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의 발자취를 따라
하이든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의 오라토리오, 미사곡, 교향곡, 실내악, 협주곡, 오페라...하나같이 최고의 아름다운 걸작들이다.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로라우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하이든은 1809년 5월 31일, 향년 77세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이든은 영국에도 잠시 머물렀고 헝가리, 체코공화국 등도 방문하였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비엔나에서 약 5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부르겐란트의 아이젠슈타트에서 지냈다. 아래의 지도를 보면 하이든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어느 곳에서 살았는지를 알수 있다. 예전에는 모두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로 오스트리아(초록색), 헝가리(노란색), 슬로바키아로 나뉘어져 있다. 하이든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마치 성지순례를 하는 것처럼 하이든이 살았던 곳을 찾아가 경배를 해야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이든이 태어난 로라우, 어릴 때 학교를 다녔던 하인부르크, 에스터하지 공자의 헝가리 저택이 있는 에스터하자, 하이든이 거의 평생을 보낸 부르겐란트의 아이젠슈타트(하이든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비엔나.
- 하이든은 1732년 지금은 니더 외스터라이히주에 속한 로라우(Rohrau)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하이든의 아버지는 대장장이로서 주로 마차의 바퀴를 수선하는 일을 맡아 했다. 그러므로 음악과는 관계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렇지만 하이든의 가족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어서 식구들이 함께 모여 노래도 부르고 악기도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민속음악을 연주했다. 하이든이 태어난 로라우 마을의 집은 그동안 여러번 보수되어 지금은 '하이든 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오베레 하우프트슈트라쎄(Obere Hauptstrasse) 25번지이다. 기념관은 매일 오전 10시에 문을 열어 오후 4시에 닫는다. 단, 월요일을 쉰다. 기념관의 정원에는 하이든의 흉상에 세워져 있다. 하이든은 로라우의 집에서 태어나고 나서 5년 동안 지냈다. 기념관에는 하이든이 사용했다고 생각되는 피아노, 하이든과 관련된 편지, 악보 등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로라우에 있는 하이든의 생가 겸 기념관(1970년대)
최근 재단장된 로라우의 하이든생가 기념관. 요제프 하이든과 미하엘 하이든의 생가라고 적혀 있다.
하이든 생가의 하이든이 태어난 방
- 하이든은 다섯 살 때인 1737년 고향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인부르크(Hainburg: Hainburg an der Donau) 마을로 가서 먼 친척인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Johann Mathias Franck)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하인부르크 학교의 교장이었으며 학교 합창단의 지휘자였다. 어린 하이든은 학교 공부도 하고 합창단에 들어가 노래도 불렀다. 하이든은 하인부르크에서 약 3년간 지냈다.
하이든이 어린 시절 약 3년동안 지냈던 하인부르크 마을 전경
- 하이든은 1740년, 비엔나로 왔다. 비엔나로 오게 된 것은 슈테판성당의 음악감독인 게오르그 폰 로이터(Georg von Reutter: 1708-1772) 때문이었다. 그는 우연히 하인부르크에 왔다가 하인부르크 학교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는 하이든의 음성을 높이 평가하여 슈테판성당의 합창단원으로 데려갔다. 비엔나에 온 어린 하이든은 슈테판성당 옆에 있는 카펠하우스(Kappelhaus: 소년합창단원의 기숙사 건물)에 있는 게오르그 폰 로이터의 아파트에서 무려 9년 동안 지냈다. 하이든이 슈테판성당의 소년합창단원이 되어 온지 5년후인 1745년에 고향 로라우에 있던 동생 미하엘(Michael)도 슈테판성당의 소년합창단원으로 선발되어 왔다. 현재 카펠하우스는 오래전에 도시계획으로 철거되어 없다.
하이든 당시의 슈테판성당과 그 앞에 있었던 카펠하우스. 카펠하우스에는 슈테판성당 음악감독 겸 지휘자와 소년합창단원들이 투숙했었다. 소년 하이든도 로이터와 함께 이 집에서 지냈다.
- 변성기가 되어 더 이상 보이스 소프라노(Boy's soprano)의 역할을 맡을수 없게 된 하이든은 1949년, 슈테판성당에 종사하는 어떤 직원의 주선으로 미하엘교회의 독창자인 요한 미하엘 슈팡글러(Johann Michael Spangler)의 집에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2년동안 지냈다. 하이든은 미하엘교회에서 요한 미하엘 슈팡글러의 오르간 반주를 하기도 했다.
호프부르크 궁정 앞 미하엘러광장에 있는 미하엘교회
- 하이든은 1750년부터 약 7년동안 비엔나의 여러 곳에서 지냈으며 이 기간중에 마리아첼로 순례여행을 가기도 했고 1753년에는 잠시동안 니더 외스터라이히 주에 있는 만너스도르프(Mannersdorf) 온천마을에 가서 지내기도 했다. 우선 하이든은 요한 미하엘 슈팡글러의 집에서 나와 미하엘교회에 부속되어 있는 미하엘러하우스(Michaelerhaus)의 다락방에서 지냈다. 난방이 안되는 방이어서 겨울에는 무척 추웠다고 한다.
콜마르크트 11번지의 미하엘러하우스. 하이든이 이 건물의 꼭대기 층에 있는 방에서 2년동안 지냈다. 원래 앞쪽의 파도치는 듯한 지붕을 가진 건물은 마굿간이었다.
- 어릴 때부터 신앙심이 깊었던 하이든은 20대의 청년시절에 시간을 내어 슈티리아 알프스에 있는 마리아첼바질리카(Mariazell Basilica) 순례교회를 순례하였다. 마리아첼의 바질리카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교회일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이름 높은 순례교회로서 기적을 일으킨 마리아 성화가 모셔져 있다.
마리아첼 바질리카
- 하이든은 1753년 여름, 음악스승인 니콜라 포르폴라(Nicola Propora: 1686-1768)와 함께 니더 외스터라이히 주의 헝가리 국경지대에 있는 만너스도르프(Mannersdorf am Leithagebirge) 온천장에 가서 지냈다. 하이든은 포르포라의 반주자 겸 심부름꾼 역할을 했다. 포르포라는 베니스대사 코레르(Correr)의 애인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하이든인 만너스도르프에서 이곳을 방문한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 비엔나 궁정의 카펠마이스터이며 작곡가인 게오르그 크리스토프 봐겐자일(Georg Wagenseil: 1715-1777), 이탈리아 출신의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주세페 본노(Giuseppe Bonno: 1711-1788) 등 여러 작곡가들을 만나 친분을 맺게 되었다.
만너스도르프 전경
- 하이든은 1757년부터 1761년까지 4년동안 모르친(Morzin) 백작에게 봉사하였다. 이 기간동안 겨울에는 비엔나에서, 여름에는 현재 체코공화국의 루카베츠(Lukavec: 또는 Dolni Lukavice)에 있는 백작의 장원에서 보냈다.
루카베츠에 있는 모르친백작의 궁전. 하이든은 이곳에서 머물렀었다.
체코공화국 루카베츠의 모들락 호수. 여름 휴양지로서 이름 높다.
- 하이든은 1761년, 즉 29세 때부터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에스터하지 궁전의 음악감독(Kappelmeister)으로서 에스터하지 가문과의 긴 인연을 시작한다. 하이든은 1761년부터 1766년까지 5년동안 아이젠슈타트에 상주하였으나 1766년부터 1790년까지는 현재 헝가리의 페르퇴드(Fertőd)에 있는 에스터하자 궁전에서도 음악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맡아했다. 처음에는 여름에만 페르퇴드에 갔었으나 1778년부터는 1년에 10개월은 페르퇴드에 가서 지냈다. 그래서 하이든은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집을 팔고 에스터하자 궁전 옆에 집을 사서 살았다. 현재 마다흐 세타니(Madach sétány) 1번지에 있는 집은 하이든 기념관 및 화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이든은 페르퇴드에 있으면서 1770년대에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현재의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인근에 있는 에스터하지 소유의 궁전에서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가졌다.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하이든이 살던 집. 현재는 요제프 하이든 가쎄 12번지. 하이든 기념관이다.
- 1790년, 하이든은 그를 후원해 주던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에스터하지 가문과의 인연을 마무리하고 비엔나에 정착하였다. 하이든은 9월 28일에 비엔나에 와서 12월 말까지 석달동안 지내다가 런던으로 갔다. 하이든이 비엔나에 정착하여 살던 집은 현재 자일러슈태테(Seilerstätte) 21번지에 입구가 있는 건물로서 당시에는 봐써쿤스트바슈타이(Wasserkunstbastei) 1196 번지였다. 니더 외스터라이히 주정부의 공직자로서 친구인 요한 네포무크 함버거(Johann Nepomuk Hamberger)의 집으로 하이든은 이 집에 세를 들어 살았다. 하이든이 런던에 가서 있는 중에도 하이든의 부인이 그 집을 계속 임대하여 살았다. 훗날 하이든이 살던 이 집에는 베토벤이 1801년에 세를 들어 살았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 이 안에 있는 연주회장은 하이든 홀이라고 부른다.
에스터하지 궁전의 하이든 홀. 하이든 페스티발의 연주회가 주로 열리는 장소이다.
- 하이든은 1791년 1월부터 1792년 6월까지 런던에서 지냈다. 1791년 12월 5일에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하이든은 런던에 있었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이든은 런던에서 처음에는 그레이트 풀트니 스트리트(Great Pulteney St) 18번지에 살았다. 하이든을 초청한 요한 페터 잘로몬(Johann Peter Salomon)이 살고 있는 집이다. 하이든은 건너편 33번지에 있는 브로드우드(Broadwood) 피아노회사가 제공한 방에서 작업을 하였다. 다음에는 리쓴 그로우브(Lisson Grove)에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에 방을 빌려 두어달 동안 지내면서 작곡에 전념했다. 하이든은 묵고 있던 농가가 팔리자 은행가 나타나엘 브라씨(Nathanael Brassey)의 시골 별장에 들어가 지냈다. 런던 북쪽 21 마일 떨어진 허팅포드베리(Hertingfordbury)라는 마을에 있는 집이었다. 하이든이 영국에서 살았던 집들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지만 허팅포드베리의 집만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하이든은 1791년 9월에 처음 런던에서 묵었던 그레이트 풀트니 스트리트(Great Pulteney Street) 18번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런던 북쪽에 있는 허팅포드베리 마을. 하이든이 1791년 8월부터 9월까지 지낸 곳이다.
- 하이든은 1791년 7월부터 1792년 6월까지 거의 1년 동안 영국의 이곳 저곳을 여행하였다. 처음에는 옥스포드에 가서 얼마동안을 지냈다. 옥스포드는 하이든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대단히 성대한 수여식이었다. 1791년 11월에는 캠브릿지를 방문하였다. 하이든은 런던으로 돌아가기 전에 랭엄(Langham)에 있는 패트릭 블레이크(Patrick Blake)의 집에서 얼마동안 머물렀다. 하이든은 이 집에 있을 때에 모차르트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792년 6월에는 윈저성을 방문했다. 그리고 아스코트 경마장에도 구경을 갔다.
- 하이든은 1792년 7월 비엔나 집으로 돌아와 1794년 1월까지 지내다가 1794년 2월에 다시 런던으로 가서 1795년 8월까지 지냈다. 하이든은 런던에서 베리 스트리트(Bury St) 1번지에 살았다. 이 기간에 그는 햄튼 코트, 고스포트(Gosport), 포츠마우스, 와이트 섬, 윈체스터, 바스(Bath), 브리스톨, 화넘(Farnham), 웨이벌리 애비(Waverley Abbey)등을 방문하며 지냈다.
런던의 하노버 스퀘어 룸스(Hannover Square Rooms). 하이든이 런던에서 작곡한 작품들이 주로 연주된 곳이다. 하노버 스퀘어의 코너에 있다. 퀸스 콘서트 룸스(Queen's Concert Rooms)라고도 부른다.
- 하이든은 1795년 9월 비엔나로 돌아와 1809년 5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냈다. 그때에는 자일러슈태테의 집을 정리한 때여서 새로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에 집을 구하여 처음 2년동안 지냈다. 노이어 마르크트는 오늘날 돈너 분수가 있는 곳이다. 몇번지에 살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이든은 비엔나에 본집을 두고 있으면서 1796년부터 1803년까지 여름에는 거의 아이젠슈타트에 가서 지냈다. 새로 구성된 에스터하지 오케스트라를 지도하기 위해서였다. 하이든은 아이젠슈타트에 머물면서 헤르메네길트 에스터하지 공주의 명명일을 축하하기 위한 미사곡을 작곡했다. 이 곡은 하이든의 지휘로 버그키르헤(Bergkirche: 갈보리언덕교회)에서 연주되었다. 현재 버그키르헤에는 하이든의 영묘가 있다.
마리아힐르프 교회 앞에 있는 하이든 기념상. 이 교회의 뒷편 길이 하이든가쎄이며 하이든 기념관이 있다.
1800년대의 노이어 마르크트. 하이든은 이 광장의 어떤 건물에 방을 얻어 살았다.
- 하이든은 1797년부터 1809년까지 12년동안 당시 비엔나 교외인 빈트뮐레(Windmühle)에 집을 사서 살았다. 당시에는 슈타인가쎄(Steingasse)에 있던 이 집은 오늘날 하이든가쎄 19번지로서 '하이든 기념관'이다. 하이든은 이 집을 1793년에 샀다고 한다. 하이든은 이 집에서 위대한 오라토리오인 '천지창조'를 작곡했다.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1809년은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하고 있던 때였다. 나폴레옹은 하이든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자 그의 집에 병사들을 보내 엄중하게 경비하고 장례를 지원토록 했다. 나중에 이 집에는 브람스가 잠시 세들어 살았다. 그래서 현재의 '하이든 기념관'에는 방 하나에 브람스를 기념하는 전시를 하고 있다. '하이든 기념관'이 문을 연 것은 일찍이 1899년이다.
하이든가쎄 19번지에 있는 '하이든 기념관'. 이곳에서 하이든이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의 하이든파르크에 있는 하이든 처음 묘소의 묘비. 그후 하이든의 유해는 아이젠슈타트의 갈보리언덕교회 지하실로 옮겨졌다. 비엔나 12구 마이들링의 가우덴츠도르퍼 귀어텔에 공원입구가 있다.
버그키르헤의 지하에 있는 하이든 영묘
'비엔나와 음악 > 파파 하이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이든의 애인 루이지아 폴첼리(Luigia Polzelli) (0) | 2013.01.06 |
---|---|
14편의 미사곡 (0) | 2011.08.14 |
하이든의 머리 수난사건 (0) | 2011.08.12 |
하이든과 민속음악 (0) | 2011.08.12 |
'파파 하이든' (0) | 2011.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