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잘텐(Felix Salten)
아기 사슴 밤비의 창안자
펠릭스 잘텐
펠릭스 잘텐은 20 세기 초반 유럽을 뒤흔든 에로 소설 '요제피네 무첸바허'(Josephine Mutzenbacher)의 저자로 알려지 인물이다. 1906년에 발간된 이 소설은 어떤 비엔나 창녀의 자서전적 경험담을 적은 것이다. 문제는 그 창녀의 섹스 경험 중에서 불과 5세때부터 12살까지의 경험을 기술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동 포르노의 전형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요제피네 무첸바허'는 여러 나라에서 번역출판되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펠릭스 잘텐은 또한 1923년에 '밤비'(Bambi)라는 소설을 내놓았다. 이 소설은 1928년 영어로 번역되어 영국에서 Book-of-the-Month로 선정되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1933년 그는 이 소설의 영화제작권을 시드니 프랭클린이란 영화제작자에게 단돈 1천불을 받고 팔았다. 시드니 프랭클린은 나중에 밤비의 판권을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에게 많은 돈을 받고 팔았다. 디즈니는 1942년 밤비라는 만화영화를 제작하여 전세계 어린이들의 환영을 받았다. 잘텐이 프랭클린에게 밤비의 영화제작권을 팔았던 1933년은 나치가 비엔나에서 득세하여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해였다. 그리고 1938년 마침내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독일과 합병하였다. 이와 함께 히틀러는 잘텐이 유태계라는 이유로 그의 작품들을 모두 금서로 지정하였다. 잘텐은 비엔나에서 견디지 못하여 스위스로 빠져나갔다. 그는 취리히에서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에로 소설의 대명사인 '요제피네 무첸바허'의 표지
펠릭스 잘텐은 186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여 있었으므로 잘텐은 오스트리아 작가이다. 더구나 잘텐은 태어난지 3주 후에 비엔나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비엔나 사람이다. 19세기 후반에 비엔나는 유태인에 대한 완화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잘텐의 가족들도 헝가리를 떠나 비엔나로 와서 살게 되었다. 잘텐의 원래 이름은 지그문트 잘츠만(Sigmund Salzmann)이었다. 비엔나온 잘텐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파산하였다. 잘텐은 학교를 그만두고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일했다. 문학에 대한 재능이 있었던 잘텐은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시를 썼고 잡지에 서평을 썼다. 비엔나의 신진 작가 그룹에 속하게 된 잘텐은 융 빈(Jung Wien)의 멤버로서 활동하였다. 얼마후 잘텐은 보험회사를 그만 두고 비엔나 신문에 극장평을 쓰는 전임작가가 되었다. 이어 그는 단편, 희곡, 소설, 여행기, 수필집 등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엔나의 거의 모든 신문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그는 영화극본과 오페레타 대본도 썼다. 1927년, 잘텐은 오스트리아 PEN 클럽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펠릭스 잘텐은 인기 여배우 오틸리 메츨(Ottilie Metzl)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파울과 안나-카테리나였다. 그가 쓴 소설 Perri(페리)와 The Hound of Florence(플로렌스의 개)는 디즈니 영화인 Perri 와 The Shaggy Dog 에 영감을 준 것이었다. 밤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련의 소설들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1926년에 내놓은 Bambi, A Life in the Woods 와 1942년에 쓴 Bambi's Children: The Story of a Forest Family 가 그것이다. 펠릭스 잘텐은 1945년 취리히에서 세상을 떠났다.
소설 '밤비'의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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