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마르셰와 피가로
피에르 오귀스탱 캬롱 드 보마르셰(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 1732-1799)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로서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빼 놓을수 없다. 아마 세계의 어느 구석에서든지 매일 이 두 편의 오페라 중에서 한 편은 공연되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대단한 두 오페라의 스토리는 모두 보마르셰라는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니 보마르셰라는 사람이 대단하기는 대단하다고 아니할수 없다. 보마르셰는 피가로와 관련하여 세 편의 희곡을 썼다. 그중에서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제1편이며 '피가로의 결혼'이 제2편이다. 그런데 시기적으로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먼저 작곡되었고 그 후에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작곡되었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참고로 제3편은 '죄많은 어머니'(La Mère coupable: The Guilty Mother)는 1966년에 프랑스의 다리우스 미요가 오페라로 만들었다.
우리가 보통 보마르셰라고 부르는 사람의 본명은 피에르 오귀스탱 캬론 드 보마르셰(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이다. 1732년 파리에서 태어나 1799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보마르셰의 아버지는 시계제작공이었다. 그래서 보마르셰도 어릴 때부터 시계 만드는 기술을 익혀서 훌륭한 시계공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직업이라고 볼수는 없다. 그에게는 발명가, 음악가, 외교관, 도망자, 스파이, 출판인, 소설가, 극작가, 무기거래상, 혁명가라는 여러 수식어가 붙는다. 혁명가라고 하는 것은 그가 프랑스 혁명뿐 아니라 미국의 혁명에도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세토록 그의 이름을 떨치게 만든 직업은 극작가이다. 그가 쓴 세편의 피가로 관련 희곡 때문이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백작과 로지나
반복되는 설명이지만 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은 '세빌리아의 이발사'(Le Barbier de Séville 또는 la Précaution inutile: 쓸데없는 조심: 1775),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 또는 La Folle Journée: 야단법석의 날: 1784), 그리고 '죄 많은 어머니'(La Mère coupable: The Guilty Mother 또는 The other Tartuffe: 또 다른 협잡꾼: 1792)이다. 보마르셰의 3부작은 스토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3부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은 피가로와 알마비바 백작뿐이다. 로지나(나중에 백작부인)는 1부와 2부에 나온다. 아무튼 이 세 사람(피가로, 백작, 로지나)의 사회적 신분은 이야기가 시작되기 이전과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 그리고 프랑스 혁명 이후를 통하여 현저하게 변한다. 그것이 또한 흥미꺼리이다. 보마르셰가 피가로와 알마비바 백작의 이름을 처음 등장시킨 것이 피가로 3부작은 아니다. 3부작의 제1편인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나오기 8년전인 1765년에 Le Sacristain 이라는 작품에 처음으로 피가로와 알마비바라는 이름을 등장시켰다. 보마르셰가 스페인 여행 중에 받은 영감으로 썼다는 것이며 그것을 발전시켜 피가로 3부작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한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수산나와 피가로
피가로 희곡은 어떤 면에서 보마르셰 자신의 자서전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2편에서 판사로 나오는 돈 구즈만(Don Guzman)이라는 이름은 모차르트의 오페라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희곡에는 등장한다. 제3부인 '죄많은 여인'에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스페인군의 장교가 된 베기아르스(Bégearss)라는 이름도 나온다. 이 두사람은 실제로 Goezman 과 Bergasse라는 이름의 사람으로 평소 보마르셰가 대단히 싫어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피가로의 결혼'에 등장하는 셰루뱅(케루비니)는 젊은 시절의 보마르셰와 흡사하다는 지적이다. 보마르셰는 사랑하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마치 셰루뱅의 처지와 흡사했던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과 '죄많은 어머니'에 나오는 수잔느(수산나)는 보마르셰의 세번째 부인인 마리 테레스 드 빌러 마블라츠(Marie-Thérèse de Willer-Mawlaz)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백작이 독백을 하는 몇몇 구절에는 보마르셰의 여성편력에 대한 노골적인 경험담이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파리에서 1775년에 연극으로 초연되었고 후속편인 '피가로의 결혼'은 1781년에 검열을 통과했다. 그러나 곧이어 루이 16세가 소설을 읽어본후 공연금지시켰다.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는 공연금지를 한탄했다. 왕비의 주위에 있는 여러 영향력 있는 사람들도 루이 16세의 공연금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는 연극의 내용이 지나치게 귀족을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라고 하여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루이 16세는 왕비가 공연금지를 철회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거절하였다. 그후 서너해 동안 보마르셰는 검열에 통과하기 위해 내용을 여러번 수정하였다. 그리하여 루이 16세는 마침내 1784년 공연금지를 철회하였다. 그해에 초연된 '피가로의 결혼'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귀족들도 일부러 구경하러 왔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그로부터 2년 후에 비엔나의 궁정극장에서 초연을 가졌다. 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 중에서 마지막인 '죄많은 어머니'는 파리에서 1792년에 초연되었다. 프랑스의 위대한 극작가인 몰리에르를 추모하기 위해 공연되었다. '죄 많은 어머니'는 원래 몰리에르가 쓴 희곡의 타이틀이다. 이 작품을 보마르셰가 수정하여 내놓은 것이다. 보마르셰는 '죄 많은 어머니'에 '또 다른 협잡꾼'(The Other Tartuffe)라는 부제를 붙였다. 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은 연극으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오늘날에도 오페라와 함께 세계 곳곳의 연극 극장을 주름잡고 있다.
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에서 제3부인 '죄 많은 어머니'( La Mère coupable)의 장면 몽따쥬
[피가로 3부작을 바탕으로 만든 다른 작품들]
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은 영화, 연극, 오페라, 발레 등 여러 형태의 공연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 1782년에 이탈리아의 조반니 파이시엘로(Giovanni Paisiello)가 Le Barbier de Séville 를 바탕으로 '세빌리아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또 다른 타이틀로는 La precauzione inutile(쓸데없는 조심)이라고 했다.
- 1786년에 모차르트가 로렌조 다 폰테의 대본으로 Le nozze di Figaro(피가로의 결혼)을 완성했다. Le Mariage de Figaro의 이탈리아어 타이틀이다.
- 1790년에 슬로베니아의 극작가이여 역사학자인 안톤 토마즈 린하르트(Anton Tomaz Linhart: 1756-1795)가 Le Mariage de Figaro를 바탕으로하여 Ta veseli dan ali Matiček se ženi(즐거운 오늘 또는 마티체크의 결혼)이라는 또 다른 희곡을 썼다.
- 1796년에 말타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했던 니콜라스 이주아르(Nikolas Isouard: 1775-1818)가 Le Barbier de Séville 를 바탕으로 Il barbiere di Siviglia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 1799년에는 포루투갈의 마르코스 포르투갈(Marcos Portugal: 1762-1830)이 이탈리아의 게타노 로씨(Gaetano Rossi)의 대본으로 오페라 La pazza giornata(정신없는 날) 또는 Il batrimonio di Figaro(피가로의 결혼)를 작곡했다.
- 1816년에는 조아키노 로시니가 세사레 스테르비니(Cesare Sterbini)의 대본으로 저 유명한 Il barbiere di Siviglia(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작곡했다.
- 1905년에는 쥘르 마스네가 프란시스 드 크루아세(Francis de Croisset)와 앙리 깽(Henri Cain)의 대본으로 '피가로의 결혼'의 후속편인 Chérubin(셰루뱅: 케루비노)를 작곡했다.
- 1950년에는 프랑스의 무대감독이며 극작가인 사샤 귀트리(Sacha Guitry)가 Beaumarchais(보마르셰)라는 코미디를 썼다. 사샤 귀트리의 부인은 유명한 소프라노 겸 배우인 이본느 쁘랭땅이다.
- 1966년에는 프랑스의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1892-1974)가 피가로 3부작의 제3편을 바탕으로 직접 대본을 만들어 La Mère coupable(죄 많은 어머니)이라는 오페라를 완성했다.
- 1991년에는 미국의 작곡가인 존 코릴리아노(John Corigliano: 1938-)이 La Mère coupable를 참고로 하여 The Ghosts of Versailles(베르사이유의 유령)이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대본은 윌렴 호프만(William Hoffman)이 썼다.
- 1991년에는 또한 스웨덴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잉거 위크스트룀(Inger Wikström)이 La Mère coupable를 바탕으로 Den brottsliga modern 라는 오페라를 완성했다. 대본은 작곡자와 미카엘 힐린(Mikaael Hylin)이 공동으로 썼다.
- 1996년에는 사샤 귀트리의 극본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영화감독인 에두아르 몰리나로(Édouard Molinaro)가 Beaumarchais l'insolent(불한당 보마르셰)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존 코릴리아노의 '베르사이유의 유령'은 '죄 많은 여인'의 후속편이라고도 볼수 있다. '베르사이유의 유령'에는 마리 앙뚜아네트까지 등장한다. 사진은 마리 앙뚜아네트. 오페라의 시기는 1793년, 장소는 베르사이유 궁전이다.
'오페라 이야기 > 오페라 더 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의 오페라 베스트 10 (0) | 2011.07.25 |
---|---|
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과 오페라의 주인공들 (0) | 2011.07.06 |
일본에 처음 소개된 서양 오페라 '콕스와 복스' (0) | 2011.05.26 |
마리아 테레자 여제가 즐겨한 '가짜 정절' (0) | 2011.05.25 |
중국에서 처음 공연된 유럽 오페라 '라 체키나' (0) | 2011.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