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추가로 읽는 366편

120. 우도 침머만의 '백장미'

정준극 2011. 6. 2. 18:40

백장미(Weisse Rose: White Rose)

우도 침머만(Udo Zimmermann)의 단막 실내오페라

나치의 잔혹함에 항거하다가 희생된 독일 대학생들의 이야기

 

작곡가 우도 침머만

 

우도 침머만의 오페라 '백장미'(Weisse Rose)는 나치에 반대하다가 희생된 20대 초반의 두 젊은 남녀 대학생에 대한 스토리이다. 뮌헨대학교에 다니던 한스 숄과 조피 숄이라는 남매이다. 이들은 뜻을 같이 하는 다른 대학생들과 함께 '백장미'(Die Weisse Rose) 그룹을 조직하여 비폭력주의를 원칙으로 나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3년 2월 22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나치의 잔혹함에 대한 실상을 고발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잊지 말자는 오페라는 몇편이 있지만(폴란드의 미츠슬라브 봐인버거의 '승객'(Die Passagierin), 에른스트 크레네크의 '독재자'(Der Diktator), 빅토 울만의 '아틀란티스의 황제', 덴마크의 쿤젠의 '홀거 단스케'등이 있지만 순수한 학생들의 저항운동을 그린 오페라는 드레스덴 출신의 우도 침머만(Udo Zimmermann: 1943-)이 작곡한 '백장미'가 유일하다.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뮌헨대학교 구내의 보도에 있는 '백장미' 그룹 기념 조형물. 그들이 배포했던 전단들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우도 침머만의 단막 실내 오페라인 '백장미'는 1967년 6월 17일 드레스덴음악원에서 초연되었다. 독일어 대본은 작곡가의 동생으로서 독일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며 작가인 잉고 침머만(Ingo Zimmermann)이 맡았다. 초연은 대체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전문적인 작품으로서는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우도 침머만은 형식적인 대사를 줄인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 초연이 있은지 거의 20년 후인 1986년 2월 27일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에서 다시 초연을 가졌다. 관중들과 평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로부터 '백장미'는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어 비엔나 슈타츠오퍼, 베를르 코미셰 오퍼, 취리히 오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등에서 공연되었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이스라엘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하였다. 미국 초연은 1988년 오페라 오마하(Opera Omaha)가 공연한 것으로 소프라노 로렌 플라니간(Lauren Flanigan: 1959-)이 출연한 것이었다.

 

'백장미'의 동지들인 한스 숄(좌), 조피 숄(중), 크리스토프 프로브스트(우). 조피는 22세였다.

 

출연자는 단 두명으로 오빠인 한스 숄(Hans Scholl: 1918-1943: T)과 동생인 조피 숄(Sophie Scholl: 1921-1943: S)이다. 함부르크 초연에서는 한스 숄을 테너 루츠-미하엘 하르더(Lutz-Michael Harder)가, 조피 숄을 소프라노 가브리엘레 폰타나(Gabriele Fontana)가 맡았다. 한스 숄은 테너가 맡지만 하이 바리톤이 맡았던 경우도 많이 있다. 지금까지 나온 음반으로서는 Die Weisse Rose라는 타이틀로 작곡가인 우도 침머만이 뮌헨 인스트루멘탈앙상블을 직접 지휘하고 초연에 출연하였던 루츠-미하엘 하르더와 가브리엘레 폰타나가 취입한 것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Weisse Rose 라는 타이틀로서 역시 작곡가인 우도 침머만이 무지카 비바 챔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프랭크 쉴러(한스)와 그라치나 치클라레카(Grazyna Szklarecka: 조피)가 취입한 것이 있다. 이 오페라의 타이틀은 간혹 Die Weisse Rose라고하여 정관사를 붙였으나 출판사에서는 Weisse Rose라는 타이틀로 스코어를 출판하였다. 두가지 모두 통용한다.

 

뮌헨공연. 조피 숄이 쓰러져 있고 장미 두 송이가 세워져 있다.

 

'백장미' 그룹은 1942년 6월에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뮌헨대학교의 학생들로 조직되어 나치의 전쟁 정책을 비난하는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한스와 조피의 숄 남매가 주도하였으며 여기에 크리스토프 프로브스트(Christoph Probst: 1919-1943)이 적극 가담하였고 이밖에 빌리 그라프, 알렉산더 슈모렐 등이 밀접하게 관련하였다. 또한 음악사 교수인 쿠르트 후버(Kurt Huber)교수가 이들을 지도하였다. 이들 6명의 핵심 멤버들은 모두 1943년에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백장미' 그룹은 모두 6장의 전단을 만들었는데 1943년 2월 18일 집에 두었던 여섯번째 전단을 가정부가 발견하고 곧바로 게슈타포에 신고하여 모두 체포되었다. 며칠 후인 2월 22일, 숄 남매와 크리스토프 프로브스트가 국민법정에서 재판을 받아 세 사람 모두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판결을 받았다. 이들에 대한 사형은 재판이 끝나자 마자 뮌헨의 슈타델하임 형무소에서 집행되었다. 이들의 묘지는 처형장에 인접한 곳인 Am Perlacher Forst(암 페를라허 포르스트)라는 공동묘지에 있다.

 

뮌헨의 암 페를라허 포르스트 공동묘지에 있는 한스 숄, 조피 숄, 크리스토프 프로브스트의 묘지

 

오늘날 '백장미' 그룹의 멤버들은 독일 전국을 통하여 위대한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제3제국에 저항하다가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중 특히 조피는 전후 독일에서 우상처럼 여겨졌다. 이들이 작성한 전단 중 여섯번째의 것은 충분히 배포되기 전에 게슈타포에게 압수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운동에 동조하였던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 백작이 이를 독일에서 은밀히 빼내어 스캔디나비아를 통해 영국으로 가져갔다. 연합군은 이 전단을 수백만장이나 인쇄하여 1943년 7월 독일 전역에 비행기로 투하하였다. 전단의 제목은 '뮌헨 학생들의 선언서'(The Manifesto of the Students of Munch)였다.

 

우도 침머만의 오페라 '백장미'의 한 장면. 한스와 조피 숄 남매

 

뮌헨대학교 본관 앞 광장은 한스와 조피 숄 남매를 기념하여 Geschwister-Scholl-Plazt(숄 남매 광장)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광장의 건너편에 있는 광장은 Professor-Huber-Platz(후버교수 광장)이라고 명명되었다. 대학교 앞에는 루드비히슈트라쎄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커다란 분수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한스와 조피 숄에게 봉헌되었고 다른 하나는 후버 교수에게 봉헌되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학교, 거리, 광장 등은 '백장미' 멤버들을 기념하여 그들의 이름을 붙인 곳이 많다. 독일의 권위있는 문학상의 명칭은 Geschwister Scholl(숄 남매)상이다. 음악에 있어서는 우도 침머만의 오페라 Weisse Rose 이외에도 한스 베르너 헨체가 In memoriam: die weisse Rose라는 곡을 썼다. '백장미' 그룹의 저항운동은 독재에 대한 반대로 인하여 많은 나라에서도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에 진주한 연합군도 '백장미'의 저항운동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런 일도 있었다. 작곡가 칼 오르프(Carl Orff)는 나치에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연합군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칼 오르프는 그가 '백장미' 그룹의 창립 멤버 중의 하나라고 말하여 석방되었다. 실제로 오르프가 '백장미' 저항운동과 관련을 맺었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음악사 교수인 쿠르트 후버 교수와 친분이 있었을 뿐이었다. 어쨋든 칼 오르프의 케이스는 '백장미' 그룹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잘 말해 주는 것이었다.

 

독일정부가 발행한 조피 숄 기념우표

 

'백장미' 저항운동은 언론, 영화, 문학, 미술에 있어서도 주제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1970년대에 '백장미'와 관련한 영화가 여러편 제작되었다. 하나는 바바리아 주정부가 지원한 것으로 Das Versprechen(약속)이라는 제목이었다. 이 영화는 독일 이외에서는 잘 알려지지 못했다. 1982년에는 Fünf letzte Tage(마지막 5일)이라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조피 숄의 룸메이트였던 엘제 게벨(Else Gebel)이 전하는 조피 숄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유명한 배우 레나 슈톨체(Lena Stolze)가 조피의 역할을 맡은 영화였다. 그해에 레나 슈톨츠는 또 다른 영화인 마히엘 페어회벤이 감독한 Die Weisse Rose에도 출연하였다. 독일은 2005년 2월에 조피 숄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였다. Sophie Scholl - Die letzten Tage(조피 숄: 마지막 날들)이라는 타이틀의 영화였다. 율리아 옌츄(Julia Jentsch)가 조피의 역할을 맡았다. 생존자들의 증언, 미공개 문서들이 나오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2006년도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외국영화상 후보로 올랐었다. 율리아 옌츄는 인터뷰에서 조피의 역할을 맡은게 된 것을 '일생의 영광'이라고 말했다. 옌츄는 조피 역할을 맡아서 유럽영화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여배우상을 받았으며 독일영화상에서도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또한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았다.

 

 

레나 슈톨체가 조피 숄의 역을 맡은 영화 '백장미'의 장면들

 

미국의 극작가인 릴리안 갸레트-그로그(Lillian Garrett-Groag)의 연극 The White Rose는 1991년 캘리포니아주 산 디에고에서 초연되었다. 독일, 영국, 미국 등지에서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백장미' 운동을 주제로 한 연극대본을 만들어 학생들로 하여금 연극을 공연토록 한 경우가 많다. 독일의 국영 ZDF-TV는 2003년에 '가장 위대한 독일인'을 선정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바흐, 괴테, 구텐베르크, 빌리 브란트, 비스마르크,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이 선정되었다. 그러자 전국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여성잡지 Brigitte(브리기테)는 별도로 조피 숄을 20세기에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선정하였다. '백장미'에 대한 서적으로는 Sophie Scholl and the White Rose라는 책이 2006년에 영어로 발간되었다. 2009년에는 History Press 출판사가 Sophie Scholl: The Real Story of the Woman Who Defied Hitler(조피 숄: 히틀러에 도전한 여인의 실화)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영국에서 베스트 셀러의 리스트에 올랐었다. 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국 국영TV 채널 4는 2009년 3월에 Sophie Scholl: The Final Days(조피 숄: 마지막 날들)이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방영했다.

 

율리아 옌츄가 조피의 역할을 맡은 영화 '조피 숄: 마지막 날들'의 한 장면

 

2003년에 텍사스대학교에서는 일단의 학생들이 The White Rose Society(백장미 협회)를 설립하였다. 홀로코스트를 추모하고 인종학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자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협회는 매년 4월 캠퍼스에서 1만 송이의 백장미를 나누어주는 행사를 가지고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단 1일 동안 희생된 인원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이같은 행사를 가지는 날은 유태인의 홀로코스트 기념일인 욤 하쇼아(Yom Hashoah)와 날짜를 같이 하고 있다. 이 단체는 또한 Rose of Treason(반역의 장미)라는 연극을 공연한다. '백장미' 지하운동에 대한 연극이다. 그리고 Sophie Scholl - Die letzten Tage(조피 숄 - 마지막 날들)라는 영화를 상영한다. 영국에 본부를 둔 인종청소방지 학생 네트워크인 Aegis Students(이기스 슈투덴츠)는 '백장미'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네트워크의 심볼을 백장미로 삼았다. '백장미' 운동은 세계 각지의 반전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2007-08년에는 세계 각지의 모병센터에 파이프 폭탄들이 설치되었는데 폭탄에는 '백장미'라는 글을 적어 놓았다.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가는 조피 숄(율리아 옌츄).

 

[크리스토프 프로브스트(Christoph Probst)]

'백장미' 그룹의 코어 멤버로서 영화에는 등장하지만 오페라에는 나오지 않는 크리스토프 프로브스트를 소개코자 한다. 그는 21세 때에 헤르타 도린(Herta Dohrin)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미하엘, 빈센트, 카티야였다. 프로부스크가 체포되었을 당시에 미하엘은 세살이었고 빈센트는 두살이었으며 딸 카티야는 태어난지 4주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부인인 도린은 산후열로 인하여 병상에 누워 있었다. 프로브스트는 재판을 받으면서 어린 아이들이 세명이나 있으며 부인은 아파서 누워 있으므로 그가 이들을 돌보아야 하니 자비를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하지만 나치는 프로브스트의 간청을 묵살하고 체포한지 4일만에 길로틴에서 목을 자르는 참혹한 처형을 하였다. 나중에 프로브스트의 사정을 알게 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사실 프로브스트는 '백장미' 그룹에 늦게 참여하였다. 그리고 전단지의 내용을 작성하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으며 뒤에서 전단지의 디자인 등을 도와 주었을 뿐이었다. 그것도 모든 전단지의 디자인을 했던 것이 아니라 일곱번째의 전단지 하나만을 디자인하였다. 한스 숄과 동생인 조피 숄은 새로 만든 이 일곱번째 전단지와 돌리고 남은 여섯번째 전다지를 들고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가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나치가 보는 견지에서의 죄과는 경미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프로브스트는 '백장미' 그룹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크리스토프 프로브스트의 아버지인 헤르만 프로브스트는 학자로서 특히 산스크리트어 연구가였다. 아버지는 어린 크리스토프에게 문화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사상을 심어주었다. 아버지 헤르만 프로브스트는 나치에 의해 퇴폐예술가로 낙인 찍힌 사람들 중 몇명과 친분을 쌓고 왕래하였다. 그런 그를 보고 부인인 카린 카타리나 클리블라트는 아버지를 새로운 독일건설에 장애가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여서 혐오하였고 결국 1919년(우리나라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에 이혼하였다. 아버지는 엘리제 야페(Elise Jaffee)라는 여인과 재혼하였다. 엘리제 야폐는 유태인이었다. 아버지가 야페와 재혼하고나서 얼마후에 크리스토프가 태어났고 또 동생 안젤리카도 태어났다. 동생 안젤리카에 따르면 오빠 크리스토프는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나치 정신에 대하여 심하게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크리스토프는 17세에 아비투르(Abitur)를 마쳤으며 얼마후 군대복무를 끝내고 돌아와서는 뮌헨대학교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