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시인과 작가

베르타 추커칸들(Berta Zuckerkandl)

정준극 2009. 8. 19. 06:50

비엔나의 지성

베르타 추커칸들(Berta Zuckerkandl)

 

베르타 추커칸들-쳅스

 

베르타 추커칸들(1864-1945)은 비엔나 출신의 작가이며 언론인이었고 예술평론가이며 비엔나 사교계의 뛰어주인공이었다. 베르타는 비엔나의 신문왕인 모리츠 쳅스(Moritz Szeps)의 딸이며 유명한 해부학 의사인 에밀 추커칸들(Emil Zuckerkandl)의 부인이었다. 베르타는 프랑스 수상인 조르주 클레망소(G. Clemenceau)의 처제였다. 베르타의 집은 세계적인 예술인들이 모이는 살롱으로 유명했다. 베르타는 당시 비엔나 제체시온의 멤버들과 가까운 친분을 맺고 지냈다. 베르타는 특히 요셉 호프만(Josef Hoffmann)의 작품생활에 많은 자문을 하였다. 베르타는 언제나 새로운 예술 스타일의 진흥을 위해 힘썼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주도한 사람 중의 하나도 베르타였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손에 들어가자 그는 프랑스로 이민을 갔고 이어 알지에까지 가서 지내다가 전쟁이 끝나던 해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르타 추커칸들-쳅스는 비엔나와 파리의 문화예술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진정한 지성인이었다. 이제 베르타 추커칸들-쳅스의 생애와 활동을 간략하나마 살펴본다. 그가 얼마나 훌륭한 여성이었는지를 느낄수 있을 것이다.

 

 

베르타는 1864년 4월 13일 비엔나에서 어머니 아말리(Amalie)와 아버지 모리츠 쳅스의 다섯 자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모리츠 쳅스(1834-1902)는 비너 타브블라트(Wiener Tagblatt: 비엔나일보)의 창간인이자 발행인이었다. 베르타는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들에게서 공부했다. 미술사학자인 알베르트 일크(Albert Ilg: 1847-1896)도 베르타의 가정교사였다. 알베르트 일크는 나중에 베르타의 미술적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베르타는 아버지 모리츠가 격변하는 시대에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생활해 온 것을 어린시절부터 모두 지켜보았다. 그러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 역시 베르타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이었다. 아버지 모리츠는 진보적 사고방식을 가진 황태자 루돌프(1858-1889)의 가까운 자문이었다. 모리츠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동맹을 맺으면 결국 독일에 흡수 될 것이라는 우려때문이었다. 모리츠는 프랑스의 유명 정치인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그중에는 나중에 프랑스 수상이 된 조르주 클레망소도 포함되어 있다. 클레망소의 남동생인 폴(Paul)은 모리츠의 큰 딸인 조피(Sophie)와 결혼하였다. 베르타는 아버지의 정치적 사명을 돕는 역할을 감당했다. 1차 대전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통합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많아서 오스트리아의 운명이 어떻게 진전될지 모르는 형편에서 모리츠와 베르타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특히 베르타는 프랑스와 문화예술의 교류를 증진함으로서 정치적 협동으로 연결코자 노력했다. 베르타는 파리에서 오거스트 로댕(1840-1917)등과 친분을 쌓았다.

 

에밀 추커칸들

 

당시 프랑스에서는 드라이푸스(Dreyfus)사건이라는 커다란 사건이 사회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에 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태인 드라이푸스가 독일의 간첩으로서 오해를 받아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이었다. 마침 파리를 방문한 비엔나의 유명한 해부학 의사인 에밀 추커칸들(Emil Zuckerkandl: 1849-1910)은 베르타의 언니인 조피의 살롱에서 드라이푸스 사건을 대한 얘기를 듣고 억울하게 희생된 드라이푸스의 무죄를 입증키 위해 노력키로 다짐했다. 이렇게하여 베르타와 에밀 추커칸들이 서로 알게 되었다. 1886년, 베르타는 22세 때에 에밀 추커칸들과 결혼하였다. 결혼후 처음에는 추커칸들의 살롱에 남편의 친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신경전문의인 리하르트 크라프트-에빙(Richard Kraft-Ebing)을 비롯하여 평론가인 헤르만 바르(Hermann Bahr),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작곡가 겸 지휘자인 구스타브 말러 등이었다. 베르타와 에밀 부부는 차츰 새로운 조류의 미술운동을 지지하고 그들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특히 구스타브 클림트와 오스카 코코슈카, 건축가인 오토 바그너와 요셉 호프만을 후원하였으며 이들이 처음에 주도한 비엔나 제체시온과 이들이 나중에 다시 결성하 비엔나 워크샵(비너 베르크슈태테)를 지원하였다. 그리고 에밀은 새로운 동료들인 독일의 화가인 캐테 콜비츠(Kaethe Kollwitz: 1867-1945)와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인 폴 뿌아레(Paul Poiret: 1879-1944) 등을 비엔나의 살롱에 초대하였다. 베르타의 살롱은 비엔나 예술 서클의 중요한 센터가 되었다. 1905년 베르타는 구스타브 클림트와의 인터뷰 기사를 출판하여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클림트는 예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가 비엔나대학교 천정에 그렸던 그림을 다시 사겠다고 밝혔다. 물론 오스트리아 문부성은 이를 거절하였다. 1908년 베르타는 현대미술에 대한 일련의 에세이를 책자로 발행하였다.

 

구스타브 클림트 

 

1차대전중 베르타는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국수적인 쇼비니즘을 반대하는 글들을 발표하였다. 특히 평화를 추구하는 프랑스 청년 예술가들의 서한들을  출판했다. 베르타는 갈리시아(Galicia)에서 고통받고 있는 유태인들을 위한 인도주의 위원회의 구성을 요청하는 글들을 발표하고 비엔나 사회가 좀 더 관용을 가지고 유태인을 비롯한 동부로부터의 이민자들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에 베르타는 파리의 언니 살롱에서 친분을 쌓았던 지성인들, 그리고 자기의 남동생인 율리우스 쳅스(Julius Szeps)와 함께 프렘덴-블라트(Fremden-Blatt)라는 진보적인 신문을 발간하였다. 베르타는 신문을 통해 오스트리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였다. 전쟁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베르타의 평화노력을 중시하여 그를 오스트리아의 비공식 외교관으로 활용하였다. 베르타는 프랑스 정치인들과의 교분을 바탕으로 두가지 성과를 거두었다. 하나는 후버(Hoover)위원회의 설치로서 전후 상처뿐인 오스트리아를 치유하는 노력을 기울이도록 한 것이며 또 하나는 이른바 할스만(Halsmann) 사건을 해결한 것이다. 필립 할스만은 라트비아의 리가(Riga)에서 살던 유태인 지식인으로서 남부 티롤지방을 방문했다가 그 지방의 어떤 식당 주인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할스만은 티롤지방의 반유태주의에 희생된 것이었다. 베르타는 오스트리아 연방수상을 설득하여 결국 할스만을 석방토록 했다. 유태인 사회는 베르타의 이같은 노력을 높이 치하하였다.

 

비엔나 제체시온 건물

 

1920년에 들어서서 베르타는 저명한 극작가인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1873-1943)과 휴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의 작품들을 극장무대에 올리는 일을 중점적으로 추진하였다. 베르타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주도하여 이들의 작품이 잘츠부르크의 무대에 올려지도록 노력하였다. 얼마후 베르타는 그의 살롱을 비엔나 제1구인 시내로 옮기고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대화의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베르타의 살롱에 자주 방문하였던 인사로는 작가인 아르투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 슈테판 츠봐이크(Stefan Zweig: 1881-1942),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 1890-1945), 펠릭스 잘텐(Felix Salten: 1869-1945), 리하르트 베르-호프만(Richard Beer-Hofmann 1866-1945), 휴고 폰 호프만슈탈 등과 율리우스 탄들러(Julius Tandler: 1869-1936), 이그나즈 자이펠(Ignaz Seipel: 1876-1932) 등 당시 지도적인 사회주의 및 보수주의 정치인들이 있었다. 1922년 말, 베르타는 노이에 비너 저널(Neue Wiener Journal), 비너 타그(Wiener Tag), 폭스차이퉁(Volkszeitung), 뷔네(Buehne)와 같은 신문잡지에 평론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그는 언론인으로서 영국과 프랑스의 주요 정치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대국들의 관심을 높였다. 베르타는 오스트리아의 중요한 민간외교관이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난후 나치국방군의 비엔나 진입. 1938년 3월 마리아힐르퍼슈트라쎄. 비엔나 시민들은 열렬히 '하일 히틀러'를 외쳤지만 그때로부터 수많은 반나치의 지식인, 유태인들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에 파치스트 정부가 들어서자 베르타는 정치적인 활동을 포기하였다. 이어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파리로 피신하였다. 나치는 베르타를 유태인의 옹호자이며 반파치스트로 규정하고 블랙 리스트에 올렸다. 베르타는 파리에서 또 다시 살롱을 마련했다. 지휘자인 브루노 발터, 말러의 부인이었던 알마, 알마의 새로운 남편인 프란츠 베르펠 등이 자주 출입하였다. 베르타는 파리에서 다른 이민자들과 힘을 합하여 나치로부터 오스트리아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40년, 파리가 나치의 수중에 떨어지자 베르타는 알지에로 피신하였다. 1942년 말, 알지에가 해방되자 베르타는 연합군이 설립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오스트리아 방송을 맡아 일했다. 1945년 9월, 전쟁이 끝나자 베르타는 이제 병으로 허약해져서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달 후인 10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베르타 추커칸들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Decorative Kunst und Kunstgewerbe(장식예술과 예술가로서의 직업), Zeitkunst 1901-1907(1901-07년의 시대 예술), Ich erlebte funfzig Jahre Weltgeschichte(나는 세계역사 속에서 15년을 살았다). 베르타의 이름은 간혹 Bertha라고도 쓰며 또한 결혼전 성을 사용하여 Zuckerkandl-Szeps라고 쓰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