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Franz Drdla(프란츠 드르들라)

정준극 2010. 10. 7. 18:09

Franz Drdla(프란츠 드르들라)

Souvenir(추억)으로 우리 귀에 익은 바이올린의 거장

 

프란츠 드르들라

 

바이올린곡인 Souvenir(우리나라에서는 '추억'이라고 번역) 또는 트로이메라이로 유명한 프란츠(프란티세크) 드르들라는 1868년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한 모라비아의 자르(Saar)에서 태어나 1944년 잘츠부르크 인근의 바드 가슈타인(Bad Gastein)에서 세상을 떠난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그가 태어난 자르는 현재의 체코공화국에 속한 츠다르 나드 사차부(Zdar nad Sazabou)이다. 스키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드르들라는 체코의 음악가이지만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에 비엔나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본 블로그에서는 오스트리아 음악가로 분류한다. 드르들라의 체코식 이름은 프란티세크 알로이스 드르들라(Frantisek Alois Drdla)이다.

 

드르들라가 태어난 모라비아의 츠다르 나드 사차부

 

프라하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한 그는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 와서 비엔나음악원(현재의 비엔나음악-공연예술대학교의 전신)에서 요셉 헬메스버거로부터 바이올린을, 안톤 브루크너로부터 음악이론을, 프란츠 크렌으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하지만 드르들라의 음악은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듯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아름다운 민속음악에 기조를 두고 있다. 드르들라는 1890-93년간 비엔나궁정오페라(현재의 비엔나국립오페라)에서 바이올린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894-99년에는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의 콘서트 마스터로서 활동했다. 이후 그는 바이올린의 명연주가로서 1899년부터 1905년까지 유럽의 각지를 순방하여 연주회를 가졌고 이어 1923-25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의 연주기법은 매우 세련되고 감미로워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미국을 방문하고 비엔나로 돌아온 그는 오스트리아대통령으로붵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비엔나 23구 리징에는 드르들라를 기념하여 드르들라가쎄(Drdlagasse)라는 거리가 있다.

 

드르들라의 8곡의 헝가리무곡집

 

드르들라는 세편의 오페레타, 한편의 바이올린 협주곡, 이밖에 여러 편의 오케스트라 작품과 두 편의 피아노 트리오, 그리고 수많은 바이올린 소품을 작곡했지만 작곡가로서의 명성보다는 후기 낭만파 연주가로서 더 많은 명성을 얻었다. 그의 음악은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멜로디를 기조로 삼으면서 이를 비엔나 스타일로 표현한 것이었다. 대표작은 Souvenir(1904), Vision(1906), Hey, Hay!(1908) 등이다. 감미로운 애조를 띤 그의 바이올린곡은 전쟁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의 대표작은 여러 형태로 편곡되어 연주되었으며 거장 바이올리니스트들인 얀 쿠벨리크, 마리 홀, 미샤 엘만, 요셉 치게티 등이 음반으로 내놓아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페레타는 Zlata sit(황금 네트: 1916), Komtesa z prodejny(상점의 백작부인: 1917), Bohyne lasky(사랑의 여신: 1940)이다. Bohyne lasky(Die Gottin der Liebe)는 Zlata sit를 수정한 것이다. 협주곡으로서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바이올린 협주곡 D 단조(1931)가 있다.

 

드르들라가 세상을 떠난 곳인 바드 가슈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