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오스트리아 유태인

비엔나필 유태인 음악가들의 운명

정준극 2013. 4. 16. 17:23

비엔나필 유태인 음악가들의 운명

나치 합병 75년 만에 전모 밝혀져

 

빈필의 비엔나악우회 황금홀에서의 연주

                      

2013년은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된지 75주년이 되는 해이다. 75주년이 된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기념행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계적인 비엔나필이 당시 단원으로 있던 유태인들에 대하여 어떻게 처우했는지에 대한 자료가 75년 만에 밝혀져서 화제가 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5명의 단원이 나치가 만들어 놓은 죽음의 수용소 또는 게토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였고 2명의 단원이 강제수용소에는 끌려가지는 않았지만 박해를 받아 죽었다. 그리고 도합 13명의 유태인 단원들이 강제 해고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으나 사학자들로 구성된 파넬이 빈필의 문서창고를 조사하여 그같은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음악과 정치와 사상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빈필에서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뛰어난 단원들이 축출을 당하고 마침내 죽임을 당해야 했다는 것은 빈필 역사의 오점이 아닐수 없다.

 

1938년 3월 23일 빈필의 바이올리니스트인 빅토르 로비체크(Viktor Robitsek)는 그날도 평상시와 같이 악우회 건물에 출근하였다. 그런 그에게 문서 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고통지서였다. 아무런 이유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로비체크에게 죄가 있다면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고 아울러 유태인이라는 것이었다. 3월 23일은 히틀러가 비엔나에 당당하게 입성한 날로부터 불과 열흘 밖에 지나지 않은 날이었고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 당한지 불과 5일 전이었다. 독-오 합병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빈필과 같은 정치무풍지대에서 유태인을 축출하는 조치가 이루어졌으니 나치의 치밀한 사전작업은 과연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당시 비엔나의 거의 모든 시민들은 나치를 열렬하게 환영하였다. 개중에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총통을 추종하는 열렬 비엔나시민 중에는 로비체크의 친구들도 여럿이나 있었다. 그중에서 반수는 이미 나치 당원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우정과 예술이라는 것이 아무런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로비체크를 비롯한 빈필의 유태인 단원들은 나치 추종세력에 의해 빈필을 떠나야 했다. 문제는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단원으로서 음악을 창조하던 사람들이 유태인 단원들을 추방하는데 모두 뜻을 같이 했다는데 있다. 놀라운 인심이었다. 1942년,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는 전체 123명의 빈필 단원 중에서 60명이 열렬 나치 당원이었고 그중에서 2명은 SS 대원이기도 했다. 이같은 숫자는 오스트리아 전체 국민 중에서 나치의 비율보다도 많은 것이었다.

 

나치에게 있어서 음악은 선전도구로서 대단히 중요한 품목이었다. 당시에는 베를린 필과 빈필이 서로 라이발 관계로서 활동했다. 이들 교향악단에 소속된 음악가들은 나치 치하에서 경력을 보존 받으려고 일부러 나치당에 가입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빈필의 신년음악회는 80개 나라에서 5천만 인구가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되었지만 비엔나 신년음악회는 1939년 나치가 선전목적으로 시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은 비엔나 신년음악회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등 요한 슈트라우스 가족의 음악들을 연주하지만 1939년 이전에는 신년음악회를 통해서 비엔나의 왈츠를 연주케 하여 나치 시대의 영화를 선전코자했다.

 

사학자들로 구성된 빈필의 파넬이 자료들을 조사한 결과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빈필을 1942년 창설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치의 고위인사로서 당시 악명이 높았던 비엔나의 총독 발두르 폰 쉬라흐(Baldur von Schirach)에게 명예 반지를 전달하고 그가 빈필에 기여한 공적을 높이 치하했다는 것이다. 폰 쉬라흐는 비엔나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 수만명을 강제수용소로 보낸 장본인이었다. 빈필은 그런 그에게 명예 반지를 선물로 주었다. 빈필은 비단 쉬라흐 뿐만 아니라 다른 나치 인사들에게도 반지 또는 메달을 주었다. 예를 들면 히틀러의 최측근 중의 하나인 아르투르 차이스 인크바트, 비엔나 시장이던 한스 블라슈케 등이었다. 문제는 75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그들이 빈필로부터 받은 영예가 그대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사학자들은 쉬라흐를 비롯한 당시의 나치들에게 주었던 반지나 메달은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는 2차 대전이 끝났지만 전쟁 중에 히틀러의 제3제국을 위해 어떤 역할을 했으며 특히 홀로코스트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인정을 일부러 미루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1년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그런데 빈필은 나치와 합병된지 7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아무런 공식적인 사과 또는 유감의 표시가 없어서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비단 빈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다른 단체들도 그런 자세를 취해 왔던 것은 참으로 이상하고도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단체들은 의도적으로 나치의 망령을 보호해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빈필의 나치성향이 밝혀지자 이제사 빈필 당국은 나치 인사들에게 주었던 명예의 반지를 회수해야 한다는 논의를 시작했던 것이다.

 

사학자들의 파넬이 조사한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트럼펫 주자였던 헬무트 보비슈(Helmut Wobisch)의 역할이었다. 열렬 나치 당원이던 그는 나중에 SS 대원이 되었다. 보비슈는 쉬라흐의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쉬라흐는 전쟁이 끝나자 재판을 받고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가 인정받아 베를린의 슈판다우 감옥소에서 지내다가 1966년인가 1967년인가 석방되었다. 쉬라흐는 감옥소 생활을 하면서도 빈필이 준 반지를 자랑으로 여기며 지냈다. 그러다가 석방에 즈음해서 반지를 잃어버렸다. 보비슈가 쉬라흐에게 다른 반지를 주었다. 아직도 나치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어서였을 것이다. 보비슈는 사실상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빈필에서 추방당해야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치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2년후에 다시 빈필 단원으로 들어왔고 트럼펫 수석주자가 되었다. 전쟁후에 빈필은 탈나치 운동을 펼쳤으며 그로 인하여 4명의 나치 당원이 해고되었고 6명에게는 연금지급이 중단되었다.

 

1941년 전쟁 중 빈필의 뷰카레스티 연주회. 나치의 점령 하에서는 나치를 위한 연주회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빈필의 단원으로서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추방되어 결국은 죽임을 당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제1 바이올린의 모리츠 글라타우어(Moriz Glattauer)는 비엔나의 유태인 단체의 멤버였다. 빈필에는 1916년에 들어왔으므로 20년이 넘은 경력이었다. 그와 그의 부인은 비엔나에서 살고 있던 집에서 강제로 쫓겨났다가 1942년에 프라하 서북방에 있는 테레지엔슈타트에 있는 유태인 게토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글라타우어는 다음해인 1943년에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은 1945년에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처리되었다. 제2 바이올린의 빅토르 로비체크는 빈필에서 35년간 근무했지만 1938년 3월에 해고되었다. 로비체크는 유태인이지만 벌써 몇 해전에 유태인 사회와는 관계를 맺지 않고 지냈으며 유태교 회당에도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와 그의 부인은 비엔나에서 네번이나 집을 옮기며 쫓겨다녀야 했다. 1941년 10월 빈필의 이사인 빌헬름 여르거는 비엔나 총독인 발두르 폰 쉬라흐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여 연로한 로비체크 부부를 추방하지 말아 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빈필의 청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로비체크 부부는 유태인 게토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1942년 6월에 살해당했다. 그의 부인은 1942년 3월에 죽임을 당하였다. 제1 바이올린의 막스 슈타르크만(Max Starkmann)도 비엔나에서 추방되어 게토로 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제1 바이올리의 율리우스 슈트베르트카(Julius Stwertka)는 구스타브 말러가 특별히 단원으로 영입한 뛰어난 연주자였다. 슈트베르트카와 부인 로사는 테레지엔슈타트의 유태인 게토로 끌려갔다. 슈트베르트카는 몇 주 후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인은 1944년에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역시 죽었다. 오보에의 아르민 티롤러(Armin Tyroler)는 빈필에서도 가장 뛰어난 연주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티롤러는 빈필에 대한 공로로 1933년 비엔나의 명예시민으로 임명되기까지 했다. 그런 티롤러이지만 부인과 함께 1942년에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송되었다. 티롤러는 그곳에서 유태인문화기구를 만들고 콘서트를 열었다. 1944년 10월에 그와 그의 부인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 며칠 후에 가스실로 들어갔다.

 

[후기: 2013년 10월 23일 빈필은 연차회의에서 공식투표를 통해 나치의 고위 인사 6명에게 수여했던 금메달과 금반지를 무효로 하기로 결정했다. 뒤늦은 참회의 제스추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