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토리오의 세계/특별 오라토리오

하이든의 '천지창조' 집중점검

정준극 2012. 3. 3. 07:25

하이든의 '천지창조' 집중점검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작곡하고 있는 파파 하이든


하이든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뛰어난 불후의 걸작인 '천지창조'는 하이든이 런던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을 보고 감동하고 감화되어서 작곡한 것이다. 1791년, 그러니까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에 하이든은 런던에 있었다. 이때 하이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헨델의 '메시아'와 '이집트의 이스라엘'을 듣고 그 장엄하고 숭고함에 깊이 감격하였다. 당시의 공연은 1천명 이상의 합창단과 연주자들이 참가하는 대규모였다. 하이든은 우선 그같은 규모에 경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비엔나에서는 일찍이 그런 규모의 오리토리오 공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이든의 초기 전기작가인 주세페 카르파니에 따르면 하이든은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을 듣고서 마치 작곡을 처음 공부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멍하니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할수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하이든은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을 듣고나서 소절 하나하나, 음표 하나하나를 깊이 되새겨 보면서 나름대로의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장엄한 음악을 만든 헨델에 대하여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고 한다. 하이든이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을 들었을 때에는 헨델이 세상을 떠난지 30여년이 지난 때였다. 하이든은 런던에 있을 때에 그도 헨델처럼 위대한 오라토리오를 작곡해야 겠다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주제는 누구나 받아들일수 있는 성서이야기로 정하기로 했다. 성서이야기는 어느 스토리보다도 숭고하고 존엄하기 때문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메시아' 공연 후


하이든은 성서이야기를 오라토리오의 주제로 삼기로 작정했지만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지에 대하여는 아이디어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영국을 떠나기 직전인 1975년 여름에 임프레사리오이며 바이올리니스트인 요한 페터 잘로몬이 하이든에게 어떤 익명의 사람이 쓴 '천지창조'의 영어 대본을 건네주고 '선생께서 새로운 오라토리오를 구상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대본을 참고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천지창조'를 오라토리오로 만들려는 시도는 그때로부터 반세기 전에 헨델이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광범위하고 철학적이며 신앙적인 주제라서 감히 시도를 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하이든은 잘로몬으로부터 대본을 받고나서 즉시로 이 대본이 오라토리오 구성에 적합한지를 들여다 보았다. '천지창조'의 대본은 구약의 창세기와 밀튼의 '실락원'을 참고로 한 것이었다. 특히 파트 2의 에덴동산 동물들을 설명한 부분과 파트 3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 및 아담과 이브 사랑의 듀엣은 '실락원'을 그대로 참고한 것이었다. 또한 주를 찬양하는 합창 파트는 시편의 구절에서 인용하기도 했다. 사실 하이든은 영어가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천지창조'의 영어 대본을 완전하게 소화하지는 못했다.


하이든의 '천지창조'에 지대한 영향을 준 헨델


비엔나에 돌아온 하이든은 궁정 도서관장인 고트프리트 반 스비텐 남작에게 '천지창조' 대본을 보여주고 과연 오라토리오로서 적합한지 의견을 물어보았다. 스비텐 남작은 예술과 문학에 대하여 대단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었다. 스비텐 남작은 하이든이 건네 준 영어 대본을 보고 난후 '주제가 대단히 만족스럽다. 이 주제로 오라토리오를 만든다면 당신의 뛰어난 재능을 크게 보여줄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작곡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비텐 남작은 영어로 된 대본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사실 스비텐 남작만큼 그 일에 적합한 인물도 없었다. 스비텐 남작은 영어 대본에서 음악적으로 표현하기가 적당치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최종 대본에서 삭제하였다. 그리고 영어 대본 자체도 음악에 적합하도록 손질하였다. 다만 구약의 구절이나 밀튼의 시를 최대한 존중하는 입장에서 가사를 정리하였다. 스비텐 남작의 독일어 대본은 1796년 말쯤해서 완성되었다. 그때 쯤해서 하이든은 이미 창세기 1장 첫머리에 나오는 '혼돈'의 상태를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한 스케치를 시작하였다. 스비텐 남작은 친절하게도 하이든의 작곡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이 부분은 푸가로, 저 부분은 톤 페인팅(tone-painting)으로 하면 좋겠다는 식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이든은 스비텐 남작의 조언을 상당부분 작곡에 반영하였다. '천지창조'에서 가장 중심되는 부분은 '빛이 있어라'(Let there be Light)이다. 그것으로 천지창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 만물은 실제로 빛을 기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빛은 천지창조의 모든 것을 대표해 주는 말이다. 창세기 1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되어 있다. 하이든은 이 부분이 전체 중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빛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말은 한번이면 족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빛이 있었고'(And there was Light)라는 후속 말은 생략하였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빛'의 중요성이 등한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이 있어라' 파트는 실은 전체 음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영감으로 만들어진 파트이다.


'천지창조'의 독일어 대본을 만든 바론 고트프리트 반 스비텐


'천지창조'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것이다. 하이든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그런 구조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파트 1과 2에서는 6일간의 천지창조가 세명의 대천사(천사장)들에 의해 선포된다. 라파엘, 우리엘, 가브리엘이다. [우리가 잘 아는 미하엘은 등장하지 않는다.] 세명의 천사들이 천사들과 함께 넷째날이 지나고나서 부르는 '저 하늘이 주의 영광을 선포하고'는 대단히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곡이다. 천사들은 각각 6일간의 천지창조를 어찌보면 무미건조한 레시타티브로서 선포한다. 그런 후에 대천사들은 아름답고 숭고한 아리아로서 하나하나의 창조를 부연해서 설명한다. 이같은 레시타티브와 아리아들은 '크신 일을 이루셨네'라는 기쁨에 넘치면서도 웅장한 합창으로 마무리된다. 우리 인간이 주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이 주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내용이다. 파트 3은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가 첫 아침을 맞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를 찬양하고 부부로서 서로의 사랑을 노래한다. 이 역시 각각 파트 2에서의 클라이막스처럼 승리의 합창으로 마무리되게 하였다. 실로 하이든은 레시타티브와 이어서 전개되는 아리아에서 톤 페인팅에 대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재능은 그의 과거 오페라들과 1775년의 이탈리아 오라토리오인 '토비아스의 돌아옴'(Il ritorni di Tobia)에서 탁마하였던 것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하이든은 여기에 새로운 과감성과 예술적인 민감함을 추가하여 더욱 빛나는 음을 창조하였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하이든은 새로운 음의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특히 목관악기의 사용에 있어서 놀라운 창조력을 보여주었다. 클라이막스의 합창은 18세기의 특징인 음악적 웅대함의 축소판이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파트는 하이든의 완숙한 교향곡 테크닉과 대위법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자유롭고 변화적이며 찬란하기까지 한 효과를 보여주는 것으로써 아마도 헨델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시어서 천지창조를 마무리하신 하나님


'천지창조'는 계몽시기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영국의 조지 시대와 비엔나의 1790년대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얘기다. 축복받고 이성적으로 질서 있는 우주, 그리고 인간애에 대히여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타락은 마지막 대합창 이전에 잠시 일상적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여기에 하이든 자신의 독실한 신앙도 용해되어 있다. 그의 신앙심은 우울하거나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활기차고 화해하는 것이다. 실제로 하이든은 '천지창조'를 작곡하면서 각 장면에서 자신이 직접 신앙적인 헌신으로 등장한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그런 '천지창조'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는 이 작품에 비도덕적인 요소가 있으며 세속적인 면도 분명히 내재되어 있다면서 즉각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래서 예배와 관련된 행사에서는 이 오라토리오의 연주를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천지창조'의 대성공을 막지 못하였다. '천지창조'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공연된 것은 1798년 4월 29일, 비엔나의 슈봐르첸버그 궁전에서였다. 공개 리허설이었다. 귀족들만이 초청되어 감상하였다. 그리고 일반 대중을 위한 공연은 이튿날인 4월 30일이었다. 하이든이 직접 지휘하였다. 청중들은 감격의 환호를 보냈다. 하이든의 전기작가인 게오르그 그리징거는 이날의 연주에 대하여 '하이든은 그가 원하던 대로 연주가 진행되자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의 기분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청중들은 그야말로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요함 속에서 음악을 감상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어 하이든은 '내 몸 전체가 차갑게 얼어 붙는듯했다. 그런가하면 뜨거운 불길이 나를 휩싸는 듯했다. 나는 여러번이나 내가 이러다가 갑자기 심장마비에 걸리지 않을까라고 두려워했다'고 덧붙였다는 것이다. '천지창조'는 많은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의해 그 다음달인 5월에 두번이나 슈봐르첸버그 궁전에서 비공식적인 연주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서너번에 걸친 '천지창조' 연주회에는 주로 귀족들이 입장하였고 일반 시민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노이어 마르크트에 있는 슈타트팔레 슈봐르첸버그. 그림. 슈봐르첸버그는 오스트리아의 대공으로서 1771년에 태어났으며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명장이었다. 슈타트팔레 슈봐르첸버그는 슈봐르첸버그 대공의 겨울 궁전이었다. 주소는 1구 노이어 마르크트 8번지이며 마르코 다비아니 가쎄, 캐른트너슈트라쎄에도 면하여 있다. '천지창조'가 처음 선을 보인 장소이다.


오늘날의 슈봐르첸버그 궁전(슈타트팔레)


'천지창조'가 정작 대성공을 거둔 것은 이듬해인 1799년이었다. 이때에는 비엔나의 일반 시민들도 연주회에 참여해서 들을수 있었다. 1799년 3월 19일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서였다. 그랜드 스케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통 볼수 있는 그런 규모 보다는 더 웅장한 것이었다. 오케스트라는 120명이나 되었다. 목관 파트는 일반적인 구성보다도 세배나 많은 것이었다. 합창은 남성 60명이 맡았다. 소프라노파트는 보이스 소프라노가 맡았다. 청중들의 관심은 당시 17세의 소프라노 테레제 잘(Theese Saal)이 얼마나 훌륭하게 노래를 부르냐는 것을 듣는 것이었다. 테레제 잘은 어린 나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프라노였다. 이날의 연주회는 하이든의 생애에 있어서 대단한 승리를 안겨다 준 것이었다. 비엔나의 저널리스트인 요제프 리히터는 '인간의 폐와, 양의 창자와 송아지의 가죽이 그런 소리들을 만들어 내다니...그것은 기적이다. 나는 지금까지 극장에서 관중들의 이만큼 만족해 하는 연주회는 보지 못했다. 나는 밤새도록 세상만물이 창조되는 꿈을 꾸며 지냈다.'라고 썼다. 스웨덴의 요한 베어발트는 이렇게 썼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연주회는 놀랄만큼 성공적으로 마쳤다. 파트가 마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연주 중에는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연주회가 끝나자 관중들은 '파파 하이든 앞으로 나오세요'라고 소리쳤다. 마침내 하이든이 무대 앞에 나와서 인사를 하자 천둥과 같은 박수가 쏟아졌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파파 하이든, 만수무강하세요. 하이든 만세, 음악 만세'라고 외쳤다.


호프부르크의 정문 쪽에 있었던 부르크테아터의 모습. 1799년 3월의 '천지창조'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이후 '천지창조'는 비엔나 음악회에 정기적으로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그리고 몇년 지나서부터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연주되기 시작했다. 이어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박수를 받으며 연주되었다. 런던 초연은 1800년 3월 28일이었다. '천지창조'는 음악 전문가들이나 일반인들 모두가 존경하는 작품이 되었다. 어떤 특별한 작품이 시대를 초월해서, 그리고 남녀노서를 불문하고, 또한 신앙과 사회적 배경을 뛰어 넘어서 이처럼 사랑을 받은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렇듯 '천지창조'에 대한 모두의 뜨거운 존경 중에서도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에서는 영어 가사가 못마땅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스코틀랜드의 출판가인 조지 톰슨이란 사람은 '천지창조'의 영어 가사를 '비참할 정도의 엉터리 영어'라고 말했다. 영국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이상한 성품이 있었다. 헨델이 최고이며 다른 작곡가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하이든의 '천지창조'는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에 비하여 뒤떨어진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왔다. 프랑스에서도 '천지창조'를 비하하는 무리들이 간혹 등장했다. 예를 들면 베를리오즈이다. 그는 '천지창조'에 대한 조롱을 밥먹듯이 했다. 이런 말도 했다. '이 작품에 대하여 충심으로부터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소가 움메하고 우는 소리, 벌레들이 붕붕거리는 소리, 카르셀 램프처럼 눈을 못뜨게 만드는 C 음. 아담과 우리엘과 가브리엘, 플루트 솔로들, 애교를 떠는 듯한 음악, 이 모든 것이 나의 이미에 주름살을 지게 만든다. 심지어는 누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천지창조 이후 에덴 동산의 모습

 

사실상 '천지창조'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음의 묘사(톤 페인팅)에 대하여 매력을 느꼈다. 예를 들면 물이 한곳으로 모이는 장면, 거친 물결이 일어나는 장면, 별들이 반짝이는 장면, 동물들의 울음소리 등의 음악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보니 새로운 낭만주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된 세대는 하이든의 소가 움메하는 소리, 사자 소리, 호랑이 소리, 양들이 배에하는 소리 따위를 구태의연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웃기는 음악표현이라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이것도 음악이냐'는 식으로 조롱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래서인니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천지창조'가 전처럼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천지창조'는 국가적인 기념비로서의 위상을 잃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천지창조'는 세계적으로 새로운 각도에서 평가되기 시작했다. 특히 2차 대전이 끝난후부터 그러했다. 이같은 동향은 하이든 자체에 대한 재조명에 힘을 입은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하이든을 헨델과 굳이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 되었다. 후기 낭만주의에 젖은 심미주의적인 사람들도 하이든의 자연주의적인 표현을 다시 엔조이하기 시작했다. 또한 영국에서는 스비텐 남작의 영어 대본을 '비참할 정도로 엉터리 영어'라고 비난했었는데 그 영어가 오히려 묘한 매력을 주는 것이어서 인기를 더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파트 3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사랑의 듀엣이 지나치게 악마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면서 눈살을 찌푸렸으나 아담과 이브의 듀엣은 마치 비엔나의 대중적인 춤곡을 연상케 해서 사랑을 받았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서 파파게노와 파파게나의 듀엣이 아담과 이브의 듀엣과 흡사하다는 해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