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시인과 작가

[참고자료] 비엔나와 마크 트웨인

정준극 2012. 8. 8. 19:10

[참고자료] 비엔나와 마크 트웨인

 

1898년 비엔나에 체류하고 있을 때의 마크 트웨인

 

'우리는 우리가 죽고 난 후에 장의사마저 우리의 죽음을 슬퍼할만큼 훌륭한 생애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좋은 책이 있어도 읽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이 있는지도 몰라서 읽지 못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

'나는 천국이 어떻고 지옥이 어떻다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 양 쪽에 다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낳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의 말이다.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유머리스트이며 풍자가이고 수필가이며 작가였다. '톰소여의 모험'은 온 세상 어린이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선사해준 그의 대표작이다. 그 마크 트웨인이 비엔나에서 약 20개월을 보냈다. 식구들과 함께 1897년 9월에 와서 1899년 5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7년 9월 28일 비엔나에 도착한 마크 트웨인의 식구들은 우선 1구 프란츠 요세프스 카이 인근에 있는 유명한 메트로폴 호텔에 머물렀다. 메트로폴 호텔은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합병한 이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치 게슈타포의 본부로 사용되어서 수많은 지식인들과 유태인들을 소환하여 고문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장소이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 마자 비엔나 시민들이 너도나도 몰려와서 호텔을 부순 일이 있다. 현재 그 장소에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그 부근의 공지에 옛 메트로폴 호텔을 기염하여서 파치슴을 경고하는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그 메트로폴 호텔이 치욕의 간판을 얻기 전에 마크 트웨인이 가족들과 함께 그 호텔에서 무려 8개월 이상을 지냈다.

 

1900년대 초의 메트로폴 호텔. 나치시대에는 친위대 사무실이었다.

 

마크 트웨인은 1898년 5월에 비엔나 숲자락의 칼텐로이트게벤(Kaltenleutgeben) 마을에 있는 '빌라 존호프'(Villa Sonnhof)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마크 트웨인은 식구들과 함께 10월 중순까지 5개월을 보냈다. 이곳은 현재 니더외스터라이히주 뫼들링의 칼스가쎄 3번지로서 건물에 마크 트웨인이 거처했었다는 기념명판이 미시시피의 증기선 그림과 함께 부착되어 있다. 마크 트웨인과 가족들은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에 여름 휴가를 위해 8월에 잘츠캄머구트의 할슈타트에 잠시 가서 지낸 일이 있으며 그외에는 다시 비엔나 시내로 들어갈 때까지 빌라 존호프에서 지냈다. 마크 트웨인과 가족들은 비엔나 시내의 1구로 되돌아 와서 1899년 5월,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에 있는 호텔 크란츠(Krantz)에 머물렀다. 호텔 크란츠는 오늘날 호텔 암바사도르(Hotel Ambassador)이다.

 

칼스가쎄 3번지의 기념명판. 미시시피강을 운항하는 배가 그려져 있다. 내용은 '칼스가쎄 3번지의 이 잡에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인 마크 트웨인(1835-1910)이 1898년 3월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지냈다.'이다.

 

마크 트웨인은 비엔나 생활을 처음부터 만족해 했다. 미국에서는 맛볼수 없는 유럽의 클래시컬한 멋을 즐길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엔나 사람들도 마크 트웨인의 비엔나 체류를 크게 환영했다. 서점들에서는 마크 트웨인이 비엔나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그의 작품집들이 날개 돋힌듯 팔렸다. 비엔나의 신문들도 앞을 다투어 그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어떤 평론가는 비엔나의 신문들이 너무 지나치게 요란을 떠는 것 같아서 마크 트웨인을 Our Famous Guest(우리의 유명 손님)이라고 약간 비유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비엔나에 체류하고 있었던 마크 트웨인의 별명은 Our Famous Guest(우리의 유명한 손님)가 되었다. 마크 트웨인은 비엔나에 도착한지 한달 쯤 후에 링슈트라쎄에 있는 팔라멘트(제국의회)를 방문한 일이 있다. 마침 그날은 합스부르크가 관할하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독일어보다 체코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안건이 제출되어 대단한 논란이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정치적인 갈등으로까지 비화되어 훗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동기를 부여하는 것 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어 합스부르크의 종말을 가져오는 사안이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직접 목도한 마크 트웨인은 1898년 2월에 Stirring Times in Austria(오스트리아의 혼돈시대)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유명잡지인 하퍼(Harper)에 게재되어 당시 비엔나의 지식인층에 매우 큰 반향을 불러 넣어주었다.

 

1구 노이어 마르크트에 있는 호텔 암바사도르. 노이어 마르크트 5번지 겸 캐른트너슈트라쎄 22번지이다. 예전에는 호텔 크란츠라고 불렀다. 마크 트웨인과 가족들이 상당기간 머물렀던 장소이다.

 

마크 트웨인은 뫼들링의 칼텐로이트게벤에 체류하는 동안 상당량의 수필, 논단, 단편 등을 썼다. 이때에 나온 글들이 'What is Man?'(인간은 무엇인가?), 'How to Tell a Story and the Essays'(어떻게 하면 이야기와 에세이를 잘 말할수 있을까?), 'Concerning the Jews'(유태인에 대하여), 'The Chronicle of Young Satan'(젊은 사탄의 일대기), 그리고 잘 알려진 'The Man That Corrupted Hadleyburg'(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람) 등이다. 마크 트웨인은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다. 그는 비엔나에 있는 동안 여러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며 지냈다. 그들 중에는 당대의 유명 언론인, 작가, 정치인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5년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받은 베르타 폰 주트너 남작부인과는 각별하게 지냈다. 폰 주트너 남작부인은 '오스트리아 평화의 친구 협회'의 창설자였다. 미사 뷔덴부르크 에스터하지 백작부인과도 친교를 맺었다. 에스터하지 백작부인은 비엔나 귀족그룹의 문을 일반에게 활짝 연 대단히 개방적이고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그로인하여 비엔나의 귀족계급이 아닌 문화예술인, 사회사업가등은 귀족들과 동료로서 친밀한 교류를 맺게 되었다. 마크 트웨인도 에스터하지 백작부인의 주선으로 서민적인 문화예술가들을 자주 만날수 있었다. 딸 클라라의 피아노 선생인 테오도르 레셰치키(Theodor Leschetizky)의 소개로 요한 슈트라우스2세를 만나 친교를 다진것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때 클라라는 테오도르 레셰티치의 제자인 피아니스트 오시프 가브릴로비츄를 만났으며 나중에 결혼하였다. 또한 마크 트웨인는 당시 42세에 불과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만났고 텔리비전의 원형이라고 할수 있는 페른제어(Fernseher)를 역사상 처음으로 개발한 폴란드 출신의 얀 츠체파니크(Jan Szczepanik)도 만났다. 텔리비전을 독일어로 지금도 페른제어라고 부르는 것은 순전히 얀 츠체파니크의 선구적인 정신때문이었다.

 

1905년 첫 노벨평화상을 받은 비엔나의 베르타 폰 주트너 남작부인. 마크 트웨인의 친구였다.

 

마크 트웨인이 비엔나에서 환영을 받으며 폭넓은 지식인, 귀족계급과 교류를 갖고 있는 반면에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은 당시 25세의 약관인 작가 겸 사상가인 칼 크라우스(Karl Kraus)이다. 크라우스는 자칭 위대한 독일어의 수호자로서 독일어가 세상의 모든 언어에 비하여 우수하다는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인간의 기본권을 위해 투쟁하는 십자군을 자처했으며 아울러 문명사회의 개척자로 자부했다. 그렇기 때문에 비엔나의 청년 지식인층은 그를 대단히 존경하고 추종하였다. 크라우스는 또한 'Die Fackel'(횃불: The Torch)라는 저널을 무려 35년 동안 단독으로 발간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크라우스는 Die Fackel의 제3호에서 무려 6페이지나 할애하여 마크 트웨인을 비난했다. 마크 트웨인은 'The Awful German Language'(형편없는 독일어)라는 에세이를 쓴 일이 있었다. 칼 크라우스의 마크 트웨인 비난에 힘을 얻었던지 비엔나의 여러 신문들도 마크 트웨인을 비난하는 일에 동조하였다. 특히 반유태주의 노선을 지향하고 있는 언론들이 그러했다. Our Famous Guest: Mark Twain in Vienna 라는 책을 쓴 칼 돌메츄(Karl Dolmetsch)는 그의 저서에서 마크 트웨인이 일부 비엔나의 저널리스트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마크 트웨인의 이름이 사무엘로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지적한 일이 있다. 마크 트웨인의 오리지널 이름은 Samuel Langhorn Clemens(Mark Twain은 필명)이다. 그래서 비엔나 사람들은 마크 트웨인이 유태인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태계인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 유태인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름들을 즐겨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름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유태인들의 이름에는 사무엘, 아브라함, 모세, 아론, 레위, 다윗, 이삭....등 구약시대 인물들의 이름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피터(베드로), 존(요한), 제임스(야고보), 조셉(요셉), 마크(마가), 루크(누가), 메튜(마태)....등 신약성서의 이름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것은 구식의 유럽에서이며 신대륙인 미국에서는 그런 구분이 거의 없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도 세례명에 사무엘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유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엔나의 사람들은 마크 트웨인을 유태계인 것으로 판단하여 공연히 미워하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마크 트웨인은 Concerning the Jews(유태인에 관하여)라는 저서에서 유태인과 기독교인에 대한 그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마크 트웨인의 딸인 클라라 클레멘스 가브릴로비츄와 사위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오시프 가브릴로비츄

 

마크 트웨인은 그가 비엔나에 있을 때인1898년 9월 17일, 엘리자베트(씨씨) 왕비가 이탈리아의 어떤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제네바에서 살해 되자 크게 애도하였다. 그때 마크 트웨인은 노이어 마르크트의 호텔 크란츠에 묵고 있었다. 호텔 크란츠에서는 합스부르크의 제국영묘가 있는 카푸친 교회를 자세히 내려다 볼수 있다. 마크 트웨인은 집주인의 주선으로 호텔 발코니에서 씨씨의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나중에 마크 트웨인는 씨씨를 애도여서 The Memorable Assassination(특별한 암살)이라는 글을 써서 발표했다. 마크 트웨인은 1899년 5월 25일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알현하는 영광을 가졌다. 비록 15분에 불과한 알현이었지만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마크 트웨인을 따듯하게 환영하고 먼 여행에 건강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마크 트웨인의 딸인 클라라는 장래의 남편일 되는 오시프 가브릴로비츄를 비엔나에서 만났다. 가브릴로비츄는 러시아 피아니스트이며 지휘자였다. 훗날 가브릴로비츄는 1936년에 세상을 떠날 때 자기를 마크 트웨인의 묘지 끝자락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리하여 가브릴로비츄는 뉴욕의 엘미라에 있는 마크 트웨인의 묘지 아래에 마련되었다. 나중에 클라라는 그곳에 아버지 마크 트웨인와 남편 가브릴로비츄를 함께 기리는 묘비를 세웠다.

 

뉴욕의 엘미라 공동묘지에 있는 마크 트웨인의 묘지. 마크 트웨인의 딸인 클라라가 세웠다.

 

마크 트웨인이 남긴 또 다른 어귀들을 소개한다.


'화가 날 때에는 100까지 세어라. 최악일 때에는 참지 말고 욕설을 퍼부어라'

'인간은 달과 같아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면이 있다'

'슬픔은 혼자서 간직할수 있다. 그러나 기쁨은 누군가와 나누어 가져야 한다. 그럴 때에 기쁨이 가지는 충분한 가치를 얻을수 있다.'

'사람들은 남에게 호감을 받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하지만 시기와 질투를 받기 위해서도 무슨 일이든지 저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