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토리오의 세계/특별 오라토리오

성엘리자베트의 전설

정준극 2011. 5. 6. 06:02

성엘리자베트의 전설

Legend of the Holy Elizabeth - 헝가리의 성엘리자베트: 투링기아의 성엘리자베트

프란츠 리스트의 오라토리오

 

오라토리오 '성엘리자베트의 전설'은 피아노의 거장 프란츠 리스트가 1864년, 그가 53세 때에 완성한 감동적인 작품이다. 이 오라토리오는 이듬해인 1865년 8월 15일 헝가리의 페스트-오펜(Pesth-Ofen)음악원에서 이 음악원의 창립 25주년을 기념하여 처음 공연되었다. 대본은 독일의 작가인 오토 로케트(Otto Roquette: 1824-1896)가 맡았다. 오토 로케트는 독일 투링기아(Thuringia)지방의 봐르트부르크(Wartburg)성에 있는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의 성엘리자베트의 생애에 대한 프레스코화를 보고 감명을 받아 '성엘리자베트의 전설'이라는 대본을 썼다. 이 오라토리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헝거리의 공주였던 성엘리자베트, 투링기아 영주의 아들로서 성엘리자베트와 결혼한 루드비히, 투링기아의 영주인 헤르만, 사악한 영주부인인 조피 등이다. 이 오라토리오는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각 파트는 각각 3장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엘리자베트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에 대하여는 말미에 자세히 설명코자 한다.]

 

'헝가리의 성엘리자베트의 자선'. Edmund Blair Leighton 작품.

 

첫파트의 첫장은 긴 오케스트라 도입부로 시작한다. 도입부는 강력한 클라이막스로 발전한다. 도입부의 음악은 주로 옛 교회의 예배음악에서 테마를 가져온 것이다. 엘리자베트의 모티브이다. 엘리자베트의 모티브는 오라토리오의 전편을 통하여 자주 들을수 있다. 오케스트라의 활기에 찬 클라이막스에 이어 합창(신부를 환영하도다)이 나온다. 투링기아의 헤르만(Hermann)영주가 '나의 귀여운 딸아 어서 오너라'라는 짦은 솔로를 부른다. 이를 받아 합창이 높이 외치는 듯한 환영의 노래를 부른다. 헤르만 영주가 계속하여 대단히 장엄한 솔로를 부른후 루드비히(Ludwig)와 엘리자베트의 짦은 대화가 나오고 이어 두 사람은 우아한 알레그레토로서 사랑을 다짐한다. 그후 어린이 합창이 '즐거운 잔치를 하려네'라는 합창을 부른다. 합창이 환영의 노래를 다시 부르고 성창부 이외의 기악 연주부가 연결된다. 빠르게 다가오는 슬픔을 예고하는 듯한 연주이다.

 

두번째 장은 짧은 전주곡에 이어 루드비히의 사냥노래로서 시작한다. '계곡의 안개로부터'라는 노래이다. 루두비히가 엘리자베트를 만나 얘기를 나누고 합창이 이들의 대화를 뒷받침한다. '주께서 기적을 행하셨네'라는 합창이다. 이어 교회 스타일의 인상적인 듀엣이 나온다.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오늘을 찬양하리'이다. 엘리자베트와 루두비히가 주님께 헌신하자는 다짐을 하는 노래이다. 두번째 장은 앙상블에 이어 듀엣과 전체 합창으로 마무리된다. 오케스트라는 풍부한 색채와 화려한 효과가 담긴 음악을 연주한다.

 

세번째 장은 십자군들의 노래로 시작한다. '성지 팔레스타인에서'이다. 마치 행진곡과 같다. 위풍당당한 리듬에 이어 루드비히가 엘리자베트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루드비히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엘리자베트를 잘 돌보아 줄 것을 당부한다. 헝가리 멜로디에 기본을 둔 합창이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화답한다. 엘리자베트가 부드러우면서도 간혹 감정이 폭발하는 듯한 심정으로 남편 루두비히와의 작별을 아쉬워 한다. '비통함으로 나의 마음이 엉켜있네'이다. 두 사람의 긴 대화는 간혹 십자군들의 긴장감있는 합창으로 중단되기도 한다. 십자군들의 합창은 장엄하면서도 때로는 비통하게 느껴진다. 두번째 장은 오케스트라의 긴장감에 넘치는 연주로 마무리된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환희에 넘친 듯한 병사들의 합창에 섞여 찬란한게 끝을 맺는다.

 

두번째 파트의 첫장(또는 네번째 장)은 느리면서도 슬픔에 가득찬 음악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빠른 속도의 격앙된 스타일로 바뀐다. 영주의 부인인 조피(Sophhie)의 등장을 의미하는 음악이다. 봐르트부르크(Wartburg)의 사악한 여인이다. 이어 루드비히가 전장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당도한다. 조피는 엘리자베트를 어서 성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한다. 엘리자베트는 '오, 슬픔의 날이여, 비탄의 날이여'라는 아리아를 부르며 슬픈 운명을 탄식한다. 조피는 다시 엘리자베트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집사장(Seneschal)에게 엘리자베트를 어서 속히 추방하라고 명령한다. 집사장은 어쩔수 없이 명령을 받든다. 엘리자베트는 다시한번 조피에게 '당신도 어머니가 아닌가?'라는 아리아로서 아이들을 위해 추방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다. 조피는 '지체하지 말지니라!'라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엘리자베트를 추방한다. 네번째 장은 엘리자베트가 비탄함으로 폭풍속으로 사라지면서 마무리된다.

 

다섯번째 장면(두번째 파트의 두번째 장)은 엘리자베트의 긴 솔로로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꿈을 회상하는 노래이다. 이어 합창이 '부족함의 지붕 아래에서'라는 내용으로 엘리자베트의 신세를 표현한다. 합창 중에 간간히 소프라노와 알토의 솔로가 나와 엘리자베트의 심정과 조피의사악한 마음을 강조한다. 그때 하늘에서 '엘리자베트, 그대 성스로운 여인이여'라는 솔로가 들린다. 이어 죽음의 장면이 뒤따른다. '이 세상의 밤이 아니로다'이다. 엘리자베트의 마지막 말은 '그대의 사랑이 나를 마지막으로 이끄네'이다. 합창이 '고통은 지나고'를 부르면서 다섯번째 장은 마무리된다. 리토르넬레(성창부가 아닌 기악 연주부)가 하프의 연주와 함께 천상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마지막 장면은 여러 모티브들을 집합한 간주곡으로 시작한다. 순례자의 노래, 십자군의 행진곡, 교회의 노래, 헝가리 멜로디 등이 혼합하여 나온다. 이들 모티브들은 풍부한 음향의 풀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발전한다. 종소리가 들리고 북소리가 울리며 엘리자베트의 장례식 노래가 이어진다. 황제의 솔로 '보좌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보네'가 뒤따른다. 느리고 엄숙한 노래이다. 이 노래를 받아 웅장한 앙상블이 나온다. 엘리자베트가 성자가 됨을 표현하는 음악이다. 처음엔 여성합창이 '눈물과 비통함 속에서'를 부르고 이를 남성 합창이 이어 받으며 곧이어 대합창으로 마무리된다. 십자군의 행진곡과 기사들의 노래인 '생명의 피가 흘렀도다'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교회합창이 Decorata novo flore(새로운 꽃으로 장식하리)를 부른며 헝가리와 독일의 주교들이 축복을 내린다. 그리고 모두 힘차고 웅장한 화음의 찬송을 부르는 중에 끝을 맺는다. Tu pro nobis Mater pia이다.

 

헝가리의 성엘리자베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항상 빵을 들고 다니며 나누어준다.

 

[성엘리자베트는 누구인가?]

헝가리의 성엘리자베트는 투링기아(Thuringia)의 성엘리자베트라고도 불린다. 헝가리 사람으로서 성엘리자베트를 모른다면 말이 안될 정도로 성엘리자베트는 헝가리에서 가장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성인이다. 성엘리자베트는 헝가리의 프레스부르크(Pressburg)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결혼정책에 의해 독일 투링기아에 가서 살았기 때문에 투링기아의 성엘리자베트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성엘리자베트가 태어난 프레스부르크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이다. 브라티슬라바는 헝가리어로는 포초니(Poszony)라고 부른다. 성엘리자베트는 1207년 프레스부르크에서 태어나 1231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독일 헤쎄(Hesse)의 마르부르크(Marburg)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수녀복을 입고 있는 성엘리자베트

 

성엘리자베트는 헝가리 국왕인 안드류2세(재임기간: 1205-35)의 딸로 태어났다. 엘리자베트의 오빠는 아버지인 안드류2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벨라4세(Bela IV)로서 헝가리 국왕이 되었다. 엘리자베트의 어머니의 여동생, 즉 이모는 실레지아의 하인리히1세 대공의 부인으로서 나중에 성인으로 시성된 성헤드비히(St Hedwig)이다. 1211년, 엘리자베트가 4세 때에 독일 투링기아의 헤르만1세는 헝가리 왕인 앤드류와 합의하여 헤르만의1세의 장남인 헤르만2세와 엘리자베트의 결혼을 약정하였다. 당시에는 정책상 어린 시절에 미리 정혼하는 사례가 많았다. 얼마후 어린 엘리자베트는 투링기아의 궁전으로 가서 장래의 남편인 헤르만2세와 함께 교육을 받으면서 지내게 된다. 헤르만2세는 엘리자베트보다 일곱살이나 많았다. 투링기아의 궁전은 투링기아 숲속에 웅장하게 자리잡은 봐르트부르크(Wartburg)성이다. 아이제나하(Eisenach)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봐르트부르크성은 훗날 마르틴 루터가 지낸 곳으로 그곳엔 아직도 그가 지내던 방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봐르트부르크성은 환락과 연회에 넘친 곳이었지만 어린 엘리자베트는 굳건한 신앙심으로 성장하였다.

 

성엘리자베트가 태어난 브라티슬라바(프레스부르크)성

 

그러던중 1213년에 프레스부르크에서 엘리자베트의 어머니인 게르트루트가 어떤 헝가리 귀족의 손에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헝가리 귀족은 독일에 대한 증오심으로 독일 출신인 게르트루트 왕비를 살해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투링기아와 헝가리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투링기아에서 지내는 헝가리의 공주인 엘리자베트는 주위의 미움과 질시 속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지내야 했다. 그러는 중에 1216년, 엘리자베트와 정혼한 헤르만2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트는 헤르만2세의 동생인 루드비히와 결혼하는 것으로 주선되었다. 루두비히는 신앙심이 두터운 엘리자베트를 크게 존경하여 주위의 질시로부터 엘리자베트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어떤 전설에 의하면 엘리자베트의 계모인 조피(Sophie)가 엘리자베트를 미워하여서 엘리자베트를 추방하였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른 얘기라는 것이 정설이다. 오히려 조피는 신앙심과 자비심이 많은 여인이었으며 어린 엘리자베트를 친 딸 처럼 돌보아 주었다는 것이다.

 

성엘리자베트가 어린시절을 보내고 결혼하여 살았던 봐르트부르크성

 

투링기아의 영주인 헤르만1세는 교회와 마찰을 빚어서 결국은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고 그로 인하여 정신이상이 생겨 1217년에 세상을 떠났다. 헤르만1세의 둘째 아들인 루드비히가 왕이 되었으며 예정된 대로 1221년에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였다. 신랑 루두비히는 21세였고 신부 엘리자베트는 14세였다. 루두비히는 신실하고 선량하며 엘리자베트를 극진히 위하는 훌륭한 남편이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지 몇년 후인 1226년 봄, 투링기아에는 뜻하지 아니한 홍수가 밀어닥쳤다. 사람들은 기아에 허덕여야 했고 더구나 질병이 만연했다. 마침 그 때에 루드비히는 교회의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있었다. 투링기아에 남아 있던 엘리자베트는 남편을 대신하여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심지어 엘리자베트는 자기가 입고 있던 왕비의 의상까지도 벗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에에 주었다. 엘리자베트는 항상 바구니에 빵을 그득히 담아 가지고 다니면서 자기는 먹지 못하더라도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엘리자베트는 봐르트부르크성 아래 마을에 병원을 짓고 병자들을 구호하는데 힘을 썼다. 그리고 밤에는 물레를 감아 옷감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듬해에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루드비히는 자기가 없는 동안에 엘리자베트가 행한 모든 활동을 알고 엘리자베트를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높아졌다. 얼마후 루드비히는 프레데릭2세 황제와 함께 성지를 향하는 십자군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루드비히는 1227년 십자군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마침 엘리자베트는 세번째 아이를 출산코자할 때였다. 루드비히의 전사 소식은 엘리자베트가 세째 아이를 낳은 후에 전해졌다. 엘리자베트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였다.

 

밤에도 쉬지않고 물레를 감아 옷감을 만드는 성엘리자베트

                                             

그보다 앞서서 1221년에 이탈리아의 성자 아씨시의 프란체스코를 따르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독일에 와서 정착하였다. 그중에서도 로데거라는 수도사는 봐르트부르크에 와서 엘리자베트의 신앙의 스승이 되었다. 그로부터 엘리자베트는 아씨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크게 공감하였다. 엘리자베트는 1225년에 아이제나하에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을 설립하는데 많은 후원을 하였다. 엘리자베트의 생활은 그야말로 기도와 금식과 자선과 참회의 생활이었다. 모두들 그를 높이 존경하여 마지않았다.

 

엘리자베트의 남편 루드비히가 십자군 전쟁에서 죽자 비록 다섯살의 어린아이였지만 이들의 아들이 왕의 자리에 올랐다. 얼마후 어린 왕의 삼촌인 하인리히 라스페(Heinrich Raspe)가 섭정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어린 왕을 폐하고 자기가 왕의 자리에 올랐다. 엘리자베트의 시녀들의 증언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 하인리히 라스페가 엘리자베트를 봐르트부르크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엘리자베트가 봐르트부르크를 떠난 것은 순전히 자의에 의해서라는 것이었다. 당시 마르부르크성은 엘리자베트가 미망인의 상속 몫으로 유일하고 받은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마르부르크에서 추방 당할 때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는 Te Deum(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을 불렀다고 한다. 그로부터 오늘날에도 마르부르크 수도원에서는 엘리자베트가 추방 당한 밤을 기억하여 Te Deum을 부르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다. 엘리자베트는 루드비히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두었다. 엘리자베트가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마르부르크에서 추방당할 때 잠시 얼굴만 보았던 것이다. 그후 아이들은 누군가가 어디로 데려갔다.

 

가운데 마르부르크성과 오른쪽의 성엘리자베트 기념교회

 

마르부르크성에서 추방당한 엘리자베트는 시녀 한명과 함께 근처의 수도원으로 들어가 자기의 샐활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며 수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후 엘리자베트에게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미망인 상속금을 받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2천 마르크를 받았다. 2천 마르크가 요즘의 가치로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한 금액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엘리자베트는 그 중에서 5백 마르크를 그날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228년 4월의 성금요일이었다. 엘리자베트는 나머지 돈으로 마르부르크에 병원을 짓고 매일 나가서 병자들을 간호하였다. 엘리자베트는 병원에서 병자들을 간호하면서 여러번에 걸쳐 치유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엘리자베트를 성인으로 추대키 위해 절차를 추진하였다. 엘리자베트의 시성의식은 1235년 5월 28일 오순절 성령강림일에 이탈리아의 페루지아에서 거행되었다. 교황 그레고리9세가 직접 참석하여 엘리자베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그해 8월에 마르부르크에 성엘리자베트에게 봉헌하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정초식이 열렸다. 이듬해에(1236) 5월 1일에 아름다운 고딕교회가 완성되었다. 성엘리자베트가 세상을 떠난지 5년만의 일이었다. 교회봉헌식에는 프레데릭2세 황제가 직접 참석하여 성엘리자베트의 시신을 안치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성엘리자베트를 그린 그림은 대체로 왕관을 쓴 왕비, 또는 공주가 빵바구니를 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이다. 그렇지 않으면 장미꽃을 안고 있는 모습이다. 장미꽃을 안고 있는 그림은 주로 혼자 있는 경우가 많지만 간혹 남편인 루드비히와 함께 있는 장면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루드비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하기 위해 남모르게 급히 걸어가고 있는 엘리자베트를 우연히 만났다는 것이며 그러자 엘리자베트가 들고 있던 빵을 보이지 않게 감추려하자 빵들이 갑자기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변했다고 한다.

 

장미꽃과 함께 있는 성엘리자베트.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빵이 장미꽃으로 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