Waldmüller(1792-1850): 성악가(메조소프라노)

- Klaus Werner-Lobo(1967-): 작가, 정치인

- Billy Wilder(1906-2002): 영화감독 겸 제작자

- Alexander von Zemlinsky(1871-1942): 작곡가

 

우르술라 슈텐첼. 그라벤에서.

 

우르술라 슈텐첼은 2005년 이래 1구 인네레 슈타트의 구청장이다. 그는 그라벤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드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2006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을 지냈다. 오스트리아인민당에 속한 그는 유럽인민당 집행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유럽의회에서는 외교분과위원회에 속해 있었다. 그는 또한 현재에도 한반도 문제 대표단의 의장을 맡고 있으며 정부의 안전보장 및 국방 분과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그는 유태인 후손이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북부철도 회사의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랍비의 딸로서 로텐슈테른가쎄에 있는 유태교 회당의 칸토였다. 그는 비엔나대학교에서 저널리즘, 정치과학, 현대사 등을 전공했고 1972-1999년에 ORF의 저널리스트로 재직했었다. 그는 간혹 그의 보수적인 입장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1구 인네레 슈타트에 있는 상점들의 폐점시간을 종전대로 5시로 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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