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수도원/수도원의 영욕

멜크(Melk) 수도원

정준극 2011. 1. 8. 12:03

멜크(Melk) 수도원

Stift Melk

 

멜크 수도원과 교회.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도나의 운치가 뛰어나다.

 

멜크 수도원은 니더외스터라이히의 봐하우 계곡, 도나우를 옆으로 안고 있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이다. 비엔나에서 자동차로 시간반 정도 걸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다. 대단하고 아름답다. 멜크 수도원은 1089년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2세가 세웠다. 처음에는 자기의 성 중에서 하나를 람바흐 수도원에서 온 수도사들을 위해 기부한 것이 모체가 되었다. 12세기에는 수도원 학교가 문을 열었다. 중세에는 대학이 생기기전까지 수도원이 학문과 교육의 전당이었다. 멜크수도원의 도서실은 그 방대하고 귀중한 장서로 인하여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다. 멜크수도원의 성서 필사는 중세로부터 유명하다. 15세기에 들어서서 멜크 수도원은 오스트리아 수도원의 개혁 운동의 중심지에 섰었다. 그동안의 지나치게 안이하고 나태하였던 수도원 모습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태어나자는 운동이었다. 멜크 수도원의 개혁 운동은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에 있는 여러 수도원에 깊은 영향을 던져 주었다.

 

멜크 수도원의 호프

 

현재의 대단히 인상적인 바로크 건물은 1702-1736년간에 완성된 것이다. 위대한 콥 프란타우어(Jakob Prandtauer)가 설계를 맡았다. 특별히 눈여겨 볼것은 수도원 교회에 있는 요한 미하엘 로트마이르의 프레스코이다. 수없이 많은 중세의 장서를 지닌 도서실은 필견의 장소이다. 파울 트로거의 프레스코가 뛰어나다. 교회의 성자들 조각상들은 모두 도금이어서 웅장함을 더해 주고 있다.

 

수도원 교회의 바로크 제단. 찬란한 황금 조각상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멜크 수도원은 1780-90년대에 요셉2세의 수도원 개혁정책에도 생존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자주 찾아오던 곳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도서실의 귀중한 장서와 바로크의 아름다운 건물 때문이었다는 얘기다. 멜크 수도원은 나폴레옹 전쟁 때에도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을 때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부설 학교는 물론이거니와 건물의 상당부분을 나치 정부에게 빼앗겼다. 학교는 전쟁후 다시 돌아왔다. 현재 약 9백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멜크 수도원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랑은 본 블로그의 검색창에서 멜크를 치면 찾아 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