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악성 베토벤

베토벤과 괴테

정준극 2013. 4. 24. 06:44

베토벤과 괴테

테플리츠에서 있었던 일

 

'테플리츠 사건'. 칼 롤링(Carl Rohling)작. 혹자는 이 그림의 장소가 비엔나의 부르크가르텐 산책길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건 아니다. 괴테는 왕족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였으나 베토벤은 '내가 왜 저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저들이 나에게 해야지'라고 말했다.

                    

온천장으로 유명한 테플리츠(Teplitz)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이다. 테플리츠는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여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체코공화국의 바드 테플리체(Bad Teplice)이다. 베토벤은 1812년에 비엔나를 잠시 떠나 이곳에서 지냈다. 1812년이라고 하면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했다가 겨울에 퇴각하면서 대단한 고통을 겪었던 해이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차이코브스키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패전을 기념하여 '1812년 서곡'을 작곡했다. 베토벤은 1812년에 테플리츠에 머물면서 교향곡 제7번을 작곡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시인 요한네스 폰 괴테를 만났다. 베토벤은 괴테를 대단히 존경하고 숭모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친밀하게 지내지  못했다. 서로의 성격과 태도가 여러 면에서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면 왕족에 대한 견해이다. 괴테는 속으로야 어떤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왕족들을 크게 존경하였지만 베토벤은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의 왕족에 대한 견해는 그들이 쓴 편지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괴테가 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베토벤은 정말 못말리는(콘트롤할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되어 있다. 무엇을 못말리겠다는 것인지 편지의 내용만 보면 모르겠지만 그건 왕족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함께 어울리기가 어렵다는 내용이라고 짐작할수 있다. 그런가하면 베토벤은 그의 출판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괴테는 궁정분위기를 너무나 좋아하는 것 같다.'고 썼다. 사람이라면 서민들도 생각해야지 왕족이나 귀족들하고만 친하게 지내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테플리츠 중심가

                              

어느날 두 사람은 테플리츠 중심지대에 있는 궁전의 뒤편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괴테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비(Empress)가 저 쪽에서 시녀들을 거느리고 걸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괴테는 급히 길을 건너가서 황비가 지나갈 지점에 일부러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베토벤에게 어서 이리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괴테는 잠시후 황비가 지나가자 허리를 크게 굽혀서 최대의 예의를 다해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오히려 모자를 꾹 눌러쓰고 뒷짐을 진채 인사는 커녕 거들떠보지도 않고 황비의 곁을 그냥 지나쳤다. 당황한 괴테는 황비 일행이 지나간 후에 베토벤에게 '여보시게, 아니 왜 인사도 하지 않고 그랬나?'라고 묻자 베토벤은 '아니, 저들이 나에게 인사를 해야지 왜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합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튼 테플리츠의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괴테와 베토벤은 서로가 못마땅해서 사이가 멀어졌다. 훗날 베토벤은 괴테에게 편지를 보내어 "과거에 무슨 일 때문에 언짢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이 사람을 종전처럼 따듯하게 대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으나 괴테로부터의 답장은 없었다고 한다. 괴테는 베토벤보다 21세나 위이다. 독일의 화가인 칼 롤링이 1887년에 위에서 보는대로 괴테와 베토벤이 테플리츠에서 왕족을 만나는 장면을 '테플리츠 사건'(The Incident at Teplitz)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다.

 

신성로마제국의 마리아 루도비카 황비

                                                          

그 황비는 신성로마제국 프란시스 황제(1768-1835)의 세번째 황비인 오스트리아 에스테(Austria-Este)의 마리아 루도비카(Maria Ludovika: 1787-1816)일 것이라고 한다. 마리아 루도비카는 1808년에 프란시스 2세 황제와 결혼하였고 1816년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폐염에 걸려 세상을 떠났으므로 1812년에는 당연히 오스트리아제국의 황비였다. 마리아 루도비카는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그후의 유럽지도를 어떻게 그리느냐를 두고 1815년에 유명한 비엔나회의(Vienna Congress)가 열렸을 때 미모와 사교술로서 호스테스의 역할을 하여 유럽의 내노라하는 제왕과 재상들로부터 흠모의 찬사를 받았다.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시스는 2세는 네번이나 결혼했는데 마리아 루도비카는 세번째 부인이었다. 마리아 루도비카는 비록 베토벤이 고자세로서 인사도 하지 않았지만 그런 베토벤을 존경하여서 얼마후에 베토벤에게 귀한 선물을 보냈다. 그후 베토벤이 친구인 헤르 카우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마리아 루도비카 왕비가 준 선물을 팔면 1,500 플로린스 이상은 받을 것이므로 그것으로 얼마전에 가졌던 두차례의 콘서트 때문에 진 빚을 갚을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비엔나 회의' 중에 호프부르크의 레도우텐잘에서 열린 가면무도회.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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