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추가로 읽는 366편

121. 로시니의 '결혼계약서'

정준극 2011. 6. 3. 20:24

결혼계약서(La Cambiale di Matrimonio) - The Marriage Contract(The Bill of Marriage)

조아키노 로시니

 

첫 오페라를 작곡할 당시의 로시니

   

조아키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 1792-1868)는 모두 39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첫 오페라는 그가 18세 때 선보인 것이었다. 단막의 화르사 코미카(farsa comica: opera bouffe)인 '결혼계약서'(La Cambiale di Matrimonio: The Marriage Contract)이다. 결혼계약서라는 것은 무엇인가? 결혼할 당사자들은 잘 알지도 못한채 부모들의 협의에 의해 결혼하기로 계약을 맺어 놓는 서류이다. 우리로서는 좀처럼 생소한 관습이지만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유지되어온 관행이었다. '결혼계약서'의 대본은 게타노 로씨(Gaetano Rossi)가 작성했다. 카미요 페데리치(Camillo Federici)의 희곡을 바탕으로 삼았으며 그 전에 주세페 체케리니(Giuseppe Checcherini)라는 사람이 역시 그 희곡을 바탕으로 써놓은 오페라 대본을 참고로 삼았다. 체케리니의 대본은 일단 카를로 코치아(Carlo Coccia)가 1807년에 I matrimonio per lettera di cambio(계약서에 의한 결혼) 라는 제목으로 오페라를 만든바 있다. 로시니의 '결혼계약서'는 1810년 11월 3일 베니스의 테아트로 산 모이세(Teatro San Moise)에서 초연되었다.

 

프랑스에서의 현대적 연출에 의한 '결혼계약서' 공연

 

로시니는 속성작곡가로서 유명하지만 그 습성은 아마 그가 처음으로 오페라 작곡을 시작할때부터 비롯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로시니는 그의 첫 오페라인 '결혼계약서'를 단 며칠만에 완성하였다. 물론 단막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며칠만에 오페라 한 편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결혼계약서'의 서곡은 로시니가 볼로냐의 리체오음악원의 학생으로 있을 때에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오늘날 '결혼계약서'의 서곡은 연주회의 레퍼토리로서 자주 등장하고 있을 정도로 사랑을 받는 것이 되었다. 로시니는 '결혼계약서'에 나오는 듀엣인 Dunque io son를 나중에 다른 오페라에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세빌리아의 이발사' 제1막에 사용한 것이다. 음악이 산뜻하게 재미있으며 스토리도 유쾌한 것이어서 '결혼계약서'는 비록 단막이지만 오늘날에도 자주 공연되고 있다. 홰니 역을 맡은 소프라노는 로시니의 다른 오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콜로라투라의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결혼계약서' 음반 커버. 여섯 명 출연진이 다 모였다.

 

출연진은 6명으로서 단촐한 편이다. 토비아스 밀(Tobias Mill: B)은 영국 상인이다. 그에게는 예쁜 딸 홰니(Fanny: S)가 있다. 에드워드 밀포트(Edward Milfort: T)라는 가난한 청년과 사랑하는 사이이다. 슬룩(Slook: B)는 캐나다에서 온 상인이다. 토비아스 밀의 제안에 따라 홰니와 결혼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찾아온 사람이다. 이밖에 노턴(Norton: B)은 토비아스 밀의 서기이며 클라리나(Clarina: MS)는 홰니를 돌보아 주는 하녀이다. 오페라의 무대는 런던이어서 출연진의 이름들이 모두 영어식이지만 이탈리아에서 공연할 때에는 관중들의 편의를 위해 이탈리아식의 이름을 가져다가 붙였다. 토비아스 밀은 토비아 밀(Tobai Mill)이라고 했고 에드워드는 에도아르도(Edoardo)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의 이름은 오리지널 그대로이다.

 

홰니역의 안나마리 델로소

 

[줄거리] 시기는 18세기이며 장소는 런던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름이 영어식이다. 그래서 영국의 식민지인 캐나다에서 온 사람이 등장한다. 런던의 상인인 토비아스 밀은 어느날 캐나다의 부유한 상인인 슬룩으로부터 백지 결혼계약서를 받는다. 결혼계약서에는 당연히 신랑 누구, 신부 누구라는 것이 명시되어야 하는데 그 이름들이 없는 백지 결혼계약서이다. 고집은 세지만 그래도 눈치는 있는 토비아스 밀은 자기의 딸 홰니를 슬룩에게 시집 보내기로 작정한다. 그렇게 되면 슬룩으로부터 사업자금을 지원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계획을 알아차린 홰니는 무일푼의 애인인 에드워드 밀포트와 함께 대책을 수립한다. 계획이란 것은 다름 아니라 슬룩을 신체적으로 협박하여 결혼을 포기토록 하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계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슬룩은 홰니와의 결혼을 포기하고 나아가 밀포트를 재산상속인으로 만들어 모두를 놀라게 한다는 것이 기둥 줄거리이다. 이정도로 줄거리 소개를 끝내면 미안하므로 좀 더 자세히 설명토록 한다.

 

토비아스 밀과 슬룩이 결투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경쾌한 서곡이 끝나고 막이 오르면 부자 영국상인인 토비아스 밀의 집에서 일하는 모턴과 클라리나가 주인님의 사랑스러운 따님인 홰니의 앞날이 어떻게 될것인가를 놓고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두 가십장이들의 수다는 주인인 나이 많은 밀이 등장하는 바람에 중단된다. 밀은 지구의를 보며 세계지도를 공부하려고 방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세계지도에 대하여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얼마 안 있으면 캐나다라는 나라로부터 귀한 손님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리공부를 힘들여서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밖으로 나갔던 노턴과 클라리나가 편지 한장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 멀리 신세계 아메리카에서 온 편지이다. 밀이 편지 봉투를 얼핏 보니 슬룩이 쓴 글씨임을 당장 알아본다. 슬룩은 식민지 캐나다에 있는 밀의 사업 연락책이다. 편지에 의하면 슬룩이 런던에 온다는 것이다. 온다는 날짜를 계산해 보면 오늘이라도 도착할 예정으로 되어 있다. 밀은 오래 전에 슬룩에게 어떤 '상품'을 주겠다고 약조하여 계약서까지 만들어 단단히 서명한바 있다.그 상품이 어떤 것인지는 두 사람만이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 슬룩이 그 상품을 가지러 온다는 것이다.

 

토비아스 밀이 지구의를 보면서 캐나다로부터 슬룩이 도착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다.

 

이제 밀은 약속어음과도 같은 그 계약서를 꺼내어 다시한번 읽어본다. 밀이 슬룩의 부인이 될 훌륭한 여자를 조달해 준다는 내용이다. '상품'이라고 쓴 것은 바로 슬룩의 부인이 될 여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밀로서는 슬룩과의 사업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래서 슬룩을 위해서는 어떤 청탁이든지 마다하지 못할 입장이었다. 슬룩의 부인이 될 여자를 찾아주겠다는 것도 실은 사업상의 계약이었다. 돈많은 캐나다 상인에게 딸을 시집보내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이 어디가서 슬룩의 마음에 맞는 여자를 구할수 있다는 말인가? 남모르게 고민하던 밀은 자기의 예쁘고 사랑스러온 딸인 홰니를 '상품'으로 주기로 작정한바 있다. 밀이 슬룩과 맺은 계약서의 내용을 알게된 노턴은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라서 놀란다. 그리고 밀에게 '아니, 당사자인 홰니하고는 한마디 의논도 없이 그런 결정을 하면 어찌하느냐? 지금이라도 마음 좀 돌리시라'고 설득 겸 호소하였지만 소용이 없다.

 

슬룩과 밀포트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

 

밀과 노턴이 방에서 나가자 홰니가 에드워드 밀포트(에두아르도 밀포트)와 함께 들어온다. 밀포트는 홰니가 사랑하는 청년이다. 하지만 무일푼의 가난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밀에게 결혼을 승락해 달라고 말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다만, 밀포트에게는 부자 삼촌이 있는데 금명간 밀포트를 찾아 온다고 하니 그러면 무슨 수가 생길 것으로 생각하여 그때까지 결혼 얘기를 참고서 하지 않기로 한다. 그때 노턴이 들어와서 두 젊은 연인에게 밀의 계획을 알려주며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으냐면서 걱정 겸 경고를 한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밀이 들어온다. 노턴은 얼떨결에 밀포트를 새로 채용할 회계사라고 소개한다. 밀은 어떤 젊은이가 딸 홰니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불안했으나 밀포트의 설명을 듣고는 안심한다. 그리고는 홰니에게 이제 곧 아메리카에서 귀한 손님이 오실터이니 잘 대접하라고 지시한다. 그 말이 떨어지자 말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슬룩이 들어선다.

 

슬룩과 패니. 아 얼마나 아름답고 조신한 패니이던가.

 

슬룩은 얼마전부터 연습해온 유럽식 예의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서툴기가 이를데 없다. 슬룩은 기본적으로 아메리카식으로 실질적인 솔직함과 단순함이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잠시동안이지만 웃지못할 해프닝들이 벌어진다. 모두들 나가고 이제 방에는 홰니와 슬룩만이 남아 있게 된다. 슬룩은 홰니가 밀이 말한 '장래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홰니는 자기가 '상품' 취급을 받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제발 자기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설득한다. 그때 밀포트가 들어와서 슬룩에게 여자를 상품으로 생각하여 사업을 하는 것은 범죄이므로 만일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 모든 사업을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은근히 겁을 준다. 슬룩은 밀포트의 눈에서 정말로 자기를 걱정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홰니와 밀포트가 방에서 나가자 슬룩은 왜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자기를 걱정해 주면서 한편으로는 위협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한다.

 

홰니 역의 미간 밀러(Meagan Miller)

 

홰니를 돌보아 주고 있는 하녀인 클라리나는 홰니가 나이 많은 슬룩에게 시집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그건 홰니의 행복을 빼앗는 것이라고 믿어서 걱정한다. 그런 클라리나를 모턴이 위로하며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모턴은 기회를 보다가 슬룩을 보고 슬룩이 차지하려고 하는 '상품'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저당잡혀 있다면서 '상품'을 포기하라고 내비친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슬룩은 결국 '상품'을 포기하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하여 밀을 만나 계약은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한다. 이에 화가 난 밀은 슬룩에게 당장 결투를 하자고 말한다. 밀은 슬룩으로부터 속았고 또한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밀이 나가고 홰니와 밀포트가 들어온다. 슬룩은 홰니와 밀포트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슬룩은 홰니와 밀포트가 자기를 은근히 위협했던 것도 실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슬룩은 두 사람에게 감동한다. 아메리카의 실질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슬룩은 아무리 유럽이라고 해도 아버지가 딸의 의사에 반하여 딸을 강제로 시집 보낼수는 없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슬룩은 결혼을 위해 만들었던 백지계약서에 '상품'을 자기의 상속인으로 지정된 밀포트에게 이양한다는 내용을 써 넣는다. 홰니와 밀포트는 슬룩의 관대함에 크게 감동한다. 홰니는 슬룩에게 행복하게 살겠다고 약속한다.

 

토비아스 밀

 

한편, 밀은 슬룩과의 결투를 준비하느라고 난리도 아니다. 마치 전쟁 준비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는 중에 슬룩은 칼 뿐만 아니라 권총에서도 솜씨가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다. 아마 노턴으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밀은 은근히 겁이 난다. 그런 밀을 보고 슬룩이 비웃는다. 밀이 결투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파악한 참관인이 얼른 결투를 중지시키고 없던 일로 만든다. 슬룩은 밀에게 결혼계약서를 보여주며 이렇게 되어 있으니 어서 홰니를 밀포트와 결혼시키라고 설득한다. 그러면서 밀포트가 자기의 재산상속인임을 확실하게 말해준다. 어쩌면 슬룩은 밀포트가 기다리던 부자 삼촌인지도 모른다. 이제 모두들 행복하다. 홰니와 밀포트가 행복한 것은 물론이고 노턴과 클라리나도 행복하다. 밀은 그 '상품'이 1년이 지나면 귀여운 손자라는 이자가 붙게 될 것으로 생각하여 행복하다. 슬룩은 편안한 마음으로 파이프를 꺼내 물면서 방안을 서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