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이탈리아

레오폴도 무뇨네(Leopoldo Mugnone)

정준극 2011. 2. 3. 20:26

레오폴도 무뇨네(Leopoldo Mugnone)

위대한 지휘자 겸 작곡가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레오폴도 무뇨네

 

레오폴도 무뇨네는 1858년 9월 29일 나폴리에서 태어나 1941년 12월 22일 나폴리 인근의 카포디키노(Capodichino)에서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의 지휘자 겸 작곡가이다. 그는 특히 오페라의 지휘에 탁월하였으며 그가 작곡한 작품들도 대부분 오페라이다.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 더블 베이스 주자인 안토니오 무뇨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산 피에트로 왕립음악원에 들어가 당대의 파올로 세라오(Paolo Serrao)와 베냐미노 체시(Beniamino Cesi)로부터 작곡을 공부하였다. 무뇨네가 처음 작곡한 작품은 12세 때에 Il Dottor Bartolo Salsapariglia 라는 오페라였다. 그는 자기가 작곡한 이 오페라에서 바쏘 코미코(basso comico)의 역할을 맡아 하려 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베이스 소리가 나오지 않고 다만 알토 소리가 나오므로 일단은 포기해야 했다. 성악가가 되려던 그는 대기만성임을 생각하고 기다리기로 하고 이번에는 지휘자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는 16세 때부터 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1년후 그는 가리발디 극장으로부터 합창지휘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본격적인 지휘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해에 그는 누오보 극장(Theatre Nuovo)으로부터 오페레타 순회공연단의 합창 지휘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누오보 극장의 합창지휘자가 되었으나 얼마후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서 스카웃되었다. 무뇨네는 20세가 되지도 않은 청년시절에 이미 두 편의 오페라를 더 작곡하였다. 1막의 Don Bizzarro e le sue figlie 와 3막의 Mamma Angot al serraglio di Contantinopli 이다. 이들 오페라는 1870년대 말에 나폴리에서 공연되어 그런대로 인기를 끌었다.

 

젊은 시절의 레오폴도 뮤뇨네

 

무뇨네는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더블 베이스 주자로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는 당대의 더블 베이스 주자인 보테시니와 함께 이탈리아 순회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오페라 지휘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29세 때인 1887년 로마의 코스탄치 극장(Costanzi Theatre)에서 한 시즌을 전담한 것이었다. 이 때에 그는 '운명의 힘'(베르디), '루이 블라스'(필립포 마르케시)를 지휘하였다. 무뇨네의 지휘를 유명한 음악출판가인 손초뇨(Sonzogno)가 눈여겨 보게 되었다. 손초뇨는 무뇨네의 가능성을 보고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 들였다. 그리하여 1888년 그는 30세의 젊은 나이로 라 스칼라의 지휘를 맡게 되었으며 이어 파리의 테아트르 드 라 게트(Theatre de la Gaite), 니스의 뮤니시팔레 등에서 지휘를 하게 되었다.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한때 오페라 연출도 맡아했는데 1888년 토리노의 카리냐뇨(Carignano)극장에서 무뇨네의 지휘로 '카르멘'의 연출을 맡은 것은 그가 정신이상이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연출한 오페라였다.

 

유명한 악보출판가인 피에트로 손초뇨

 

노년의 베르디는 젊은 무뇨네를 대단히 우수하게 생각하였다. 특히 무뇨네가 라 스칼라에서 베르디의 마지막 작품인 '오텔로'와 '활슈타프'를 지휘한 것을 보고 자기의 작곡이념을 대단히 충실하게 번역하여 지휘했다고 하여 크게 만족하였다. 그로부터 베르디와 무뇨네는 나이를 떠나서 작곡가-지휘자라는 친구로서 지내게 되었다. 무뇨네는 1894년 파리에서 '활슈타프'를 지휘하였다. 이 공연을 본 보이토(Boito)는 베르디에게 편지를 보내어 '무뇨네는 대단한 통찰력으로 활슈타프의 스코어를 모두 암기하여 지휘하였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뇨네는 1897년 '활슈타프'의 팔레르모 공연도 지휘하였다. 토스카니니는 자기가 직접 주해를 달은 '활슈타프'의 악보를 무뇨네에게 보내어 참고토록 하였다. 그러자 무뇨네는 토스카니니의 코멘트가 적혀 있는 악보를 집어 던지며 '아이구, 여기서 웬 파르마 냄새가 나는가?'(Bah! Puzza di Parma)라고 말하였다.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인 파르마는 토스카니니가 '활슈타프'를 지휘했던 도시이기도 했지만 치즈로서 유명한 곳이다. 무뇨네는 슬쩍 파르마 치즈 냄새가 고약하다는 투로 말하였지만 실은 '토스카니니! 자기가 무언데 남의 지휘를 코치하려고 하는가?'라는 속셈이 들어 있었다. 아무튼 토스카니니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무뇨네로 말하더라도 대단한 성깔의 인물이었다. 1913년 10월 19일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라 스칼라에서 '나부코'가 공연될 때에 무뇨네가 지휘를 맡았다. 무뇨네는 과거 수십년동안 여러 지휘자들이 '나부코'의 해석을 한 사항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가 직접 다시 편곡하여 지휘했다.

 

레오폴도 뮤뇨네의 지휘를 풍자한 포스터

 

무뇨네의 오페라 작품은 물론이고 그가 역사적인 지휘를 맡았던 오페라 작품들은 거의 모두 베리스모 오페라였다. 1890년 무뇨네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세계 초연을 지휘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세계 초연을 지휘하게 된 데에는 출판가로서 오래동안 무뇨네와 연관을 맺고 있던 손초뇨의 배려가 컸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손초뇨 출판사의 신작 오페라 공모에서 1등을 차지한 작품이었다. 로마 코스탄치 극장에서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초연에는 당대의 소프라노 젬마 벨린치오니(Gemma Bellinciono)와 테너 로베르토 스타뇨(Roberto Stagno)가 주역을 맡았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무뇨네는 그후 여러 번에 걸쳐 젬마 벨린치오니의 공연을 지휘하였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세계 초연에서 산뚜짜 역할을 맡은 소프라노 젬마 벨린치오니와 투리두 역할을 맡은 테너 로베르토 스타뇨. 1890년 로마 코스탄치 극장. 레오폴도 무뇨네 지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성공 이후, 무뇨네는 여러 젊은 작곡가들로부터 자기들의 작품을 지휘해 달라는 간청을 받았다. 젊은 작곡가들은 무뇨네가 자기들의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고 해석한다고 믿었다. 한편, 무뇨네는 지휘를 하면서도 틈틈이 작곡에 전념하여 단막 오페라인 Il biricchino 를 완성하여 1892년 베니스에서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그다지 환영을 받이 못하였다. 그때 평론가인 한슬리크(Hanslick)는 무뇨네의 신작 오페라에 대하여 '그저 그런 2류 오페라이다. 못마땅한 작품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듬해인 1893년에 무뇨네는 Il birichino 를 바르셀로나에서 무대에 올렸지만 역시 '보통이다'라는 평을 받았다. 자기의 오페라가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다른 오페라들을 새롭게 해석하여 지휘함으로서 상당히 유명해졌다. 무뇨네는 글룩의 '오르페오', 로시니의 '구글리엘모 텔', 원래는 오라토리오 형식이었던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저주'(La Damnation de Faust)를 새롭게 해석하여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무뇨네는 1899년 파리 만국박람회 기간동안 파리의 그랜드 오페라 시즌에서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서 활약했다.

 

뮤뇨네의 오페라인 '비타 브레타노'의 포스터

 

무뇨네는 1900년 로마에서 '토스카'의 세계 초연을 지휘했다. 당시 '토스카'의 공연은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내용이어서 심지어 극장에 폭탄을 던지겠다는 위협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뇨네는 '토스카'를 지휘하여 대단한 박수를 받았다. 1905년에는 그가 작곡한 또 다른 오페라인 Vita Brettona 가 나폴리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그런데로 환영을 받았다. 1904년부터 06년까지의 2년 동안은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무뇨네는 코벤트 가든에서 '안드레아 셰니에'(슈트라코슈, 체나텔로, 삼마르코 출연), '돈 조반니'(슈트라코슈, 바티스티니 출연), '나비 부인'(지아케티 출연), '파우스트'와 '라 트라비아타'(멜바 출연), '마농 레스꼬', '라 보엠', '토스카', '메피스토펠레', '아이다', '가면무도회', '리골레토'(멜바, 슈트라코슈, 바티스티니 출연) 등을 지휘했다. 1904년에는 칠레아의 '아드리아나 르쿠브러'의 런던 초연을 지휘했으며 1906년에는 조르다노의 '훼도라'(지아케티, 체나텔로 출연)의 런던 초연을 지휘했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무뇨네가 주로 활동했던 곳이다.

 

무뇨네는 1906년 라 스칼라에서의 프란케티의 La figlia di Iorio(이오리오의 아가씨)의 세계 초연을 지휘했다. 프란케티는 무뇨네와 마찬가지로 파올로 세라오의 제자였다. 또한 무뇨네는 1906년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라고 하는 유제니아 부르치오(Eugenia Burzio)의 유명한 라 스칼라 데뷔를 지휘했다. 이때 부르치오는 프랑코 알파노(그 역시 파올로 세라오의 제자였다)의 Rissurrezione(부활)에서 여주인공인 Katiusha(카튜사) 역을 맡았다. 1910년에는 조르다노의 Mese Mariano의 세계 초연을 지휘했다.

 

소프라노 유제니아 부르지오(1872-1922)

 

이밖에도 무뇨네가 이탈이아에서 초연을 지휘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피에트로 플로리다의 Carlotta Clepier(나폴리 1882)

- 엔리코 사리라의 Regina e Contadina(나폴리 1882: 젬마 벨린티오니 출연)

- 스피로스 사마라의 Medge(로마 1888: 엠마 칼베 출연)

- 살바토레 아우테리-만토키의 Il conte di Gleichen(로마 1888-89 시즌)

- 쥘르 마스네의 Le Cid(로마 초연: 1888)

- 팔라디에의 Patria(로마 1888)

- 비제의 Djamileh(로마 1889-90 시즌: 젬마 벨린치오니 출연)

- 글룩의 Orfeo(리바이벌. 로마 1889)

- 니콜라 스피넬리의 Labilia(로마 1890: 젬마 벨린치오니, 로베르토 스타뇨 출연)

- 피에트로 플라타니아의 Spartacus(로마 1890-91 시즌)

- 바라발레의 Andrea del Sarto(로마 1890-91 시즌)

- 빈센초 페로니의 Rudello(로마 1890: 벨린치오니, 스타뇨 출연)

- 레온카발로의 I Pagliacci(로마 초연 1892)

- 푸치니의 Le Villi(로마 초연 1899)

- 쥘르 마스네의 Werther(로마 초연 1899)

- 쥘르 마스네의 Sapho(로마 초연 1900: 젬마 벨린치오니 출연)

- 마스카니의 La Maschere(나폴리 1901: 안젤리카 판돌피니, 지아케티 출연)

 

소프라노 젬마 벨린치오니. 무뇨네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뿐만 아니라 벨린치오니가 출연하는 여러 오페라를 지휘하였다.

 

뮤뇨네가 남미에서 오페라를 지휘하게 된 것은 출판가인 손초뇨의 주선에 의해서였다. 뮤뇨네는 주로 아르헨티나에서 오페라를 지휘했으며 남미의 다른 국가도 방문하여 지휘했다. 뮤뇨네는 남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898년 8월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남미 최초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지휘했다. 이탈리아어로 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였다. 우루과이에서는 '발퀴레', '토스카', '자자'(Zaza), '돈 조반니', 프란케티의 '게르마니아'(Germania), 마스네의 '타이스', 그리고 자기 작품인 Vita Brettona의 남미 초연을 지휘했다. 뮤뇨네는 1910년 남미에서는 처음으로 '신들의 황혼', 샤펜티어의 '루이제'를 지휘했다.

 

레오폴도 무뇨네

 

1933년 경에 무뇨네는 라 스칼라의 박물관과 로마 오페라, 그리고 나폴리 음악원(Naples Conservatorio)에 그동안 간직하고 있던 베르디, 마스네, 마스카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레온카발로 등이 보낸 편지와 문서들 약 2천점을 기증했다. 또한 푸치니와 관련된 물품들도 상당수를 기증하였다. 이탈리아의 마르치아니세(Marcianise)라는 마을에는 레오폴도 무뇨네를 기념하는 Teatre Mugnone(무뇨네극장)이 있다. 전쟁 중에 황폐해진 것을 최근 완전히 복구하여 현대식 극장으로 재개관하였다.

 

왼쪽으로부터 테너 로베르토 스타뇨, 레오폴도 무뇨네, 피에트로 마스카니, 젬마 벨린치오니. 1890년

 

마지막으로 에피소드 한 토막. 1919년 5월에서 8월 사이에 무뇨네는 코벤트 가든의 이탈리아 오페라 주간에서 '아이다' '토스카' '나비부인', 그리고 마스카니의 '이리스' 영국 초연을 지휘하였다. 이탈리아 오페라 주간의 총 음악감독은 저명한 지휘자인 토마스 비쳠(Thomas Beechum) 경이었다. 비쳠 경은 친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뇨네의 지휘를 두고 "정말 열정직인 사람이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지휘를 한다. 하지만 성미도 대단하다. 누구도 그의 성미를 어찌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단 하루도 성악가들이나 합창단원들, 또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폭풍과 같은 장면을 연출하지 않는 날이 없다. 무뇨네는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 이탈리아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다른 출연자들을 위협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지휘자가 돌아가겠다고 하니까 겁이 나서 무뇨네의 말에 순응하지 않을수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무뇨네가 다른 사람들과 격렬하게 다투는 장면은 대개 비쳠 경의 방에 와서야 끝냈다. 비쳠 경은 그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자 무슨 수를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피곤해서 견디지 못할 지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는 무뇨네가 또 어떤 성악가와 큰 소리로 다투면서 비쳠 경의 방에 들어오자 작심한 듯 무뇨네에게 미리 준비해둔 비행기표(실은 가짜 비행기표)를 꺼내 주면서 '무뇨네씨, 이탈리아로 돌아가겠다고 자꾸 주장하는데 좋소! 당장 가시오! 여기 비행기표가 있소!'라고 소리쳤다. 실은 블러핑이었다. 그러자 무뇨네는 드디어 입을 닫더니 그 큰 눈망울을 굴리면서 '선생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소리쳤다. 무뇨네는 자기가 왜 그렇게 단원들과 다투는지에 대하여 누가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랄까 봐서 장황하게 손짓 발짓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영국을 무척 사랑하며 비쳠 선생을 대단히 존경한다는 말로 연설을 끝냈다. 무뇨네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비쳠 경은 비행기표를 다시 걷우어 들이고 열심히 연습하여 줄것을 당부했다. 토마스 비쳠 경의 기지! 그 후로 무뇨네는 다시는 이탈리아로 돌아가겠다는 협박성 발언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비쳠 경은 사람들에게 '무뇨네만큼 베르디의 작품을 완벽하게 해석하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토마스 비쳠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