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악성 베토벤

베토벤도 콘서트를 기획하고 개최했다

정준극 2014. 12. 19. 21:11

베토벤도 콘서트를 기획하고 개최했다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하는 베토벤. 리오넬로 발레스트리에리 작

              

요즘에 음악회를 개최하려면 대체로 기획사가 모든 것을 주관한다. 출연자 섭외를 하고 장소를 물색하며 프로그램을 결정하고 홍보를 하며 티켓을 판매하는 그런 모든 일을 대행한다. 기획사가 음악회를 개최하는 주목적은 누가 무어라고 해도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자선음악회라는 타이틀이 붙었어도 이익을 보아야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하는 것이 현실이다. 베토벤의 시대에는 어떠했는가? 기획사라는 것이 없었다. 작곡자 또는 연주자 자신이 음악회의 기획에서부터 개최까지 맡아야 했다. 마땅한 공연장도 없었다. 궁전이나 귀족들의 저택 또는 교회에서 개최되는 것이 관례였으며 일반인들을 위한 연주회장은 없었다. 그리고 요즘의 음악회는 길어야 1시간 반을 넘지 않는 것이 관례이지만 당시의 콘서트는 별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2시간은 보통이었다. 물론 한시간도 채 못되어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아무튼 프로그램에 따라 음악회 시간이 좌우되었다.

 

도무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베토벤이 음악회를 직접 주관해서 준비하고 개최했다. 베토벤의 시대에는 작곡가가 직접 연주회를 주관하는 것이 관례였던 것을 상기하면 수긍이 가는 일이다. 당시의 음악회는 리사이틀이나 콘서트니 하는 용어 대신에 아카데미(Academie)라고 불렀다. 아카데미에서는 이를 주관한 작곡자의 최근 작품이 연주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여기에 피아노 또는 바이올린의 비르투오스(거장)가 자기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출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음악회를 주관한다고 해도 반드시 경제적으로 이익을 낸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사재까지 털으며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작곡가로서 음악회를 주관한다는 것은 지루하고 피곤한 일이었고 더구나 재정적인 리스크가 있어서 기피하는 사항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주회장을 예약하는 일이다. 당시에는 다행히 호프부르크의 레도우텐잘(Redoutensaal)이 연주회장으로서 가능했다. 그후 1831년에 비엔나악우회(무직페어라인)의 연주회장이 마련되어서 많은 음악인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비엔나악우회는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던 1812년에 설립되었지만 연주회장은 그로부터 거의 20년 후에 마련되었다.

 

호프부르크 레도우텐잘에서의 연주회

            

베토벤이 처음으로 직접 음악회를 주선한 것은 1800년 4월 2일이었다. 장소는 호프부르크와 인접해 있는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였다. 이날 초연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Op 14번은 궁정극장 감독의 부인인 요제피네 폰 브라운에게 헌정한 곡이었다. 폰 브라운 부부는 그 전해에 베토벤에게 상당한 호의를 베푼 일이 있었다. 이날의 프로그램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한편,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중에서 두 곡,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아마도 제1번 Op 15번), 베토벤의 7중주곡 Op 20, 베토벤의 교향곡 제1번 Op 21번, 그리고 베토벤의 피아노 환상곡으로 꾸며졌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장시간을 요하는 콘서트 때문이었는지 중간 중간에 노래를 추가하여 분위기를 바꾸는 노력도 보였다. 베토벤이 기획하고 개최한 이날의 콘서트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별다른 금전적 이득을 보지 못했다. 그저 입장료의 일부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콘서트를 매년 개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록 베토벤이 첫 콘서트를 주관한 후 비엔나에 26년을 더 지냈지만 그동안에 겨우 8번의 콘서트를 주관해서 개최했을 뿐이었다. 그중에서 네번의 콘서트만이 재정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았으며 나머지 네번은 오히려 아무런 이익을 보지 못한 콘서트였다. 하지만 베토벤이 주관해서 콘서트가 열 때마다 누군가 후원자가 나타나서 후원금을 주었기 때문에 사실상 적자가 아니었다.

 

미하엘러플라츠에 있었던 부르크테아터

 

베토벤이 주관한 콘서트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유명한 '비엔나회의' 기간 중에 개최한 것이었다.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정치 지도를 다시 그리기 위해 1814년 9월부터 1815년 6월까지 비엔나에 모여 회의를 거듭하였다. 그때 실로 비엔나에는 유럽의 내노라하는 군주들이 머물고 있었으며 그보다도 수많은 수행원들도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각종 무도회, 오페라, 발레, 콘서트가 거의 매일 밤 열렸다. 베토벤은 '웰링턴의 승리'(Wellingtons Sieg) Op 91을 작곡하였고 이 곡은 애국심이라는 당시의 정서와 맞아 떨어져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에 자극을 받은 베토벤은 내친 김에 '영광의 순간'(Der glorreiche Augenblick: Op 136)을 작곡했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은 순전히 작곡료를 받기 위해 작곡한 것이었다. 베토벤은 1814년 11월에 또 하나의 콘서트를 주관하였다. '웰링턴의 승리'와 교향곡 제7번이 연주되었고 이와 함께 새로 작곡한 칸타타 한 편도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이날의 연주회에는 각국의 군주들이 상당히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다. 같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12월 초에 다시한번 콘서트가 열렸다. 이날의 콘서트는 직접 경비를 제외한 모든 수익금을 베토벤이 모두 가지는 조건이었다. 이어 12월 25일에 같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장크트 맑스(St Marx) 병원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가졌다. 베토벤은 1814년에 가진 콘서트로서 그때까지 몇 년 동안 주관했던 어떤 콘서트보다도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특히 러시아의 짜리나가 간혹 베토벤에게 특별 하사금을 내리는 바람에 1814년은 베토벤에게 있어서 로토가 당첨된 듯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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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의 베토벤. Willibrord Joseph Mähler(1778-1860) 그림.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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