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오스트리아 세시기

반유태주의. 아직도?

정준극 2010. 12. 30. 17:28

반유태주의. 설마 아직도?

 

오스트리아에서는 아직도 유태인들에 대한 기피증 및 혐오증이 남아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약소하나마 그렇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유태인들은 이다지도 무시를 당하고 멸시를 당하는 것일까? 유태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러한가? 그 문제를 논하자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생략키로 하고 과연 오스트리아에서는 반유태주의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우선 간단히 살펴보자. 19세기를 거치면서 오스트리아는 이른바 그륀데차이트(Gründezeit), 즉 '기반을 다지는 시기'를 영위하며 번영을 이루었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평민과 귀족 사이에 부유한 중간층이 형성된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귀족계급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들은 돈이 많아서 아무도 무시를 하지 못하자 정치와 사회문제에도 참여하고 싶어했다. 말타면 경마잡히고 싶다는 말처럼 돈이 전부가 아니라 사회적인 신분상승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회를 통한 정치참여는 가장 바람직한 신분상승 방안 중의 하나였다. 하다못해 구의회 의원만 되더라도 가문의 영광이기 때문에 목에 힘을 주며 걸어 다닐수 있다. 한편,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들은 자기들의 부를 보여주기 위해 호화로운 저택들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자기 돈으로 좋은 집을 짓고 산다는데 누가 무어라고 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비엔나의 환경좋은 교외, 특히 18구 배링과 19구 되블링에는 화려하고 거창한 저택들이 들어섰다. 이런 저택들을 그륀데차이트 하우스라고 불렀으며 이런 저택들이 모여 있는 곳을 별장구역(Cottageviertel)이라고 불렀다.

 

18구 배링에 있는 어떤 저택. 아마 돈많은 상인의 집일 것이다. 이런 저택들이 모여 있는 구역을 '별장구역'(Cottageviertel)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새로운 사회 현상은 관광여행이었다. 새로운 상류층은 비엔나가 너무 비좁고 더구나 여름에는 덥고 습하기 때문에 캐른텐, 티롤의 알프스, 또는 잘츠캄머구트와 같은 경치 좋고 시원한 곳에 별장들을 마련하여 휴가를 보내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도 잘츠부르크에서 멀지 않은 바드 이슐에 별장을 가지고 여름이면 가족들과 함께 가서 지내지 않았던가? 그래서 부자들은 우리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느냐면서 너도나도 잘츠캄머구트로 몰려갔다. 바야흐로 별장시대의 도래였다. 이렇게 여름에 도시를 떠나 호화로운 전원생활을 하는 것을 좀머프리셰(Sommerfrische)라고 한다. 글자그대로 시원한 여름 보내기이다. 또 하나의 현상은 사람들이 오스트리아의 국민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생각이 점점 피어올랐다는 것이다. 세상에 오스트리아만큼 아름다운 나라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한편,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역사적으로도 깊은 관계에 있는 독일과 같은 백성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독일민족이 아닌 유태인은 자기들의 서클에서 배제되어야 했다. 유태인들은 18세기에 유럽을 풍미한 계몽사상에 따라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고 흘러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왔지만 사회의 변화와 함께 독일과 오스트리아 민족들은 그런 유태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우선 순수 가톨릭 국가에서 수염을 기르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쓰고 유태교 회당에 가서 무어라고 중얼거리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싫었다. 또한 유태인들이 돈벌레처럼 지독하게 장사를 해서 부자들이 된 것도 못마땅했다. 당연히 반유태주의가 서서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처지에서 참으로 흥미롭게도 그륀데차이트의 새로운 물결인 관광주의와 반유태주의가 서로 관련되는 이상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잘츠캄머구트 지방의 할슈타트. 아름다운 경관과 시원한 날씨로 여름휴가지로는 최적이다. 그러니 돈 좀 있으면 너도나도 별장들을 갖고 있다.

 

유태인들은 19세기 중반까지는 오스트리아에서 직업의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다가 1866년에 관용을 베풀어서 어떤 직업이든지 선택할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유태인들은 '배워야 산다. 돈이 있어야 무시 당하지 않는다'는 신조아래 자녀들을 열심히 교육하여 이른바 하이칼라 직종으로 다수 진출할수 있게 만들었다. 의사, 교수, 금융인, 출판인, 예술가 등이었다. 이런 직업을 가진 유태인들은 돈을 잘 벌어서 여유있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보니 다른 부유층 사람들처럼 휴가도 가야 했다. 상류층 및 지식인층 유태인들이 휴가를 많이 가다보니 이런 얘기까지 나왔다. '높은데 올라가서 침을 뱉어보라. 유태인이 맞는다. 여름 휴양지에 가보라. 발에 걸리는 것이 유태인이다. 여름휴양지 뿐만 아니라 온천장, 겨울에 스키 타운에 가도 한사람 건너 두 사람이 유태인이다.' 이 말은 1900년에 가톨릭의 지도층 사제인 요셉 샤이허(Joseph Scheicher)라는 사람이 오스트리아 의회에 참석하여 말한 내용이다. 이 말이 전해지자 그후로부터 말하자면 '온천장 반유태주의'(Spa anti-Semitism)라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바덴 바이 빈'(Baden bei Wien)의 노천 온천

 

오스트리아에서는 온천지대가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도 더 빨리 발전되고 더 성황을 이루었다. 좋은 온천(Spa)도 많지만 이 나라 사람들이 원래 먹고 마시고 춤추고 놀기를 좋아하는 성품들인지라 온천장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온천장에는 카지노, 오페라극장, 호텔 등이 속속 들어서서 휴양 관광지대로서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장소가 되었다. 지체높은 귀족들이나 돈 많은 신흥 부유층들이 온천장을 내집처럼 드나들게 되었다. 이에 질세라 유태인들도 온천장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온천장들은 유태인들이 몰려오자 온천장의 명성이 손상될 것 같아서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온천장이 '유태인 천국'이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08년도의 보고서에 의하면 오스트리아의 온천장 중에서 가장 반유태주의적인 곳은 티롤지방의 키츠뷔엘(Kitzbühel)이라고 한다. 키츠뷔엘은 티롤지방 중에서도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어서 관광산업으로 마을의 경제가 유지되고 있는 곳이다. 한가지 웃기는 것은 2007년에 키츠뷔엘관광국은 러시아 관광객들을 쿼터제로 받자는 제안을 한바 있다. 러시아 관광객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소란하기가 이를데 없으며 대체로 돈푼이나 있다고 잘난체 하므로 꼴보기가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키츠뷔엘의 주민들로서는 러시아 사람들이 키츠뷔엘에 와서 공연히 싸움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으며 더구나 러시아정교회를 믿고 있어서 로마 가톨릭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이 기분 나빳다.

 

키츠뷔엘의 목가적인 풍경

 

키츠뷔엘에서 러시아 관광객들을 제한하자는 의견이 나오자 일부 인근 마을에서는 동조했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키츠뷔엘의 제안을 역이용하려는 마을도 생겼다. 신흥부촌인 이슈글(Ischgl)의 경우가 그렇다. 이슈글은 '러시아 사람이면 어떠냐, 와서 돈만 쓰고 가면 되었지!' 라는 생각에 만일 키츠뷔엘이 러시아 광광객들을 받아 들이지 않겠다면 '힘들어서 번 돈, 이곳 이슈글에 와서 모두 쓰십시오!'라는 홍보활동을 하기로 했다. 이슈글은 러시아 관광당국과 접촉하여 '우리 마을이 더 재미있으니 오시오'라는 선전을 했다. 그리하여 매년 1월이며 이슈글은 '못된 러시아 마피아 벼락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가 되었다. 그러면 유태인들에 대한 감정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키츠뷔엘은 일찌기 1897년에 유태인들에 대하여는 호텔 예약을 받지 말자는 결정을 내린바 있다. 키츠뷔엘 시당국은 자체 발간하는 홍보책자에 '유태인들을 본체만체 하자'라는 행동지침의 내용까지 넣었다.

 

유명한 온천휴양지인 '이슈글'. 스키 레조트로도 유명하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여러 도시들도 키츠뷔엘의 단호한 유태인 배격정책에 동조하였으니 점입가경이었다. 예를 들면 슈티리아주의 슐라드밍(Schladming)은 유태인들의 호텔 예약을 받지 않기로 했으며 비엔나에서 가까운 봐하우(Wachau) 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마을이 '유태인 배척 캠페인'에 동참하였다. 봐하우는 멜크 사원등이 있는 관광지이다. 이렇게 하여 오스트리아에서 유태인을 환영하지 않는 온천장의 수는 전체 독일에서 유태인을 받아 들이지 않는 관광지의 수보다도 배나 많았다. 그러면 그 후의 이슈글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슈글은 '당신들은 유태인들을 받지 말던지 마음대로 하시오. 우리는 돈만 벌면 됩니다'라는 정신으로 유태인 환영 플라카드를 내 걸었다. 과연, 이슈글은 유태인 관광객들로 인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잘츠부르크 지방의 다른 온천장들, 예를 들면 잘츠캄머구트의 저 유명한 바드 이슐(Bad Ischl)과 바드 아우스제(Bad Aussee), 그리고 잘츠부르크 알프스에 있으며 라듐온천으로 유명한 바드 가슈타인(Bad Gastein)등은 '누구라도 오시오. 돈만 많이 뿌리고 가시오'라는 신념으로 유태인들에 대한 제약을 결단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가하면 그런 지나친 상업주의에 반발하는 생각도 있었다. 1920년에 오베르외스터라이히주의 교사연맹은 '바드 이슐! 당신들 해도 너무 한다. 유태인들을 제발 그만 받아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낸바 있으니 이것도 흥미 있는 일이 아닐수 없다.

 

세계적인 온천장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바드 가슈타인' 중심지. 비엔나 사람들이 콘도를 많이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온천장과 유태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오늘날의 반유태주의에 대한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유태인들은 지나간 수세기동안 현지인들로부터 구박을 받으면서도 현지 샤회에 동화되어왔다. 그래서 어떤 유태인은 '우리는 우리가 유태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데 히틀러가 우리를 유태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면서 내심 불만을 토오하였다. 아무튼 유태인들이 유럽에서 지내자니 결과적으로 정통 유태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유태인이라는 민족적 자긍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수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많은 유태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또한 각국에 살면서 이스라엘민족이라는 개념을 떠나서 그 나라의 국민으로서 의미를 다하였다. 물론, 세계의 이곳저곳에서는 국수주의적 아이디어 때문에 유태인이나 다른 민족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예를 들어 미국만해도 1960년대 초반,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내노라하는 호텔에서 유태인과 흑인들의 투숙을 거부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오스트리아에서는 1933-38년까지 가톨릭 파치스트가 집권하였을 때 인종차별 금지법을 시행한바 있다. 그래서 어느 호텔이든 어떤 특정 민족에 대하여 투숙거부를 하지 못했었다.

 

'바덴 바이 빈'에 있는 유명한 호텔 에스플라나데. 예전엔 유태인들의 투숙을 거부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특히 재정분야에서 무시못할 존재들이 되어 있다. 금융과 보험업계의 황제라고 하는 로트쉴트 가문이 유태인인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유태인들에 대하여 대놓고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태도는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일찌감치 사라진지 오래이다. 오스트리아는 나치 시대에 유태인들에 대하여 잔혹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점차 잊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유태인들도 과거에 차마 필설로 표현할수 없는 핍박을 당했었다는 사실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과거는 과거일뿐! 그걸 자꾸 생각하면 무얼 하나?'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우린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오스트리아에는 오스트리아인이 살아야 한다'는 전통적 국수주의적 사고방식에 지배받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유태인에 대하여 지나친 관용을 베풀면 안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소수의 소리에 불과하다. 잘바흐-힌터글렘(Saalbach-Hinterglemm)에는 코셔 스키 호텔이 있다. 유태인투숙객들을 위해 코셔 식품을 별도로  서브하는 호텔이다. 호텔 측은 굳이 자기들이 코셔 호텔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놓으려 하지 않고 있지만 유태인들 사이에서, 특히 미국에서 관광온 유태계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호텔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유태인들과 동반자로서 생활을 변모하고 있다.

 

바덴 바이 빈(Baden bei Wien)의 유태인 회당(시나고그). 이젠 유태교 회당도 떳떳하게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