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하이든의 머리
145년만에 돌아왔다
요셉 하이든. 세상을 떠나고서도 큰 수난을 겪었다.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후 시신에서 머리가 절단되어 도둑을 맞았으며 그 후 무려 154년이 지나서야 두개골이 돌아와서 온전히 입관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수 없다. 유럽에서는 천재들의 머리(두개골)를 가지고 있으면 자기와 자기들의 자손들의 머리가 천재처럼 된다는 이상한 속설이 있었다. 특히 위대한 예술가의 두개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며 영광이었다. 그래서 뛰어난 예술가들의 머리를 확보하려고 은밀히 도둑질을 감행하는 경우가 있었다.
비엔나 마르가르텐의 훈트슈투름 공동묘지에 있는 하이든 비석. 하이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곳에 묻혔다. 당시는 나폴레옹 군이 비엔나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수선하여 제대로의 장례식을 치루지 못했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베토벤의 머리를 훔쳐가려던 음모가 있어서 베토벤의 친구들이 밤새 묘지를 지켰다는 얘기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모차르트의 머리도 훔쳐가려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어디에 매장되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시 매장했던 인부뿐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어떤 사람이 모차르트의 머리를 가져다 주면 거금을 주겠다고 제안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후에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겨야 하는 바람에 성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음악가들에게만 그런 일이 시도가 계획된 것인지, 또는 비엔나에서만 그런 음모가 진행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이든의 경우에는 실제로 머리를 도난당하였다고 154년 후에야 겨우 돌아와서 몸통과 함께 다시 안치되었다고 하니 그저 놀라지 않을수 없다. 다만, 하이든의 경우에는 두개골을 보관하고 있음으로서 자기 자신이나 자기 후손들의 머리가 좋아진다는 믿음 때문은 아니며 해부학자들이 연구용으로 훔쳐서 가져갔었다는 것이다.
아이젠슈타트의 베르크키르헤(갈보리언덕교회). 하이든플라츠 1번지에 있다. 이 교회의 지하에 하이든 영묘가 있다.
요셉 하이든은 1809년 5월 31일 향년 77세로 비엔나의 굼펜도르프(현재의 마리아힐르퍼 지역)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마침내 비엔나가 나폴레옹 군대에게 점령당한 때였다. 그러한 때였으므로 하이든의 장례는 간소하게 거행되었다. 하이든의 시신은 현재의 5구 마르가레텐에 있었던 훈트슈투름(Hundstrum)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며칠후 어떤 두 남자가 묘지관리인을 매수하여 하이든의 묘지를 파헤치고 그의 머리를 잘라 훔쳐간 사건이 벌어졌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한 사람은 요셉 칼 로젠바움(Joseph Carl Rosenbaum)이라는 사람으로 에스터하지가의 비서를 맡아했던 사람이며 다른 한 사람은 요한 네포무크 페터(Johann Nepomuk Peter)라는 사람으로 니더 외스터라이히주의 주립감옥소장이었다. 로젠바움은 하이든과 잘 아는 사이였다. 그가 아이젠슈타인에 있는 에스터하지 궁전에 근무할 때에 하이든은 그와 소프라노 테레제 가쓰만(Therese Gassmann)과의 결혼을 주선했던 일도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베르크키르헤 지하의 하이든 영묘 내부와 하이든의 머리가 보관되어 있는 대리석관
로젠바움과 페터가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은 골상학(Phrenology)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이었다. 골상학이라고 하니까 두개골을 이용하여 관상을 보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 두개골의 해부를 통하여 뇌의 어느 파트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특히 지능이나 정신력을 관장하는 일은 어느 부분이 어떻게 발달해야 하는지를 따지는 학문으로 당시 유럽의 일각에서 유행이었다. 그러므로 골상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은 뛰어난 지능을 가진 위대한 천재들의 두개골을 골상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었다. 매장되어 있는 시신에서 머리를 절단한다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시신의 부패가 진행되고 있으며 악취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젠바움과 페터는 하이든의 머리를 절단한후 깨끗이 처리하여 해골을 만들어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페터는 '하이든의 두개골에서 음악과 관련된 융기된 부분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페터는 연구를 마친후 하이든의 두개골을 훌륭하게 만든 검은 상자에 넣어 잘 보관했다고 한다. 상자에는 작은 유리창을 달아서 안을 들여다 볼수 있게 했으며 뚜껑에는 금으로 리라를 조각하여 붙였다고 한다.
하이든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자(1714-1790)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지 10여년이 지난 1820년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2세(하이든의 후원자였던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의 아들)는 굼펜도르프에 있는 하이든의 유해를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가족묘로 이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스터하지 2세는 훈트슈투름 공동묘지에 있는 하이든의 유해를 이장하기 위해 묘지를 파헤치고 관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때서야 두개골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사실상 그 전부터 로젠바움과 페터가 하이든의 머리를 훔쳐 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누구도 나서서 사건을 밝혀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에스터하지 2세는 즉각적으로 두 용의자의 집을 수색하여 하이든의 두개골을 찾도록 했다. 그런 소식을 들은 페터는 하이든의 두개골을 상자에서 꺼내어 보자기에 싸서 로젠바움에게 전했다. 로젠바움은 하이든의 두개골을 침대의 매트리스 속에 감추었다. 사람들이 로젠바움의 집을 수색할 때에 로젠바움의 부인인 테레제는 두개골을 숨긴 매트리스를 일부러 깔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테레제에게 일어나라고 하자 테레제는 지금 생리중이기 때문에 일어날수 없다고 버티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트리스 속을 수색하지 못했다. 나중에 로젠바움은 계속 추궁을 당하자 어쩔수 없이 에스터하지 공자에게 하이든의 두개골을 전달했다. 그런데 가짜를 주었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
그로부터 얼마후 로젠바움은 죽음에 이르러 유언을 통하여 하이든의 두개골을 페터에게 전해 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일 페터도 죽게 되면 두개골을 비엔나 악우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에게 기증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리하여 1895년 페터는 죽음에 앞서서 하이든의 두개골을 비엔나 악우회에 기증하였다. 그후 한동안 사람들은 비엔나 악우회에 가서 하이든의 두개골을 관람하고 감격하였다.
비엔나 악우회 건물. 하이든의 두개골을 보관하고 있다가 1954년에야 아이젠슈타트로 돌려보냈다.
1932년,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의 후손인 파울 에스터하지는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베르크키르헤(Bergkirche: 언덕교회)의 지하에 대리석 영묘를 만들고 그곳에 하이든의 유해를 안치키로 결정했다. 1932년은 하이든의 탄생 2백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였다. 베르크키르헤의 원래 이름은 '갈보리언덕교회'(Kalvarienbergkirche)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수난을 당한 언덕을 기념하는 교회이다. 하이든은 이 교회에서 에스터하지 가족을 위한 미사를 여러 편 작곡하여 초연하였기 때문에 하이든과 에스터하지에게 모두 의미있는 장소였다. 에스터하지 공자의 희망은 하이든의 유해를 온전하게 보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비엔나 악우회에 있는 두개골을 가져와야 했다. 하지만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 2차 세계대전 등의 와중에서 두개골의 이전은 쉽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1954년,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지 145년만에 하이든의 머리는 제자리를 찾아 돌아올수 있었다. 하이든플라츠(Haydnplatz) 1번지에 있는 베르크키르헤는 하이든의 유해를 안치한 관을 종려주일, 부활주일등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연중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반인의 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입장료는 어른이 3유로, 아이들은 1유로이다.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집. 현재 비엔나의 마리아힐르프구 하이든가쎄에 있다.